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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학교 관계

여성 교육의 산실, 숭의(崇義)의 빛나는 발자취

by 혜강(惠江) 2024. 11. 3.

 

숭의역사관 · 숭의인물관 탐방

 

여성 교육의 산실, 숭의의 빛나는 발자취를 살펴보다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거하며 자진 폐교

해방 후 남산의 일제 경성 신사 터에 학교 재건

 

 

▲남산 캠퍼스(현재 숭의여자대학교와 숭의초등학교가 사용)

 

  숭의역사관은 남산 숭의여자대학교 1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와는 별개로 숭의인물관은 숭의여자대학교 내 마펫기념강당 (음악당) 지하에 마련되어 있다. 

  2013년 개관한 숭의역사관에서는 개교 이래 현재까지 121년에 걸친 역사를 기록물과 모니터를 통해 당시의 교육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또, 2015년 개관한 숭의인물관에는 최초 설립자 마펫 선교사, 재건설립자 박현숙, 그 외 숭의가 낳은 역사적인 인물들, 특히 김옥길 총장이 기증한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리고, 숭의여자전문대학 학장을 지낸 화가 홍종명과 관계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숭의여자대학교 1층 숭의역사관(위), 마펫기념강당 지하 1층의 숭의인물관

▲숭의인물관 벽면 자료를 살펴보는 윤순희 전 이사장

 

숭의의 역사

 

   숭의역사관과 숭의인물관에 전시된 사진을 바탕으로 120년 역사를 이어온 숭의의 역사를 정리해 보았다. 

 

(1) 평양 시대

 

    여성 교육의 요람인 숭의(崇義)는 개화기인 1903년, 미국 선교사 사무엘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에 의해 평양에 설립되었다.

  그후 숭의여학교는 기독교 정신 아래 ‘하나님의 의(義)를 높인다.’라는 창립 정신을 바탕으로 여성 교육의 불모지에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관서 지방 최고의 명문 학교였다.

  "의를 높이는 학교, 의를 높이며 숭상하는 학교,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실력있는 인재를 키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 숭의라는 이름에 담긴 숭고한 뜻이었기에, 숭의여학교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런 이유로 지방에서 숭의여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몰려드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숭의에는 학교 이름 그대로 신앙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사람들이 넘쳤다.

 

▲최초 설립자 마펫 선교사의 관련자료

▲평양에 세운 숭의여학교 교사

▲숭의여학교 최초 입학생들

▲192년 숭의여학교 입학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

▲1939년 마펫 목사 한국선교 40주년 기념식에서 숭의여학교 학생들이 기념가를 불렀다.

 

숭의의 항일 투쟁의 역사

 

 개교한 지 얼마 안 된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내렸다. 애국애족 정신이 강한 사립학교를 통제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러나 뜻있는 교사와 학생들은 1913년 기숙사에서, 일제의 지배에 맞서기 위하여 비밀리에 <송죽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아끼던 댕기머리를 자르고 수공예품을 만들어 장만한 돈을 독립운동 단체에 군자금으로 보내고, 순회전도대와 결백회를 조직히여 전국 각처를 다니며 애국 계몽활동을 병행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이 일로 교사와 학생일부가 체포되어 투옥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1929년 전남 광주에서 타오른 불길이 전국에 퍼지면서 숭의여학교를 비롯한 평양 아홉개 학교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이로하여 숭의여학교를 비롯한 아홉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많은 학생들이 퇴학과 무기징역을 당했다. 

 

▲숭의여학교의 항일 투쟁단체인 <송죽결사대>와 권기옥 (한국 최초 여성비행사)

 

일제에 항거 자진 폐교

 

   1930년 3월, 일제는 제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조선어말살정책을 비롯하여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 숭의는 이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2대 설립자이자 교장 대행이었던 선우리 선생을 직위해제하였다. 

