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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및 교회, 학교/- 학교 관계

자유·정의·진리의 전당, 고려대학교

by 혜강(惠江) 2022. 6. 13.

 

자유·정의·진리의 전당, 고려대학교

 

- 본관 주변 및 박물관 둘러보기 -

 

 

글·사진 남상학

 

 

 

▲고려대학교 서울인문·사회계 캠퍼스 전경(출처 : 나무위키)

 

 

  자유·정의·진리의 전당인 고려대학교는 연세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사학의 쌍벽을 이루는 사립대학이다.  모처럼 찾아간  모교 고려대학교의 정문 앞과 제기동은 학교 주변의 가장 주요한 상권으로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옛날 모습 그대로였으나 안암로터리는 안암병원의 개원과 더불어 개운사길의 복개가 이루어지고, 지하철 6호선 안암역 개통을 계기로 오히려 번화가로 변해 있었다.

 

 

우람한 석조 정문

 

  웅장한 돌기둥으로 우뚝 선 정문이 나를 맞았다. 나의 학창시절의 교문과는 사뭇 달랐다. 교우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던 당시의 정문은 1995년 현재와 같은 보다 더 큰 교문으로 세워지면서 기존의 교문은 세종캠퍼스로 이전됐다고 한다.

 

 

▲정문 및 본관 주변의 인문·사회계 지역 약도

 

중앙광장

 

  제일 크게 달라진 것은 중앙광장이다. 이전의 대운동장은 자취를 감추고 멀리 본관을 사이에 두고 넓은 중앙광장이 자리 잡은 것이다. 중앙광장은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2000년 6월에 착공하여 2002년 3월에 완공됐다.

 

  중앙광장 지상에는 5,780평의 녹지공간과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지하 1층에는 행정부서와 열람실 및 편의시설이 있고, 지하 2층과 3층에는 1,00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공간이 조성돼 있다.

 

  중앙의 건물 배치는 중앙광장-본관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광장 오른편에는 중앙도서관 구관이, 왼편에는 서관이 자리 잡고 있는 형태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중앙광장의 지상과 지하 액서서리 판매점

 

 

본관

 

  캠퍼스의 중앙에 자리 잡은 본관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선생이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했을 때 지어진 건물이다. 1934년 9월에 완공됐다. 6층 높이의 고딕 양식 석조건물이다.

 

  본관 건물은 ‘배울 학’(學) 자를, 건물 앞의 정원은 ‘큰 대(大)’ 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5호로 지정됐다.

 

  본관 앞에는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이, 양옆으로 오른편에는 고대의 기개를 표현한 호상(虎像)이, 왼편에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4·18을 기념하는 4·18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성수 선생 동상

 

  인촌 김성수 선생은 고려대학교의 실질적인 설립자였다. 고려대학교의 뿌리는 대한제국 광무 9년인 1905년 이용익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로 출발하였다. 그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용익이 망명하여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재정난으로 폐교 직전에 이르자 1932년 인촌 김성수 선생의 중앙학원이 학교를 인수하여 ‘민족 고대’로 되살아나 1934년에는 안암동에 현재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고려대학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한때 친일 논란으로 시끄러울 때도 있었으나, 학생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을 터전을 만들어 외세를 물리치는 지식인으로 성장한 것이니 최소한 그가 세운 학교에서만큼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말을 인용한다. “지금도 나는 인촌을 존경한다. 도산 안창호와 고당 조만식과 더불어 많은 가르침을 준 고마운 분이다. 그는 애국심과 지혜로움을 갖춘 인물이었다. 일각에선 친일파라고 비난하지만, 옳지 않다. 인촌만큼 민족과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한 분도 흔치 않다.” - 2020.12.29.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11)」

 

  김성수 선생 동상 및 기념물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 동상 이외에도 서울대공원, 전북 고창 생가, 중앙중고등학교 본관 앞 등에 자리하고 있다.

 

 

 

4·18 기념비

 

  고려대학교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60년 4·19 혁명의 촉매제가 된 4·18 의거를 비롯한 각종 시위의 중심에 섰던 학교였다. ‘자유·정의·진리’(Libertas, Justitia, Veritas)를 교훈으로 삼고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1960년 4월 18일, 3·15 부정선거와 독재정권을 규탄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10시 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민주 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행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이들 투쟁의 이유는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에 잘 나타나 있다.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나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종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발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 투쟁의 전위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하겠다. 고대 학생 동지 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구호

 1.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1.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1. 우리는 행동성이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1.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1.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4·18 기념비의 비문은 조지훈이 지은 것이다.

 

  自由(자유)! 너 永遠(영원)한 活火山(활화산)이여!

