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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 쇼팽과 퀴리부인의 삶이 어린 바르샤바

by 혜강(惠江) 2005. 12. 16.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의 상처와 자유에의 열망 서린 

피아노의 시인 쇼팽과 퀴리부인의 바르샤바 

 


글·사진 남상학

 

 

 

 

- 바르샤바 거리에서 만난 삐에로 -



  러시아의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둘러본 우리는 50년 가까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사회주의 국가체재를 유지하다 독립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바르샤바 프레드릭 쇼팽 공항에 도착한 것은 9시 55분.  어딘가 쓸쓸하고 황량할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폴란드 공항은 산뜻하고 청량했다.  현대시 강의 시간, 주지시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된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 ’
                       

     - 김광균의 “추일서정秋日抒情)”에서 

  이 시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쓸모없는 지폐를 소재로 하여 가을날의 쓸쓸함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과 애수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폴란드가 주는 인상은 이 시가 주는 황량함, 허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겁고 음산했던 러시아와는 달리 자유스럽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니 포근하다고 해야 할까.


 

 


폴란드는 어떤 나라인가?

 

 

- 견고하게 축조된 바르샤바 성곽 -



    4세기 말경 훈족의 침략으로 슬라브족이 서진(西進)하여 건설한 폴란드는 파란만장한 역사적 격랑(激浪)을 겪었다. 그러나 고비마다 슬기와 지혜로 난국을 극복하여 빛나는 문화적 전통의 국가로 성장했다. 근세에 들어 1795년부터 1918년까지 123년간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에 의하여 삼국으로 분할된 바 있으며, 나치 점령 시대에 들어서 1939년 9월 30일 파리에 망명 정부를 세웠는가 하면, 2차 대전 이후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 계속적으로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받았다.

  씻을 수 없는 오욕(汚辱)의 역사 때문에 폴란드인들은 강인한 민족주의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러한 애국주의 정신이 있었기에 1944년의 저 유명한 바르샤바 대 봉기(Warsaw Uprising)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후 자유 민주투사 바웬사는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을 타고 사회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투철한 투쟁으로 1983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바웬사의 조국 폴란드는 교황 요한 바오로를 비롯하여 음악가 쇼팽, 쿼바디스의 작가 섕켸비치, 퀴리부인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바스라 강 유역의 수도 바르샤바(WARSZAWA)

 

 

-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성문 -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는 폴란드 최대의 도시이며 역사가 오래된 아름다운 도시로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며, 약 2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다.  

    10세기경 처음 취락과 성벽이 형성된 후 15∼16세기에는 마조프셰공(公)의 거성(居城)으로, 지그문트 3세가 이곳을 왕국의 수도로 정한 이후 크게 발전하였다. 그후 1807년에는 B. 나폴레옹이 창설한 바르샤바공국의 수도가 되었고, 1815년부터는 빈 회의 결과 성립한 러시아령 폴란드왕국의 수도가 되어 정치· 산업·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바르샤바의 80%가 파괴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복원되었다. 

    시가지는 비슬라 강 중류 양쪽 연안의 하안단구 위에 형성되어 있다. 바르샤바는 수륙공(水陸空)의 교통상 요지로서 레닌그라드·모스크바·베를린·파리·빈·소피아 등지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발착한다. 특히 비슬라 강에 있는 하항은 운하망에 의해 드네프르강·오데르강·엘베강과 연결됨으로써 내륙수운의 중심이 된다. 

     우리가 탄 전용버스가 도심을 지날 때, 안내자가 시가지에 치솟은 고층빌딩을 가리키며 '대우빌딩'이라고 설명한다. 바르샤바는 일찌기 대우그룹이 동구권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곳이었다. 거리에서도 질주하는 대우차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세계 도처에서 뻗어가는 우리의 국력을 확인하는 것도 여행의 또 하나 즐거움이 된다.       

 

쇼팽의 고향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 

 

 

- 쇼팽의 생가임을 알리는 간판 -

 



     바르샤바는 여러 관광거리가 있으나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피아노의 시인 쇼팽(Frdric Franois Chopin 1810∼1849)의 생가가 있는 젤라조바 볼라 마을이었다. 바르샤바에서 서남쪽으로 50Km 쯤 떨어져 있는 아름다운 전원의 마을이다.

