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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여행기 및 정보/- 서해

교동도, 실향민의 애환이 짙게 밴 섬

by 혜강(惠江) 2024. 2. 8.

 

교동도

 

실향민의 애환이 짙게 밴 섬, 교동도

 

글·사진 남상학

 

 

 

  교동도는 강화군 북서쪽에 있는 섬이다.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교동도는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었다. 북한이 바로 보이는 최전방 접경지역이어서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쪽에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육지의 군사분계선(MDL)은 철조망으로 나뉘어 있지만, 이곳 중립 수역에는 바다 위로 보이지 않는 철책이 흐른다. 지금도 교동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은 교동대교 입구의 해병대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받은 후에야 다리를 건널 수 있고, 야간(오후 8~오전 6)에는 통행할 수 없다.

 

해안선 37.5km 중 25.5km가 철책선

 

  교동도는 우리나라에서 열두 번째로 큰 섬이다. 북쪽으로 북한의 황해도 연안군, 배천군과 마주하고 있어 북한 땅을 육안으로 조망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면적은 47.17㎢, 해안선 둘레는 37,5km이지만, 1997년부터 25.5㎞가 철책으로 통제되고 있다.

  교동도 사람들은 황해도 연백군과의 거리가 불과 5㎞밖에 안 되기 때문에 밭작물과 참외, 면화 등을 연백에서 팔아 부족한 식량과 생필품을 구입하고, 연백평야에 ‘품’을 팔러 다닐 정도로 그들의 생활 반경은 강화도가 아닌 황해도 연백으로 뻗어 있었다.

  한국전쟁 중 황해도 지역에 폭격이 심해지자 연백군 주민들은 잠시 머물 요량으로 교동도로 피란했다. 그 때문에 그 수가 교동도 원주민보다 두 배가량 많은 2만 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정전협정 후 서부 휴전선이 38선보다 남쪽에 설정되면서 피란민들은 졸지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교동도에 터를 잡은 실향민들은 70년 동안 그들이 익혀온 연백평야의 근대적 농사기술로 교동도의 바다와 갯벌을 피땀 흘려 억척스럽게 개간하여 대량의 쌀을 생산해 냈다. 그리고, 고향의 연백 시장을 닮은 대룡시장을 만들어 경제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향이 그리울 때는 자신들이 세운 망향대를 찾거나 화개산에 올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날려 보내기도 하였다.

 

 

교동제비집 (웰컴센터)

 

  교동도에 들어왔다면 먼저 교동제비집에 들러보자. 교동도 대룡시장 부근에 있다. 제비집이란 이름은 실향민들의 고향 황해도와 교동도를 자유롭게 오가는 수많은 제비들을 상징해 지은 것이다.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교동제비집은 교동도에 대한 여행 정보도 얻고 여러 체험도 할 수 있는 관광안내소다. 이곳에서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 콘텐츠를 제공한다.

  교동제비집은 입구부터 교동도의 마스코트인 제비가 오는 이들을 맞이한다. IT를 기반으로 한 관광 안내 콘텐츠가 있는 이곳은 교동도 관광 명소 VR(가상현실) 체험, 교동신문 제작 체험이 가능하다. 자전거대여소와 카페, 기념품판매장 등을 함께 운영하며, ,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실향민의 향수와 정서가 깃든 현장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룡시장

 

  교동도에 하나밖에 없는 대룡시장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향에 있는 연백시장의 모습을 재현한 골목시장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소읍보다도 작지만, 골목 곳곳에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벽화와 조형물, 오래된 간판의 모습들이 시골 풍경 그대로다.

  400여m 짧은 골목에 있을 건 다 있다. 이발관과 미장원, 사진관과 전파사, 분식집과 통닭집, 시계점과 잡화점, 옷가게와 신발가게, 떡집과 분식집, 약방 등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길게 늘어서 있다. 외관은 물론 내부 모습도 1960~1970년대 시골 풍경 그대로여서 실향민의 고단한 삶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교동도에서는 유독 집마다 처마 밑에 제비집이 많다. 이러한 제비를 두고 실향민들은 그리운 고향에서 찾아온 반갑고 귀한 손님이라고 부른다. '평화와 통일'을 테마로 만든 교동제비집에서는 공연, 교육, 회의, 전시 활동 등을 위한 공간을 제공한다. 또, 야외무대와 갤러리도 있다. 이들의 활동에는 통일에 대한 염원과 고단한 실향민의 삶이 스며 있다.

