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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춘천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유적지)

by 혜강(惠江) 2024. 9. 27.

 

춘천 장절공 신숭겸 장군 묘역 (유적지)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한 고려의 1등 개국공신

 

글·사진 남상학

 

 

▲신장절공 묘역 및 유적지, 묘는 보이지 않으나 우측 언덕 위에 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는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묘역 및 유적지가 있다. 유적지는 신장절공묘역(申壯節公 墓域) 이라는 명칭으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고려시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묘역은 한국 4대 명당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있으며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신숭겸 유적지

 

  유적지에 들어서면 먼저 입구에서 신숭겸 장군의 동상이 맞이한다. 연못인 비룡지를 지나면 홍살문이다. 홍살문을 통과하여 충렬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신숭겸 장군의 위폐를 모신 사당인 장절사가 있고, 우측으로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팔공산 전투 과정과 신숭겸의 활약상 등을 자세히 담고 있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에 각각 지정되어 있다.

 

▲사진, 위로부터 신숭겸 장군 동상, 비룡지(연못), 홍살문

▲사진, 위로부터 충렬문, 사당인 장절사, 신도비
  

  그리고 좌측에 별도 공간으로 광인문을 들어서면 상춘재, 전사청, 이화당이 들어서 있다. 이 공간은 사당이 있는 곳과는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이 모두를 둘러보고 충렬문 담을 끼고 우측으로 접어들면 소나무가 우거진 묘역으로 연결된다.

 

▲사진, 위로부터  광인문, 상춘재, 전사청, 이화당

 

  묘가 들어선 자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꼽힌다. 묘역은 나무를 베어내어 앞이 탁 터진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장절사, 신도비가 있는 돌김길 옆으로 소나무 숲길이 묘역으로 가는 길이다.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묘역에는 세 개의 봉분이 있는데, 태조 왕건은 황금으로 신숭겸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면서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3개의 봉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소나무가 둘러싼 묘역에 서면, 춘천 시내까지 시원스레 내다보인다.

 

▲묘역에는 세 개의 봉분이 있는데, 태조 왕건은 황금으로 신숭겸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면서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3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진, 신숭겸 장군 묘, 묘비의 앞면과 뒷면

 

  이곳 유적지는 깔끔하게 관리가 잘 되어 있고, 역사공부도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한적하고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걸으며 산책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 좋은 곳이다.

 

▪신숭겸 장군은 어떤 사람인가?

 

▲장절공 신숭겸 장군 동상

 

  본관은 평산. 초명은 능산(申能山).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 열전에는 광해주(光海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이 뛰어나 궁예 말년 (918년) 태봉의 기장(騎將)이 되어 홍유·배현경·복지겸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일찍이 숭겸이 태조를 따라 삼탄(三灘)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혔다. 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평산(平山)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 관계는 견훤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팔공산) 동수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927년(태조 10) 견훤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신숭겸 장군은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출정했다. 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신숭겸은 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되어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고, 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갔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는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두상)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지묘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서 없어졌지만,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다.

 

▪춘천 이외의 충절공 신숭겸의 유적지

 

  조선 선조 때 대구 동구에 표충사와 표충단, 충렬비, 모영재를 표충재와 동재 서재가 있고, 또, 전라남도 곡성의 용산단, 덕양서원, 장군단, 충남 서천의 율리사, 경남 사천의 경백사 등이 있다.

 

◎기본정보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서면 신숭겸로 272-21 / 전화 : 033-243-2076

운영 : 09:00~18:00, 쉬는 날 없음 

기타 : 무료, 주차시설 있음, 문화관광해설사 근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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