    쇼팽은 당시 이곳의 영주였던 스카르벡 백작의 먼 친척이자 프랑스어 교사였던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1810년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하였던 쇼팽은 그의 나이 7세 때 바르샤바로 이사를 갔지만 종종 이곳을 방문하여 그의 예술가로서 감성을 키웠다고 한다.

    이 지역 농민들이 즐겨 부르던 마주르카곡은 나중에 그가 고향을 생각하고 작곡한 많은 곡들 속에 용해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 고향마을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말해 준다. 

 

 

 

- 제라조바 볼라에 있는 쇼팽의 생가 입구 -



    쇼팽이 바르샤바로 이사를 가고 스카르벡 백작이 죽은 후 이 집은 농장의 마굿간으로 사용되는 등 점차 퇴락 하였으나, 19세기 말 쇼팽을 추앙하였던 한 러시아 음악가에 의하여 이 집이 복원, 수리 되어 박물관으로 변모하였으며, 9시부터 5시까지 개방되며 쇼팽의 사진과 악보, 그가 사용하던 악기와 가구 등을 전시하고 있다. 1953년부터는 관리를 쇼팽협회가 맡아서 하게 되었다. 이 때 국민들의 성금으로 넓은 부지를 추가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특히 세계 각국의 쇼팽 음악 애호가들이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식물들을 기증하여 현재 이 공원에는 약 1만 5천 종의 세계 각국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입구 쪽에 있는 쇼팽 상은 조각가 고스와프스키 J. Goslawski 가 지난 1969년에 세운 것이다.  

 

                                

 

- 생가 경내에 세운 쇼팽기념비(두상) -



   한편 1930년 폴란드를 떠난 쇼팽은 크라쿠프, 프라하, 비엔나, 뮌헨 등을 거쳐서 파리에 정착한 뒤 유명한 작가 조르쥬 상드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여인의 후원아래 쇼팽은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러나 천재는 요절이라고 하던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 쇼팽이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피아노-

 

 

  작곡가 쇼팽의 주요 작품 대부분이 피아노곡인데, 그의 개성적이며 참신한 기법은 서정성을 기조로 웅장함·기품·멜랑콜리 등 다채로운 성격을 겸비하여 <피아노의 시인>으로 칭송받는다.

  《피아노협주곡 제2번 F단조(1830)》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 E단조(1830)》《피아노소나타 제 2 번 B단조(장송, 1839)》 《환상곡(1841)》 《피아노소나타 제 3 번 B단조(1844)》 《환상폴로네즈(1846)》 《발라드 제 2번 (1839)》 《발라드 제 3 번(1841)》 《발라드 제 4 번(1842)》 등의 걸작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폐결핵을 앓던 쇼팽은 1948년 2월 혁명을 피하여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였는데 안개와 한기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다시 파리에 돌아와 궁핍과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름철에는 쇼팽을 기념하는 피아노 콘서트가 5월에서 9월까지 매주 일요일 11:00 - 13:30 이면 열린다.  



 

우아한 와지엔키 공원(Park Lazienkowski)

 

 

- 울창한 숲속 시민공원 내에 있는 쇼팽의 동상 -

 


  제라조바 볼라를 둘러본 뒤 찾아간 곳은 바르샤바 시민들이 즐겨찾는 고원으로 향했다. 이름하여 와지엔키(Park Lazienkowski) , 즉 시민공원이다.  시민공원 정문을 들어서니, 연못가에 쇼팽의 동상(Pomnik F. Chopin)이 우뚝 서있다. 피아노의 시인을 연상할 수 있도록 손가락은 굽이치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모습이었다.  수백년생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거대한 쇼팽 상은 조각가 바챠우 시마노프스키의 작품이다.