  일제의 부당한 요구에 끝까지 맞서 항거하던 숭의는 일제에 굴복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겠다는 심정으로 1937년 11월 1일 숭의여학교 폐교원을 제출했다.

  1938년 3월 11일, 평양 상수구리 숭의강당에서 마지막 졸업식이 열린 날, 눈물의 고별사와 함께 수료증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 시대의 어둠 앞에서 믿음을 지키고자 흘리는 눈물이었다. 이로써 평양의 숭의는 막을 내렸다.

 

▲일제에 항거하여 자진 폐교

 

평양 시대, 숭의가 낳은 여성 선각자들

  당시 숭의는 무임소장관을 지낸 박현숙,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인 권기옥 등은 숭의가 배출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들이다. 

  또한, 애국의 횃불이었던 김경희, 항일투쟁의 선봉이었던 구순화 · 한선부, YWCA 운동의 선구자 이효덕, 최초의 여류 성악가 윤심덕, 최초의 여성 문교부 장관 김옥길, 여류문학의 샛별 소설가 강경애, 한국의 헬렌 켈러 양정신 목사 등 각계각층에 걸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당시 여성 선각자였던 숭의여학교 동문들

 

(2) 서울 남산 시대

 

서울 경성자리에 재건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이 땅에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라가 반으로 갈리면서 평양에서의 재건은 물거품이 되었고, 남쪽으로 피난한 평양 숭의 동문들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도 숭의의 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절치부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심에는 탁월한 지도자 박현숙 여사가 있었다.

  결국, 1950년 4월 12일 박현숙 여사의 주도로 서울 충무로에 있었던 송죽원이란 임시교사에서 '숭의'라는 간판을 내걸고 감격스럽게 부활했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학교는 어엿한 학교 모습을 갖춰 2개월 후 6월 15일 숭의여자중학 재건 개교기념식이 열렸다. 숭의 재건의 출발점이었다.

  숭의인들은 피난살이의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재건을 향한 집념을 놓지 않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53년 4월 23일 정식으로 재단법인 숭의학원 설립인가를 받고, 이어 1953년 5월 8일 숭의여자중학교와 숭의여자고등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후 일제의 정신적 심장부였던 남산 기슭의 경성신사 터로 이주해 신사 건물을 철거하고 학교다운 건물을 새롭게 짓고 입주하면서, 숭의여중·고등학교가 다시 반석 위에 세워지고 남산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일제에 의해 폐교에 이르게 된 학교가 해방 후 일제의 정신적 심장부인 남산의 신사 터에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었다며 숭의인들은 환호했다. 이후 박현숙의 후배인 이신덕은 박현숙을 보좌하여 숭의 재건의 실무를 맡아 숭의의 터전을 넓혀갔다. 

  서울 숭의 재건한 주역이었던 박현숙은 평양 숭의여학교 제6회 졸업생이자 평양 숭의의 교사로서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 창단에 앞장 섰고, 송죽의 기개로 끝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른 항일독립운동가였다.  해방후 무임소장관, 민의원(현 국회의원)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한국 여성 정치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추서)을 받았다.

  그리고 숭의 재건의 밀알 역할을 한 이신덕은 숭의여학교를 졸업, 숭의 보육과 학생으로 면려회장을 맡아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혀 해방에 이르기까지 제약과 불이익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박현숙을 보좌하여 6.25의 혼란 속에서 송죽원 임시교사에서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고, 숭의 재건의 실무를 맡아 천막교사에서 출발해 어엿한 건물을 준공할 때까지 열정을 쏟아, 재건 숭의여중·고 교장, 숭의보육전문대학장을 역임했다.       

