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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제주도

제주 4·3평화공원과 4·3평화기념관

by 혜강(惠江) 2022. 11. 27.

 

제주 4·3평화공원과 기념관

 

제주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기억하는 공간

 

 

글·사진 남상학

 

 

 

  제주 4·3 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은 제주시 봉개동 ‘거친오름’(해발 618.5m) 기슭에 있는 공원으로, 4·3 사건 희생자의 넋을 위령하고,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평화와 인권을 위해서 조성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전말

 

  제주 4·3 사건이란 1947부터 1954년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에서 벌어진 남로당과 토벌대의 무력충돌 및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우파 세력의 갈등이 매우 심했다.

  1947년 3월 1일 기념일 시위에서 벌어진 좌우 세력 간의 우발적 충돌이 확대된 후,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한 남로당과 시위대의 진압과정 및 한국전쟁 이후의 토벌 작전을 통해 3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이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으로 꼽힌다.

 

 

 

  이 사건은 종결 이후 군사정권 동안 '북한의 사주에 의한 제주도폭등 사건'으로 사건이 일어난 지 50여 년이 넘도록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 후 1990년대에야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 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뤄졌다.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2000년 여·야 합의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특별법에 따라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여 구성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2003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중대한 인권 유린과 잘못이 있었음을 지적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정부가 사과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민과 피해자들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으로 사과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며 화해와 상생을 도모하고, 평화·인권 교육의 장을 마련하여 역사적 교훈을 물려주기 위해 평화공원과 평화기념관을 만들어 2008년 3월 23일 개관하였다.

 

 

 

제주4·3평화공원

 

  제주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기념공원이다.

  제주4·3평화공원 조성은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다. 이곳에는 위령탑, 위령제단, 위패봉안실, 추념광장, 봉안관, 각명비원, 행방불명인 표석 등의 시설이 있다.

  위령제단은 연중 4·3희생자에 대한 참배를 진행하는 경건한 공간이며, 위패봉안실은 희생자 14,533명 중 14,412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공간(생존희생자 121명)이며, 추념광장은 매년 4·3희생자추념식이 봉행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봉안관은 4·3유해발굴사업에 의해 발굴된 405기의 유해중 379기의 4·3희생자 유해가 봉안하고 있으며, 각명비원은 희생자의 성명, 성별, 당시 연령 등을 기록한 명판이며, 행방불명인 표석은 시신을 찾을 수 없는 희생자 표석 3,976기 설치되어 있다.

 

 

 

 

제주4·3평화기념관

 

  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3층 연면적 1만1천455㎡ 규모로, 한라산과 산방산에 얽힌 제주의 '설문대할망' 설화를 바탕으로 4·3을 담는 그릇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부는 기념·추모의 공간,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엄정한 공간, 역사교육 및 교훈의 공간, 제주의 향토성을 바탕으로 한 한국 현대사의 전문 역사관, 과거사 청산 및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복합공간 등으로 구성됐다.

  지하 1층에는 4·3영상 상영, 세미나, 마당극 등의 장소로 활용되는 대강당과 4·3 유물 및 전시자료의 보존관리를 위한 수장고, 상설 전시실 등을 갖췄다.

  또 지하 1층에는 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4·3원인, 전개, 결과, 후유증, 진상규명 과정이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프롤로그를 포함한 6개의 상설 전시관 공간과 다랑쉬굴, 해원의 폭낭의 특별전시관으로 구성되고 있다.

  지상 1층에는 4·3 관련 문화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눈높이에서 4·3사건을 이해하도록 하는 어린이체험실 등이 꾸며졌고, 지상 2층은 4·3 아카이브와 열람실, 교육실 등이 있다.

  지상 3층은 학예연구실과 세미나실로 활용된다. 동판을 산화시켜 푸른빛이 도는 4·3 평화기념관의 외곽 한편에는 독일 베를린시가 지난해 기증한 평화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 (높이 3.4m, 너비 1.2m 크기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 2개가 설치돼 눈길을 끈다.