   동상을 정면으로 한 연못 주위에는 장미꽃을 심어 정감어린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그 둘레에 의자가 겹겹으로 놓여 있다. 해마다 5월에서 9월까지 동상 앞 연못에서는 매 일요일 정오와 오후 4시에 쇼팽 피아노 리사이틀과 명시 낭송이 행해진다.  쇼팽을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한 배려가 엿보인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봐야 하는 여행자들에겐 여유있게 정원을 걸으며 둘러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므로, 여기서 다시 나와 버스를 타고 궁전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와지엔키는 '욕탕'이란 의미로 건물 내에 훌륭한 욕탕이 여러 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공원은 18세기에 폴란드 최후의 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에 의해 30년 동안 만들어졌다.

   포니아토프스키 왕 사망 후 러시아에 매각되었다가 다시 폴란드로 소유권이 되돌아 왔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유물이 독일로 반출되었다. 또한 화재 등으로 인해 건물이 많이 손상되었었으나 전후 복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왕의 여름별궁 안에 있는 와지엔키 궁전 -

 


  이 공원의 이름은 와지엔키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의 유래는 이곳이 귀족들의 수렵장이었는데, 이 수렵장에 1690년 Lubomirski 장군이 첫 목욕탕을 지었고, 사람들은 이 지역을 수렵장 내의 목욕탕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 왕이 1772년 자신의 별궁을 짓고 나서도 이 궁전에 별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와지엔키 궁이라고 불렀던 까닭에 지금도 여전히 그 지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여황제 에카테리나 2세의 젊은 연인으로서 그녀의 후광으로 왕이 된 포니아토프스키는 정치적으로 무력하여 현실에서 도망치듯 공원의 조경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그는 폴란드 영토가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삼국에 의하여 분할되는 것을 막지 못하고, 1795년 에카테리나 2세로부터 폴란드 분할문서의 조인을 강요당한 후에, 퇴위하여 179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폴란드 국민들은 1918년 다시 독립을 할 때까지 123년 동안을 주권이 없는 식민지 생활을 해야만 했다.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열렬한 그림애호가로서 당시 이 궁에 소장되었던 회화와 조각품은 5천점이 넘었는데, 그가 페테르부르크로 갈 당시에 약 2천점을 가지고 갔고, 그 대부분의 작품이 현재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사후 망명지 페테르부르크에 묻혀 있다가, 그 후 200년 뒤인 1998년 고국으로 돌아와 왕실의 성당이었던 구시가의 세례요한 성당의 지하묘지에 묻혀있다.

   또 2차 대전 당시에 이 궁전에 소장되었던 많은 그림들을 독일로 유출하고, 1944년 불을 놓아 내부가 완전히 불타는 수난을 겪었으나 복구되어 지금은 국립박물관의 일부로 사용되고 있다.

 

 

- 궁전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의 조각상 -

 

 

  바르샤바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공원이다.  넓은 공원 안에는 많은 꽃들과 수목들이 우거져 있으며 작은 새들과 다람쥐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민들의 안식처로서 항상 많은 시민들이 평화롭게 산책하는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왕의 여름 별궁으로 세워진 와이엔키 궁전이 있고,  광장의 연못 기슭에는 쇼팽 동상이 세워져 있다. 여름철에는 매주 일요일 정오부터 쇼팽 콘서트가 개최된다.

 

웅장한 규모의 문화 과학 궁전(Patac Kulturv I Nauki) 

 

 

- 규모는 크나 폴란드인에게 외면 당하는 문화 과학 궁전 -

 

 

   마르샤우코프스카 거리와 예로졸림스키에 대로가 교차하는 데필라트 광장에 우뚝 서 있는 37층 높이의 건물로서 스탈린이 사회주의 형제국가 폴란드에 보낸 선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층건물이 그다지 많지 않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이 건물의 존재는 어디에서나 똑똑히 볼 수 있는 목표물이 된다.

