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도시’ 로마
역사의 실험실을 만나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로마의 길거리는 늘 혼잡하다. 관광 성수기인 봄부터 가을까지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한겨울에도 많은 사람이 몰려든다. 최근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사시사철 넘쳐난다. ‘영원한 도시’ 로마에 아직 남아 있는 제국의 향기를 맡으려는 이들이 부산한 발걸음을 옮긴다.
▲티베르강 전경.
서로마제국이 수명을 다한 것은 476년, 지금으로부터 1540여 년 전이다. 전설 속 로물루스 형제가 티베르 강가에 나라를 세운 지 1000년 만에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황제의 이름 또한 로물루스였다.
옥빛을 머금은 티베르 강가에 서서 나는 잠시 로마의 흥망성쇠를 되짚어 봤다. 로마제국이 망한 뒤로 제국의 역사보다도 훨씬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옛 제국의 자취가 아직도 선명하다. 유형의 로마는 거의 대부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웅장했던 신전과 로마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도, 장관을 뽐내던 목욕탕과 분수대 등도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다. 찬란한 영광 뒤에 남은 것은 해골처럼 나뒹구는 쓸쓸한 석조의 잔해뿐이다.
물론 형체가 온전하게 보전된 것들도 있다. 시선을 압도하는 콜로세움과 판테온의 위엄, 높다란 수로교와 웅장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카피톨로니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에서 만난 여러 신상(神像)과 로마황제, 정치가와 학자들의 흉상들도 떠오른다. 로마인들이 광대한 제국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건설한 도로망도 자취가 엄연하다. 그 시절의 도로는 유럽의 주요 도시를 잇는 간선도로의 모체다.
로마제국이 후세에 물려준 무형의 유산은 더욱 생명력이 강하다. 그들이 차용한 표음문자(로마자)는 서구 각국의 공식 문자가 돼 날마다 사용된다. 로마제국의 달력도 살아 있다. 가령 2월을 뜻하는 페브러리(February)는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의미인데 로마인들이 정한 명칭이다. 겨울철에 해당하는 1월과 2월에는 본래 아무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한번 이름을 붙이자 후세가 그대로 따라서 쓰고 있다.
에스프레소에도 투영된 로마제국
▲에스프레소
또 로마제국의 법률 체계는 후세의 표준이 됐다. 근대유럽의 시민국가들이 로마법의 토대 위에 각종 법률을 정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공화제(Republic)와 상원(Senate)과 같은 정치제도 역시 로마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적으로도 로마의 전통은 명맥이 살아 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됨으로써 세계인의 종교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지금도 전 세계 가톨릭교회는 바티칸(로마)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다.
오랫동안 유럽에 살던 나는 2016년 로마를 다시 방문했다. 2월의 로마는 평균기온이 섭씨 12도, 최저기온은 2도쯤 된다. 서울에 비하면 10도나 높다. 그런데도 아침저녁으로 로마의 공기는 추위가 느껴질 만큼 쌀쌀했다. 차가워진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커피 한 잔의 온기를 빌리러 카페로 종종걸음을 놓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로마는 천국과 같다. 이른 오후면 판테온 부근의 카페 타차도로(Tazza d’oro)에서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셨다. 진한 그 향기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코끝을 맴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참으로 에스프레소를 사랑한다. 아침이면 그들은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처진 눈꺼풀을 끌어올리고, 오후 3시쯤이면 또 한 잔의 에스프레소로 졸음을 몰아낸다. “심장에 ‘쿵’하는 자극을 주지 않는 에스프레소는 커피도 아니다”라며 열을 올리던 어느 시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에스프레소에는 로마인다움이 오롯이 담겨 있다. 증기압을 이용해 기계로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이 유별나다. 이 기계는 19세기 후반 처음 등장했다. 최초로 특허를 출원한 이도 당연히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밀라노 출신의 루이기 베제라(Luigi Bezzera)가 그 주인공이다. 이후 여러 명의 이탈리아노(이탈리아 사람)가 이 시장에 뛰어들어 기계를 개선했다. 커피 맛도 한결 좋아졌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커피가 생산되지 않는다. 커피는 이슬람제국에서 애용하던 음료였다. 그러다가 지중해 교역을 통해 이탈리아로 유입됐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생산지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상품으로서 가치만 있다면 스펀지처럼 마구 흡수했다. 로마제국 때부터 늘 그랬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라는 속담은 로마제국에서 탄생한 말이다. 로마인들은 변화와 실용을 좋아했다. 그들은 타민족의 기술과 특산품 등 장점을 수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실질을 숭상했기에, 법률만 해도 정복지의 사정에 맞췄다. 그들은 현지 지배세력에 의한 위임통치를 하면서도 전쟁을 통해 획득한 광대한 영토의 모든 주민을 별 저항 없이 로마시민으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한마디로 로마제국은 실용의 나라였다. 게다가 그들은 미각을 몹시 중시해, 귀족층은 오후 서너 시만 되면 자리를 깔고 누워 하염없이 긴 만찬을 벌였다. 그 후예들이 에스프레소 기계를 창안해 세계인의 음료를 개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로마에서 나는 여러 명의 에스프레소 장인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비법이 있다며 명랑한 목소리로 자랑을 늘어놓았다. 오늘날 세계인이 즐겨 마시는 아메리카노 역시 에스프레소의 한 가지 변형이다. 에스프레소를 더운 물로 적당히 희석한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이런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했대서 명칭이 그렇게 정해졌다.