  교동이발관은 KBS 예능프로그램 ‘1박 2일’에서 은지원의 삭발 장면을 촬영했던 곳이다. 반듯하게 손으로 적은 철제 간판과 의자와 거울, 이발 기구들 모두가 예스럽게 보인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들러 이발도 하고, 교동스튜디오에 들러 옛날 교복을 입고 흑백사진도 찍어 본다. 그리고 출출하면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떡집 좌판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가래떡을 사 먹기도 한다. 옛 향수를 느껴보기 위해서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대룡시장 탐방은 실향민의 삶의 체취를 공유하며, 옛 추억을 남겨보는 즐거움이 있다.

 

 

고향이 그리워 세운 망향대

 

  대룡시장에서 조금 벗어나 북서쪽 지석리 방향으로 논길을 한참 달리면 내비가 끝나는 지점에 ‘찻길 없음’이라 쓰인 마당이 나온다. 그곳에 주차하고 조금만 올라가면 망향대가 있다. 교동도에서 눈에 잡힐 듯 바라다보이는 고향 땅, 지척에 두고 온 부모형제가 그리울 때면 달려가는 곳이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은 1988년 고향 연백군이 눈앞에 잡힐 듯이 보이는 이곳에 망향대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망배비와 망배제단, 그리고 북한 연안 땅을 볼 수 있는 망원경 2개가 설치되어 있다. 망향대에서 북한 연안 땅까지는 불과 3km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낮 시간대에 자유롭게 맨손어업도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 섬을 통한 월북 사건이 발생하면서 섬 전체에 걸쳐 해안 철책이 설치됐다. 철조망 너머에 자유롭게 날고 있는 바닷새가 부러울 따름이다.

  “바라보고도 못 가는 고향일세 / 한강이 임진강과 예성강은 만나 / 바다로 흘러드는데 /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도 못하구나.”

  교동도의 1세대 실향민 고 이범옥(체칠리아) 할머니가 지은 시 <격강천리라더니> 중의 한 대목이다. 이 시에는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있다.

 

 

 

►화개산, 북한 땅이 한눈에…

 

  북녘땅을 자세히 보기 위해 섬에서 가장 높은 화개산을 오르면 된다. 섬 동쪽에 있는 화개산은 해발 259m밖에 안 되지만, 전망대에 올라서면 휴전선 너머 연백평야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까지 보인다.

  화개산 전망대로 올라가려면 모노레일을 타거나 화개정원을 통해 걸어가야 한다. 축구장 20개에 달하는 화개정원은 5색 테마정원과 스카이워크형 전망대, 모노레일, 대형 주차장이 조성되어 교동도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20분 만에 정상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다.

  고려 말 문신 이색은 화개산을 전국 8대 명산 중 하나로 꼽았다. 최근에는 화개산을 개간해 화개정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상에 세운 스카이워크형의 전망대는 강화에 사는 저어새의 긴 부리를 본떠 만들었다. 2층 스카이워크에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북한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면 어른들이 논밭을 갈고,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만, 그 모습이 왠지 낯설어 보인다. 자유가 보장된 국가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인지 연안의 모습은 회색의 쓸쓸한 느낌이다.

  지구촌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 한반도는 언제쯤 하나가 돼 살아갈 수 있을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갈 수 없는 실향민의 심정이야 오죽하랴!

 

 

교동에 남은 역사적 자취

 

  교동도는 지리적으로 외국을 드나드는 관문이었고, 전략상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교동은 문물이 들어오는 초입에 일찍이 향교를 건립하였고, 전략적 이점을 고려하여 삼도수군통어사를 두어 지휘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양에 가까운 외딴 섬이어서 왕족의 유배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최고(最古)의 역사를 지닌 ‘교동향교’

 

  교동향교는 화개산 남쪽 기슭에 있다. 고려 인종 5년(1127년)에 창건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고려의 문신이었던 안향(安珦, 1243~1306)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한다.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귀해 세운 지방 교육기관으로, 교동향교의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 동무 · 서무 · 명륜당 · 제기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五聖) · 송조 2(宋朝二賢) 및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 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 교동읍성

  

  강화도는 고려부터 조선조까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인조는 즉위 1년 경기 남양만 경기수영을 강화도로 옮기고, 인조 7년(1629년) 군사 전략적 가치가 큰 섬 교동도로 다시 옮겼다. 이때 교동도에 성곽을 쌓고, 현을 도호부로 격상시킨 뒤 4년 뒤 경기수군절도사를 삼도수군통어사로 승격시켰다. 주 임무는 한강, 임진강 수운과 서해안 방어였다.