  邪惡(사악)과 不義(불의)에 抗拒(항거)하여

  壓制(압제)의 사슬을 끊고

  憤怒(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아! 1960年 4月 18日

  天地(천지)를 뒤흔든 正義(정의)의 喊聲(함성)을 새겨

  그날의 噴火口(분화구) 여기에 돌을 세운다.

 

  매년 4월 18일에 4·18 의거로 기록되는 독재정권에 맞선 선배들의 정의로운 행동을 계승하기 위해 ‘4·18 구국대장정’ 행사가 열린다.

 

 

 

고려대학교의 상징, 호상(虎像)

 

  고려대학교의 상징 동물은 호랑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그 자체를 상징하는 말로도 쓰이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엠블럼에도 들어간 동물이다.

 

  호랑이는 잘 발달하고 균형 잡힌 신체 구조와 느리게 움직이다가도 목표물을 향할 때의 빠른 몸놀림 그리고 빼어난 지혜와 늠름한 기품을 지녔다. 이 때문인지 고려대학교의 교풍은 야성적이고 활기찬 모습이 대표적이다. 학교 마크 역시 정열적인 크림슨(진홍색)에 호랑이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호상의 바닥에는 조지훈의 ‘호상비문’(虎像碑文)이 새겨져 있다. 호상비문은 응원가 ‘민족의 아리아’의 가사로 인용되었다.

 

  民族(민족)의 힘으로 民族(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

  民族(민족)의 보람찬 大學(대학)이 있어

  너 恒常(항상) 여기에 自由(자유)의 불을 밝히고

  正義(정의)의 길을 달리고 眞理(진리)의 샘을 지키느니

  地軸(지축)을 박차고 咆哮(포효)하거라

  너 불타는 野望(야망) 젊은 意慾(의욕)의 象徵(상징)아

  宇宙(우주)를 향한 너의 부르짖음이

  民族(민족)의 소리되어 메아리치는 곳에

  너의 氣槪(기개) 너의 志操(지조) 너의 叡智(예지)는

  祖國(조국)의 永遠(영원)한 鼓動(고동)이 되리라”

 

      —조지훈, 虎像碑文(호상비문) 전문

 

 

 

 

중앙도서관 구관과 서관

 

  1937년에 개관한 중앙도서관 구관은 김성수 선생이 도서관 건물의 건립을 포함한 기념사업의 자금 조달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직접 모금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사적 제286호로 지정돼 있다.

 

  중앙광장의 서편의 서관은 1961년에 준공됐으며 문과대학이 사요아고 있다. 이 건물의 꼭대기의 4면으로 된 시계탑은 1968년 당시 쌍용그룹 회장이었던 김성곤이 희사한 것이다.

 

 

▲구 도서관(위)와 서관(아래)

 

 

고려대학교 부속 박물관

 

  정문을 들어서서 바로 우측 건물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1962년 연면적 851평 규모의 3층 건물을 준공해 처음으로 독립된 박물관 시설을 갖추었고 1973년에는 대학박물관 최초로 한국현대미술실을 개설하였다. 현재 박물관은 백주년기념관으로 지어진 건물로 2005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3,000평 규모의 박물관 전시실은 백년사전시실, 역사민속전시실, 고미술전시실, 현대미술전시실, 기증자기념전시실 등 총 5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 50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특히 백년사전시실에는 고려대학교 100년의 역사를 담은 각종 전시물과 교기, 응원복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고려대학교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알 수 있수록 했다.

 

 

 

고려대학교 교표, 교가(校歌)

 

 교가는 1955년에 개교 50주년을 맞아 제정된 것으로, 작사는 조지훈, 작곡은 윤이상이 맡았다.

 

  1. 북악산 기슭에 우뚝 솟은 집을 보라

      안암의 언덕에 피어나는 빛을 보라

     겨레의 보람이요 정성이 뭉쳐

     드높이 쌓아올린 공든 탑

     자유, 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2. 자유를 위하여 물결치는 가슴이여

    정의를 위하여 굳게 잡은 신념이여

    불타는 정성이라 그뜻을 받아

    아득히 우러르는 큰 이상

    자유, 정의, 진리의 한 빛이 있다!

 

3. 그윽한 수풀은 우리 꿈의 요람이요

    저 넓은 벌판은 우리 힘의 소망이라

    드는 이 나가는 이 돌려서 지켜

    힘차게 이어가는 이 정신

    자유, 정의, 진리의 큰 길이 있다!

 

    후렴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마음의 고향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영원히 빛난다.