 

▲서울에서 재건 1회 졸업( 가운데 치마저고리를 입은 분이 박현숙(위), 이신덕(아래)

 

숭의의 발전

 

  이후 숭의는 1966년 숭의국민학교, 1971년 숭의여자전문학교, 1974년 전문학교 부설 유치원의 교육기관이 신설되면서 남산의 숭의학원은 규모를 넓혀나갔다. 이런 무리한 확장 과정을 거치며 숭의는 한때 경영란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평양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흔들림 없이 믿음의 학교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배운 학생 중에는 배구의 조혜정, 빙상의 김영희, 농구의 박찬숙과 같은 특출한 선수를 배출한 스포츠 명가로 이름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법조계의 이은경, 이선애 등을 배출하였으며, 예술계의 정영숙, 박원숙, 예수정, 김미숙, 이휘향, 전인화 등이 화려하게 한 시대를 이끌었고, 월드비전의 한비야 등 동문의 사회적 활동도 활발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체제를 갖춘 숭의학원은 대도시로의 인구 집중으로 인한 학급 증설 등으로 규모가 커지고 좁은 공간에 체육관, 도서관, 음악당 등의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교육공간이 과밀화되어 교육의 효율성이라는 문제가 야기되었다. 따라서 교육공간의 과밀화 해소는 숭의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3) 백성학 이사장 취임, 새로운 도약

- 남산과 대방동 시대를 열다

 

  새천년을 앞둔 1999년, 한경직 목사의 간청에 따라 학교법인 숭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백성학 전 이사장은 숭의학원 창립 100주년을 맞으면서 미래에 대한 안목과 탁월한 경영 능력, 과감한 추진력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무엇보다 먼저 착수한 것은 교육공간의 과밀화 해소라는 문제에 주력했다.

   이에 백 이사장은 1900년대 몰아닥친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중·고등학교를 도심에서 빼어내고, 남산 캠퍼스는 대학과 초등학교가 넉넉하게 사용토록 하자는 구상 아래 동작구 대방동에 중·고등학교 부지를 마련해 2003년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신축 이전했다.

  나아가 남산 외교구락부를 매입하여 대학교 강의실을 더욱 확충하였다. 남산 외교구락부는 해방 후 반세기(1949년 1999년) 동안 한국 현대 정치·외교·문화계의 사교클럽이며, 막후 사랑방 역할을 한 곳이어서 의미가 더욱 컸다.

  이로써 현재 숭의 남산캠퍼스에는 넓고 쾌적하며 현대화된 교육 시설 속에서 숭의여자대학교(부속유치원 포함)와 숭의초등학교 학생들이 꿈과 끼와 재능을 키워가고 있다.

  한편, 대방동에 둥지를 튼 숭의여자중∙고등학교는 직원들의 헌신적인 교육 활동으로 지역에서 학부모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심학교로 자리 잡아 명문 학교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와 함께 내실있는 학교 경영 및 시대에 맞는 교육혁신에 박차를 가하여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이어갔다. 

 

▲백성학, 윤순희 이사장의 취임

 

(4) 재 도약의 출발에 서다.

- 백정수 이사장 취임

 

  현재 학교법인 숭의학원은 한때 불안정했던 법인과 달리, 1999년 이래 안정된 재정 여건 속에서 평양 숭의여학교의 건학정신을 굳건히 하며, 숭의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윤순희 이사장으로부터 이사장직을 이어받은 현 백정수 이사장은 새로운 안목과 젊은 패기로 학령인구 급감과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 속에서 쇄신과 혁신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학원창립 120주년을 맞아 간행한 사진첩 <숭의 120년>은 지난 120년의 역사를 돌아보며, 새롭게 도약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현 백정수 숭의학원 이사장이 학원창립 120주년기념식 기념사에서 새로운 도약을 피력하고 있다. 

▲창립120주년 기념 사진첩 <숭의 120년> 발행 축시

 

  그렇다고 숭의학원의 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20년을 넘게 흘러온 도도한 역사를 가꿔온 숭의학원은 본래의 고향인 북녘땅 평양으로 이어가야 할 과제가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숭의가 지닌 숙명적인 과제인 것이다.

 

작성 ㅣ 남상학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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