 

 

 

전시관 둘러보기

 

1관 '역사의 동굴'(프롤로그)

 

  1관은 1945년 해방 이후 현재까지 완성되지 않은 4·3의 역사를 프롤로그 형태로 보여준다. 제주4·3의 전 기간을 통하여 화산섬 제주도의 중산간 지대에 산재한 천연동굴들은 주민들에게는 천혜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

  동굴을 모티브로 한 전시관으로 통하는 긴 터널은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첫 관문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터널을 지나면 원형의 천창 아래 누워있는 ‘백비(비문 없는 비석)’를 만나게 된다. 4·3은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

 

 

 

2관 '흔들리는 섬'(해방과 좌절)

 

  2관은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발포 사건-탄압’의 순서로 일제(日帝)로부터의 해방과 자치, 미군정 실시에 뒤이은 제주시 관덕정, 3·1 발포사건 등이 소개한다.

  해방 이후 제주도민은 자치를 시행해 나가지만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3관 '바람타는 섬’(무장봉기와 분단 거부)

 

  3관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 무장봉기의 발생 과정과 배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남과 북에 2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굳어져가는 분단과정을 보여준다.

  향후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5·10단선·단정반대사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연출되었다. 이 공간에는 오름을 상징하는 중앙부와 오름 위의 상황을 묘사한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4관 '불타는 섬(초토화와 학살)

 

  4관에서는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 재소자 학살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4·3사건 희생자의 80% 이상은 이때 희생된다.

  원통형의 하얀 방, 벽에는 죽음의 다양한 형상들이 하얀 붕대로 둘러싸인 부조물로 표현되어 제주도는 죽음의 섬으로 변하는 모습을 각각 보여준다.

 

 

 

 

5관 '흐르는 섬’(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복구와 정착 그리고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나누어 4·3의 상처와 아픔, 그 회복과정을 보여준다. 진상규명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는 오랜 기간 도민의 투쟁에 의해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이 공간에는 4·3 진상규명을 위한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6관 '새로운 시작'(에필로그)

 

  6관에서는 제주사람들은 4·3의 역사적 상처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풀어가고 있다. 이곳은 4·3의 아픈 기억을 통하여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맨 끝의 출구 통로에는 4·3희생자들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 공간은 희생자를 기리는 한편 어두운 터널에서 다시 광영천지로 빠져나오는 재생의 공간이기도 하다.

  특히 1992년 4.3사건 당시에 희생된 주민 유해 11구가 발견된 제주시 구좌읍의 '다랑쉬굴'을 그대로 재현한 특별전시공간이 마련됐고, 실외의 움푹 패인 공간에 커다란 정자목 팽나무 '해원의 폭낭'이 조성돼 있다. 이 공간은 이런 마을의 공동체적 만남과 해원의 신목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로 4.3의 역사를 되새겨 보며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사색하게 한다.

  제주4·3평화공원과 기념관은 4·3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평화·인권의 의미와 통일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평화와 통일의 성지이자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는 4·3평화공원을 나오면서 허영선 시인의 「무명천 할머니」라는 시를 떠올렸다.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꽃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무명천 할머니'의 본명은 진아영이다. 그는 1914년생으로 4.3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49년 1월 35세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영문도 모른 채 총을 맞아 턱이 없어진 할머니는 무명천을 늘 턱에 두르고 있어 ‘무명천할머니’로 불렸다.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자 언니가 월령리로 데려와 살게 되었다. 턱을 잃은 할머니는 한평생 후유장애인으로 치료비를 벌기 위해 선인장 열매를 따거나 톳을 따다가 품팔이를 하며 살아갔다. 턱과 이가 없어 씹지를 못하니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는 늘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났다. 

 늦게나마 가해자들의 진정어린 사과와 피해자들의 용서를 통해 화해와 상생이 되는 역사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발길을 돌렸다. 

 

◎상세정보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430(봉개동 237-2) / 전화 : 064-723-4344 / 이용 : 09:00~17:30 / 휴무 : 첫째,셋째 월요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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