 

 

▲고려대학교로서의 새출발

 

▲역대 이사장 및 총장

 

▲고대의 큰 어른

 

▲발전하는 고대

 

▲학생활동  

 

응원곡 및 교호

 

  고려대학교 응원단에서는 매년 고연전 오티를 기해 응원곡 신곡을 발표하고 있다. 응원 문화가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띄게 된 것은 1968년 응원단이 조직된 이후의 일이다. 응원곡들을 보면, 최초의 응원곡으로 뱃노래(1974년)를 비롯하여 엘리제(1981), 석탑(1982, 반정부 정서 내포), 민족의 아리아(2003), ‘들어라 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2007)와 ‘Forever’, ‘캉캉’ 또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최근에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동작들이 가미된 응원곡들 또한 등장하고 있다.

 

  교호는 1922년 구 교가(이광수 작사, 김영환 작곡)와 같은 시기, 즉 보성전문학교 시절에 제정된 것이다. 그래서 후렴구가 보전(Pojun, 보성전문)으로 표기돼 있던 것을 고려대학으로 고쳤다.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고려대학교 교호는 입실렌티(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체이홉(안톤 체호프? 동명이인 체호프?), 카시코시 코시코(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그리스 카시코시우스?), 칼마시(카를 마르크스)까지 모두 네 사람이 계시는(케시케시) 의미이다.

 

  이들은 출생 연대는 서로 다르지만 사회 저항비판 의식이 강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교호를 만든 사람은 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케시 코시코에게 순서에 관계없이 ‘자유’, ‘정의’, ‘진리’라는 교훈(校訓)을 부여해 고대생에게 사회 저항의식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고연전

 

  고연전은 애교심을 고양하고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양교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포츠 경기를 비롯한 강연, 온라인 게임, 사회공헌활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연세대학교와 승부를 겨루는 행사 일체를 의미한다.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옥스브릿지(Ox-Bridge)전’과 일본의 와세다 대학과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소케이센’(早慶戦) 등과 유사한 형태이다.

 

  축구, 럭비,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5개 종목으로 열리는 오늘날과 같은 규모의 고연전 기틀이 마련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는 5·16 군사 정변등의 이유로 정기전이 열리지 않았다. 1965년부터는 이틀 동안 다섯 경기가 일제히 치러지는 지금과 같은 경기방식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점차 고연전 때 붉은색 티셔츠를 입기 시작하였다.

 

  강산의 빼난 정기 온 누리에 떨쳐라

  고대 건아 가는 곳에 대적할 자 누구냐

  천지를 흔들어라

  젊은 피 솟구치는 날래고 용감한 이 기세를 보아라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

  승전고를 울려라 꽃다발을 받아라

  영광을 모교에 그 훈공은 너희 것이다.

 

      -  응원가(조지훈 작사, 이흥렬 작곡)

 

 

 

고려대학교 교우회

 

  고려대학교 출신 교우들의 모임인 고려대학교 교우회는 1907년 1월 대한민국 최초의 대학 동문회인 ‘보전 친목회’로 창립됐다. 초대회장은 조성구(趙聲九)가 맡았으며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와 더불어 특별한 유대와 결속을 자랑하는 3대 모임의 하나로 일컬어질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상당히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고 있다.

 

 

 

  백년사전시실을 둘러보고 나서 역사민속전시실, 고미술전시실, 현대미술전시실, 기증자기념전시실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박물관 소장품 규모는 고고, 역사, 민속, 서화, 도자, 현대미술에 걸쳐 총 10만 25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현행 1만 원 권 지폐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존 유일의 조선 시대 천문시계인 혼천(渾天) 시계와 현존 최고의 청화백자인 흥녕부대부인묘지(興寧府大夫人墓誌) 등을 들 수 있다. 국보와 보물을 각기 3점씩 소장하고 있으며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유진오 제헌 헌법 초고)와 제2호(안재홍 미군정 자료) 역시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3층에는 인촌 김성수실이다. 인촌 김성수 선생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 산업진흥에 의한 민족자본의 육성, 언론 활동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를 인수 운영했고,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했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했다. 해방 후에는 송진우와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했으며, 1951년에는 제2대 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인촌 기념 전시실

 

▲인촌기념관

 

 

  시간에 쫒겨 인촌 기념 전시실을 본 뒤 인촌기념관을 마지막으로 탐방을 마쳤다. 짧은 시간에 극히 일부만 둘러보았지만, 성북구에 있는 서울캠퍼스에는 17개 단과대학이,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에 있는 분교인 세종캠퍼스는 5개 단과대학이 설치돼 있다. 놀라울 만큼 성장 발전을 거듭했다. 그리고 ‘민족 고대’로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조지훈 시비

 

 

  그 결과, 고려대학교는 2018년 QS 세계대학 순위 평가에서 국내 사립대학 가운데 가장 높은 순위인 86위를 기록했다. 발전하는 모교 고려대학교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고대캠퍼스 배치도

 

 

▲지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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