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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귀환 이후 활동_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요엘, 말라기

by 혜강(惠江) 2023. 2. 27.

 

스토리 성경 (31)

 

포로귀환 이후 활동

_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요엘, 말라기

 

 

B.C 539년,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무너지자, B.C 538년 페르시아는 고레스왕의 포로귀환 칙령에 의거,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그들의 전통적 종교를 허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몇 년간 유대인들은 남 왕국 지역으로 귀환했고, 그들은 철저한 율법의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하게 된 것이 이방 국가가 강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한 율법 교육 부재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그들은 죽임을 당하지 않는 한 교육받은 것은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 교육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사활을 걷게 되었다.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교육의 힘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에는 땅, 율법, 성전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과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는 학개와 스가랴였다.

 

학개, 스가랴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 재건을 마치도록 격려했다. 학개는 곧 다리오 왕 2년 (B.C 520년) 약 4개월간 사역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은 B.C 536년이었는데, 건축 진행이 지리멸렬하자, 학개는 유다 백성을 독려하여, 이스라엘인이 겪은 재앙의 원인이 성전 봉사의 태만에 있다고 역설, 온갖 방해와 부정적인 편견을 극복하고 성전 재건 사역을 끝내게 했던 열정적이며 책임감 있는 여호와의 사자였다.

스가랴는 학개의 사역 마지막 무렵에 함께 일했다. 그도 역시 성전 재건이 여러 가지 방해로 중단되면서 백성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깨우치려 성전 재건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를 제시하여 백성들을 격려했다.

그는 또,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충성할 때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생활이 다시 부흥됨은 물론 이 회개한 민족을 통하여 메시아가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당시,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할 선지자 출현 소식은 당시 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었다.

 

에스더

에스더는 스룹바벨이 주도한 1차 포로 귀환(B.C.537년경)과 학사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 귀환(B.C.458년경) 사이에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수산에서 발생한 유다 백성의 구원 사건에 등장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베냐민 사람 아비하일의 딸로서 용모가 출중했다. 그녀는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도 본토(유다)로 돌아가지 않고, 페르시아에 머물렀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사촌 모르드개의 양녀가 되어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인 수산에 살다가, 왕후 와스디 대신에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녀의 사촌 모르드개는 왕궁의 낮은 관리로 있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같은 자의식으로 인해 페르시아의 재상이 된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하만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며, 결국 하만의 계략으로 유다인 전체가 멸망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에스더는 유다인 전체와 함께 3일간의 금식을 통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동족을 구하기 위해 왕 앞에 나아갔다. 그 결과 상황은 반전되어 유다 백성은 오히려 보호를 받고 하만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유태 부림일(Purim)의 기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민족을 멸절 위기 가운데서 극적으로 구원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고,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셨다.

 

에스라, 느헤미야

제사장 에스라는 바벨론 제2차 포로귀환 때, 곧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1세 재위 7년경에 신앙 개혁을 위해 유다 땅으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는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 율법 교육에 힘을 쏟기로 하고, 백성에게 율법을 낭독하며, 유대교의 기초를 닦으며 민족을 지도하였다.

그는 또, 유월절 및 초막절을 준수하고,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에 대한 정결 작업을 감행하여 회복된 유다 땅 안에서 철저히 거룩함과 경건히 유지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구약 성경의 에스라서와 역대상·하를 취집하고, 회당을 창설하는 등의 일을 주도하였다.

느헤미야는 3차 포로귀환 시기에 들어와 활동했다. B.C 445년에 고국의 황폐를 전해 듣고 페르시아 왕의 허가를 받아 유다 지방의 총독(總督)으로서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그는 모세 율법에 능한 서기관(학사)이요 제사장으로서 느헤미야의 협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城壁)을 재건하고, 가난한 자의 삶을 개선하려 노력했다. 부채 면제 등으로 경제적 불평을 해소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신전 봉납 물의 규정과 안식일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등 도덕 및 의식 개혁을 감행하여 유대인들이 여호와에게 다시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 중심의 나라 재창조를 위해 이방혼(異邦婚)을 막으려 애썼다. 이러한 노력은 이스라엘 땅에서 남 유다 공동체를 다른 백성과 분리했다.

 

요엘, 말라기

요엘에 관해서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의 활동은 메뚜기떼로 인한 재난과 회개의 촉구, 하나님의 동정과 약속, 거룩한 영의 부으심, 열국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 등으로 되어 있다.

요엘은 메뚜기떼로 인하여 극심한 재난이 일어나자 이것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아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 배타주의도 드러나 있는데, 요엘은 그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에게 신실한 자들만이 구원받음을 강조하였다.

말라기는 스가랴 선지자보다 거의 1세기 뒤(B.C 430년경)에 활동하였다.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의 가르침 대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1세기가 지나도록 메시아 왕국은 도래하지 않고, 어떤 영광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데 염증을 느끼며 신앙생활에 태만하던 때였다. 신앙은 다시 형식주의로 흐르고 영적 순결은 점점 오염되어 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부르셔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말라기 4:2)이라는 말씀을 주셨다. 그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과 맺었던 선민으로서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장차 도래할 영화로운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이자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가교 구실을 했다. 성서학자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B.C 430년경) 이후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까지의 약 400년 동안을 '침묵의 시대'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건으로 들끓었으며, 절대 침묵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에는 영감받은 선지자가 나오지 않았고, 구약이 완결된 것으로 간주하기는 했지만,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도래를 준비하는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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