    1952년 공사를 시작하여 1955년 공사를 마쳤으며, 탑 높이까지는 약 240미터이며, 고속 엘리베이터로 30층에 있는 전망대에 오르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러나 스탈린을 싫어하는 많은 폴란드 사람들은 이 건물을 지독히 싫어한다. 따라서 이 건물에 대해서 많은 농담이 유행하였는데, 어떤 이는“소련이 바르샤바에 세운 바르샤바의 무덤”이라고 하는가 하면, “바르샤바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이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농담도 있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 건물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간단한 이유에서다. 또 하나 더 소개한다면 바르샤바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곳이 바로 이 건물을 볼 수 없게 지어진 집이라는 농담도 있다.
 
    문화과학궁전의 총면적은 123,000 평방미터(약 37,000여평)로서 건물 내의 방의 수는 총 3,288실, 4개의 오벨리스크, 9개의 분수가 있으며 폴란드 과학아카데미를 비롯하여 폴란드 텔레비젼, 외국문화협회, 과학박물관, 극장, 영화관, 회의실, 콘서트홀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서방회사를 위한 사무실로도 임대하고 있다.
  
   문화과학궁전 내의 과학박물관에는 퀴리부인의 연구업적을 비롯하여 과학의 발달사를 전시하였고, 2차대전 전 이태리의 특허로 생산한 피아트자동차의 모형을 비롯하여 많은 전시물이 관객들을 맞고 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는 암호해독기를 폴란드인이 발명하여 연합군의 승리에 커다란 기여를 한 암호해독기도 볼 수가 있다. 궁전의 30층에는 전망대가 있고, 이곳에 오르면 바르샤바의 전 시가지를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보면 동쪽으로 쇼팽의 심장이 묻혀있는 성 십자가 성당을 비롯하여 바르샤바 대학과 Praga지역(비스와 강 동쪽지구) 을 볼 수가 있다. 북쪽으로는 유대인들을 집단으로 수용하였던 게토가 있었던 무라누프(Muranow) 지역, 서쪽에는 1970년에 준공된 Warszawa 중앙역이 있고, 그리고 남쪽으로 빌라누프 궁과 멀리서 바르샤바를 향해 흘러오는 폴란드의 젖줄 비스와 강의 유유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문화과학 궁전의 동쪽 정문 입구에는 폴란드의 자랑 코페르니쿠스와 퀴리부인의 상이 좌우로 나란히 앉아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궁전의 동쪽 건너편에는 바르, 샤바, 주니어, 세잠이라는 네개의 국영백화점이 각각 남성용품, 여성용품 어린이용품, 식료품전문의 기능을 가진 전형적인 사회주의 스타일의 국영백화점이었으나 최근에는 민영화되면서 과거의 명성에 걸맞은 화려한 백화점으로 탈바꿈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왕의 거주지였던 국립 박물관(Musium Narodowe)

 

 

  13세기에 지어진 고딕 양식의 성으로 16세기에 지그문트 아우구스트왕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596년 폴란드의 수도가 크라코프에서 바르샤바로 이전된 후, 이 성은 왕의 거주지로 이용되었다. 1599년에서 1619년, 1740년에서 1747년 두 번 재건되었고, 세계 대전 중에는 대통령의 거주지로 사용되었다. 
 
  세계 대전 중 폭격에 의한 화재로 피해가 매우 컸으며, 바르샤바에서 반란이 일어난 후인 1944년 독일인들이 건물 전체를 폭파하였다.  그러나 전쟁 후 이 성은 꾸준히 복구되어 1974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국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바르샤바 대학과 성 십자가 성당 주변

 

 

- 성 십자가 성당 모습 -

 