  교동읍성은 강화도 서편 교동도에 돌로 쌓은 성이다. 이 읍성을 처음 쌓은 것은 조선 인조 7년(1629)으로 교동에 경기수영(京畿水營)을 설치할 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은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원래 3개의 문이 있었는데 동문을 통삼루, 남문을 유량루, 북문을 공북루라 불렀다.

  하지만 동문과 북문은 없어지고 1921년 폭풍우로 무너진 남문인 홍예문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문 위에 문루를 올려 제 모습을 되찾았다. 성곽은 남문 주변과 뒤쪽으로 몇 m씩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연산군유배지

 

  또한, 인근에는 교동으로 유배됐다가 병사한 ‘연산군 적거지’가 있다. 교동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하였다. 강화와 교동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1000여 년 동안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사용됐다. 이처럼 강화와 교동이 왕과 왕족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조선 10대 연산군은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이곳에 유배 와서 같은 해 11월 6일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2달가량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던 곳이다. 이렇듯 교동도가 유배지로 이용된 것은 서울과 가까운 섬이어서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조선 태종(1418년) 때 황룡이 출현했다고 전해 내려오는 투명 덮개가 덮인 황룡우물도 만날 수 있다.

 

 

교동도의 젖줄,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

 

  기름진 논을 자랑하는 교동도에는 두 개의 커다란 저수지가 있다. 난정저수지와 고구저수지다. 섬이지만 간척사업으로 드넓은 평야가 생겨났고 그 때문에 농사를 짓기엔 물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만든 저수지가 이 두 곳이다.

  그런데 저수지가 유명해진 것은 바로 꽃 때문이다. 여름이면 난정저수지에는 노란 해바라기가, 고구저수지에는 분홍 연꽃이 무수히 피어오른다. 지역주민들이 마을정원으로 꾸민 것인데 널찍한 저수지를 배경으로 수채화처럼 맑은 풍경을 자아낸다. 겨울에는 이들 저수지 모두 얼음놀이터로 변신한다.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어른들은 얼음낚시의 손맛을 즐긴다.

 

►해바라기 화원, 난정저수지

 

  교동도 서쪽에 자리 잡은 난정저수지는 10만 송이 해바라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33부지에 조성된 난정리 해바라기 마을 정원은 이곳 난정리 주민이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공유수면에 해바라기밭을 조성하였다. 여름에는 노란 해바라기꽃이 드넓게 펼쳐져 멋진 해바라기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특히 노을 시간에 방문하면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다. 꼭 꽃피는 철이 아니더라도 해바라기와 연잎이 뒤덮힌 고즈넉한 저수지의 풍경은 안식과 평화를 선물한다.

 

 

►연꽃 화원, 고구저수지

 

  난정저수지와는 달리 교동도 동북쪽에 자리한 고구저수지는 세월을 낚는 낙시터로 유명하지만, 오히려 저수지 한쪽에 펼쳐진 연꽃 단지로 유명하다. 여름 한 철 드넓게 펼쳐진 연꽃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특히, 연꽃단지에 800㎡ 규모의 관찰 데크를 설치하여 데크를 걸으며 수변과 산 전경을 감상할 수 있고, 정자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평화나들길(자전거길)

 

  분단의 아픔을 실감해 보려면 평화나들길을 달려보는 것도 좋다. 평화나들길은 제비집에서 시작하는 자전거 투어이다. 해안가의 철책선을 따라 조성된 회주길(30km), 넓고 푸르른 평야에 조선된 마중길 중에서 선택하면 된다.

  자전거길을 달리다 보면 실향민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세운 망향대, 바다 건너 북한이 바로 보이는 난정리 전망대, 잔잔하고 평화로운 호수가 보이는 고구리 쉼터, 바다와 교동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해안 정자 등 전망 쉼터에 잠시 들러 쉬어갈 수 있다.

  그동안 교동도는 북측과 마주하고 있으나 완충지대인 한강 하구를 사이에 두고 있어 무기도입이나 군사적 충돌을 할 수 없는 곳이라 비교적 평화의 섬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연속적인 도발로 인해 남북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다.

  그러나 교동도는 긴장과 평화가 공존하는 섬이다. 드넓은 평야, 저수지에 활짝 피어나는 해바라기와 연꽃들은 평화스러웠다. 이제 실향민 1세대가 살아갈 날도 멀지 않다. 하루속히 한반도에 드리운 전쟁의 기운을 걷어내고. 단계적으로라도 3통(통행·통신·통상)을 실현할 수 있다면, 그들의 아픔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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