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자작자작 걷는 자작나무 숲에 와서
글·사진 남상학
다시 자작나무 숲길을 걷는다. 11월 초순이지만, 자작나무는 양지쪽 나무에만 노란 잎을 달고 있을 뿐, 거의 잎을 떨어버리고 알몸으로 서 있다. 본래 북반부 추운 지방에서 사는 자작나무가 우리 땅에까지 와서 살다가 일찌감치 옷을 벗었다.
시인 백석(1912~1995)은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백화(白樺)〉라는 시를 썼다. ‘백화’는 자작나무의 한자어이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이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시에서처럼 자작나무는 따뜻한 남쪽 나라를 마다하고 삭풍이 몰아치는 한대지방에 터를 잡고 다른 나무들을 제치고 숲을 이루어 자기들 세상을 만든다. 영화나 사진에서 보아 왔듯이, 시베리아 벌판의 눈밭 속에 처연하게 서 있는 하얀 나무들 말이다.
북반구의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자작나무는 북한이 자작나무가 자랄 수 있는 한계선이다. 따라서 남한에서는 자연 상태로 자라는 자작나무 숲이 없다. 인제의 자작나무 숲은 1989~1996에 걸쳐 70만 주를 심어 만든 인공 조림 숲이다.
3년 전, 이 숲에 왔다가 매료되어 언젠가 다시 오리리 다짐하면서, 그동안 나는 정호승 시인의 <그리운 자작나무>를 자주 떠올렸고, 오늘 다시 보고 싶었던 자작나무 아름다운 숲을 찾아왔다.
자작자작
너의 이름을 부르면
자작자작 살얼음판 위를 걷듯 걸어온
내 눈물의 발소리가 들린다
자작자작
너의 이름을 부르면
자박자박 하얀 눈길을 걸어와
한없이 내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온
너의 외로움의 발소리도 들린다
자작나무
인간의 가장 높은 품위와
겸손의 자세를 가르치는
내 올곧고 그리운 스승의 나무
자작자작
오늘도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살아온 눈물의 신비 앞에
고요히 옷깃을 여민다.
이 시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으로 2016, 계간 『시인동네』 여름호에 실린 작품이다. 자작나무는 본래 자작나무 하얀 껍질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탄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시는 그 ‘자작자작’ 타는 소리를 그리운 임이 자작나무 숲길을 ‘자박자박’ 걸어오는 소리로 대치시키면서, 고결한 자태로 푸른 하늘을 우러르는 자작나무의 기품을 인격화하여 겸손하고 올곧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경건하게 표현한 것이다.
굳이 눈 내린 순백의 세상이 아니더라도, 잎을 떨군 채로 20~30년생 자작나무 41만 그루가 밀집하여 20~30m까지 하늘로 치솟은 자작나무 숲은 외국의 한 마을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색적이다. 더구나 은빛 자작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면 아름다움에 더욱 매료된다.
잎을 떨군 자작나무는 미끈하게 서서 하얗게 허물을 벗는다.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새하얀 껍질 하나로 버틴다. 종이처럼 얇은 껍질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한마디로 고상하고 단아하고 깔끔하다.
나는 숲으로 깊숙이 들어서며, 어디선가 자작나무 숲속을 걸어오는 ‘그리운 임’을 만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하얀 외로움으로 푸른 하늘을 향해 손짓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 사이, 어느덧 내가 한 그루 우람한 자작나무가 된 듯하다.
자작나무 숲에 그늘이 내리는 시간 하산했다. 겨울 낮이 짧아 길게 머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마치 그리운 이를 두고 가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 자작나무 숲을 쳐다본다.
·주소 :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산 75-22 / 전화 : 033-461-9696
·운영 : 하절기 (5.1~10.31) - 매일 09:00~18:00 / 동절기 (11. 1~3. 1) - 수~일 09:00~17:00(월, 화 휴무)
·주변 맛집 : 산채이야기 (산채비빔밥, 막국수, 감자전) -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769-2, 주차장 옆 / 010-8804-058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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