  빅토리아 광장에서 남쪽으로 뻗은 크라쿠프 교외(Krakowskie Przedmiescie)라는 특이한 이름의 거리는 시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긴 거리로서 무성한 숲 속에 옛 귀족들의 대 저택들이 산재해 있다. 바로 이 거리에는 바르샤바 대학, 코페리니쿠스 동상, 성 십자가 교회, 아담 미츠키에비츠  동상 등 많은 유적들이 있는데, 그 중 성 십자가 성당은 쇼팽의 심장이 묻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5번지에는 쇼팽이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다. 그러나 그가 고향 젤라조바 볼라에서 바르샤바로 이사를 온 후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현재 바르샤바대학 동양학부가 있던 건물이다. 이  곳에서 1917년에서 27년까지 살았고, 그 후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의 예술성을 기념하려는 때문인지 현재는 예술학교(Warsaw Fine Art School)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술학교 맞은편에는 폴란드 자성의 상징인 바르샤바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바르샤바 대학은 12개의 학부가 있는 폴란드 최대의 종합대학으로서 1818년에 개교하였다.  폴란드에서는 크라쿠프의 야기에오 대학 다음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대학이다. 금세기 폴란드출신 유명한 인물들이 대부분 이곳 출신이라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학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한국어학과가 있는 동양학부는 도서관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대학의 한국어학과는 오랫동안 중국학과와 일본학과에 속해 있었으나 최근에 독립하였다. 이 학과의 학과장은 한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오가렉 최 교수이고 학생 수는 약 40여명이다.

 

 

- 쇼팽의 심장이 묻힌 기둥(교회 안 왼쪽) -



   거리의 3번지에 있는 성 십자가 교회는 20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한 프레데릭 쇼팽의 심장이 묻혀 있다. 그가 파리에서 죽자 많은 폴란드 인들이 그의 유해를 폴란드로 돌려오기를 희망하였으나 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의 여동생이 파리를 방문하여 심장만을 가지고 돌아와 이 교회에 안치하였다고 한다.

   심장이 안치된 장소는 본당 중앙 왼쪽 돌기둥 아래에 있으며, 이 기둥에는 그 사실을 알리는 비명과 함께 언제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둥에 부착된 청동 프레트에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심장 또한 그곳에 있을 것이다"(마태복음 6-21)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고, 노벨상 작가인 S. 레이몬드 S. Reymont 의 기념비문도 부기 되어 있다. 

  이 교회는 1756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폰타나 부자가 100년에 걸쳐 완성한 건물로 조각가 벨론스키 J. P. Welonski 가 제작한 "십자가를 진 그리스토" 조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이다.

  성당은 1655년 스웨덴의 공격으로 파괴된 것을 1679-96년 재건축 하였으며, 정면의 쌍둥이 탑은 1760년에 완성되었다. 거리의 소박함에 비해 금과 은을 사용하여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이루는데, 주일 11시의 미사는 전국에 생중계 방송된다.


바르샤바의 고풍스런 구시가지(Strare Miasto)

 

 

- 바르샤바의 상징 구시가 광장 -



  구시가지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으로, 포드웨일 거리의 오른쪽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도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15세기의 외관으로 복구되었다.

   90 x 73m의 광장은 1817년까지 시청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바르샤바에서 가장 중요한 광장으로서 축제의 장으로 장터로 때론 사형장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모든 건물들은 1600년대 각기 부(富)를 자랑하던 주인들의 개성에 따라 특징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구시가지 광장과 비스와 강 서안에 있는 강변도로(Wisła strada)와 탐카(Tamka)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한 손에 칼을 들고 한 손에 방패를 든 인어상(Pomnik Syreny)이 서있다. 

  이 인어상은 바르샤바시의 상징으로서 14세기에 처음 세워진 후 바르샤바 시(市) 소유의 모든 물건에 이 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인어에 관한 전설을 다음과 같이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전해져 내려온다.

 

 

 

- 구시가 광장 중앙의 인어상 -

 

 

   옛날 비스와 강의 양안은 갈대숲이 깊게 우거져서 사람들은 살지 않고 단지 물고기들만 노닐었다고 한다. 가끔씩 이곳을 찾았던 사람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어부들뿐이었다. 

   이 어부들 중에 바르(War)라고 하는 젊은 어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전날 쳐놓았던 그물을 걷으러 갔던 바르는 물고기 대신 어여쁜 인어가 자신의 그물에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사바(Sawa)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름다운 인어에 반한 바르는 그를 사랑하고 되었고 결국 이들은 결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결혼을 하여 강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들의 자식들이 오늘날 바르샤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고, 이들이 살았던 마을을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바르샤바라고 불렀던 것이 오늘날 바르샤바라는 지명을 얻게 된 유래라고 한다. 이 인어의 이름은 샤바라고 하는데 시레나(syrena)라는 말은 "인어"라는 뜻의 폴란드어 명사이다.
    
   현재의 인어상은 1939년에 만들었는데, 모델이었던 Krystyna Krabelska는 23세의 대학생으로 저항군으로 참전 1944년 8월 2일 바르샤바 항쟁 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전쟁 시 폴란드의 모든 기념비들을 파괴되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인어상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고 기초석에만 35개의 총알 자국이 있다고 한다.  구시가지 광장에는 꽃집, 레스토랑, 술집, 카페와 관광객을 상대로 선물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다.

 

바르바칸 성벽 (Barbakan)

 

- 말발굽 모양으로 된 성벽 -



  구시가와 신시가의 사이에 말발굽 모양으로 된 성벽을 바르바칸이라고 부른다. 1656년에 축조된 벽돌의 성벽으로서 유럽에는 이런 형태의 성이 단 세 군데밖에는 없다고 한다. 물론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이 파괴되었으나 1956년 복원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무명의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가지고 나와서 전시, 판매하고 있다.


퀴리부인의 생가와 박물관 (Muzeum Marii Curie Składowska)



   바르바칸으로 경계가 된 구시가를 지나 성문을 나서면 곧 신시가지가 이어지고 거리의 이름이 프레타가(Freta 街)이다. 이 거리의 16번지가 유명한 퀴리부인이 출생한 생가이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단장되어 그의 업적을 기리는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거리에 면한 현관의 오른쪽에는 박물관과 폴란드 화학협회임을 알리는 동판이 있다. 2층에는 자그마한 방에 퀴리부인의 유품과 연구에 사용되었던 각종 실험기구 가족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퀴리 부인 생가에서의 필자 -


 

   마리아 스크와도프스카는 결혼 전 폴란드이름이다. 1867년 11월 7일 중학교교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884-1891년 대학 예과의 조교로 일을 하며 바르샤바대학을 졸업하고 파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1893년 물리학, 1894년 수학의 학위를 받고, 1895년 스승이자 동료였던 피에르 퀴리박사와 결혼을 하였다. 

   1898년 남편과 함께 우라늄에서 라듐을 분리하는데 성공하고, 또 폴로니움을 발견하게 되어 1903년 남편과 Henri Becquerel과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였고, 다시 금속 라듐을 분리하여 1911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1912년에는 라듐학회를 창설하여 제 1차 대전 중에는 라듐요법에 의한 구호활동을 조직하는 등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는 여성이었으며, 항상 조국을 잊지 않고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1932년에 폴란드의 라듐학회를 창설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녀의 그런 공헌을 기억하는 폴란드 화학협회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그녀의 생가를 사들여 퀴리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그녀는 1934년 7월 4일 방사능 오염으로 인한 병으로 사망하였다.  개관시간 : 화 - 토요일 10:00 - 16:30,  일요일 10:00 - 14:30,  월요일 및 경축일은 휴관

 

 

 - 꽃집과 레스토랑으로 붐비는 광장(폴란드인들은 꽃을 좋아한다)  

  

   바르샤바에서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밖에 없어서 가보고 싶은 곳을 다 보지 못했다. 2차 대전 중 끝끝내 독일에 항복을 하지 않고 조국 폴란드의 자유를 위하여 싸운 병사와 시민들에게 바쳐진, 코니에츠니(M.Konieczny)의 작품 '니케(Nike)의 동상'도 보지 못한 채 설명으로 대신했다. 머리카락을 날리는 아가씨가 서쪽의 독일을 향하여 칼을 높이 쳐들고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 정식 명칭은 영웅기념비.

   이날 저녁식사는 자유매식이었다. 호텔을 나와 음식점을 찾아간다는 것이 겨우 음식을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맥도날드점이었다. 미국의 기업이 이곳까지 세력을 확충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노천 식탁에 앉으니, 환한 조명으로 밝힌 문화과학 궁전이 눈에 들어왔다. 바르샤바 주민들이 싫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 자태가 어둠 속에 눈부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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