중세의 종말 알린 이탈리아
▲움베르토 에코. [위키피디아]
르네상스를 통해서 중세의 종말을 알린 것도 이탈리아였다. 특히 로마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아낌없이 후원하며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 등 도시국가들과 경쟁했다. 다름 아닌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이 이탈리아의 부호 및 귀족들과 앞다퉈 중세의 종말을 재촉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에코는 무솔리니가 집권함으로써 이탈리아는 현대사의 비극을 예고했다고도 말했다. 이 독재자는 본디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권력을 거머쥐기 위해 급작스럽게 우경화했다. 이로써 유럽 역사상 최초로 파시즘 정권이 탄생했다. 로마의 파시스트들은 독일 및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손을 맞잡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사자만 해도 4700만 명이 나왔다.
유례없는 참극 끝에 파시스트들은 몰락했다. 구질서의 중심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의 위상도 허물어졌다. 무솔리니의 등장이 결국에는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낳은 산파 구실을 한 셈이다.
무솔리니에게 끝까지 저항한 한 사람의 사상가가 있었다. 옥중에서 사망한 안토니오 그람시였다. 그는 ‘옥중수기’를 통해 현대 사상계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그람시는 대중과 깊이 연계된 유기적 지식인(organic intellectual)의 역할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들이 진지전(war of position)을 일으켜 대중의 세계관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그는 주장했다.
나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도시 외곽에 있는 그람시의 무덤을 찾아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말없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그 앞에 내려놓으며, 그와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이탈리아의 또 다른 천재 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위해 나는 빌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들은 여럿이되 하나로 조합됐다.
그들 3인이 이탈리아가 아득한 옛날 로물루스의 신화에서부터 반복해온 ‘형제 살해’의 비극을 청산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이야말로 이탈리아가 진정한 의미에서 재통일되기를 소망했다. 그리하여 거듭난 이탈리아가 다른 어느 사회보다 정의롭고 평등하며 형제애로 넘치기를 꿈꿨던 것이다.
새로운 이탈리아는 가능할까
▲ 이탈리아 오성운동 창시자 베페 그릴로. [뉴시스]
아무리 생각해도 이탈리아의 역사는 특별하다. 르네상스와 파시즘의 출현도 그러했지만 말썽 많은 또 다른 정치가 베룰루스코니(전 총리)의 일도 예삿일은 아니다. 그는 대중매체를 여럿 거느린 재벌이었다. 그의 정치 스타일은 추악한 선동정치에 금권정치가 결합한 새로운 형태였다. 추잡한 염문도 그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도널드 트럼프인 셈이다.
2019년 현재, 로마에서는 새로운 정치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 에코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직접민주주의와 생태주의를 지향하는 ‘오성운동(Movimento 5 Stelle)’이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들은 놀랍게도 극우파인 리그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그들은 시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고자 한다. 유럽연합의 통제에서 벗어나 중요한 모든 사안을 이탈리아인 스스로 결정하게끔 힘쓰고 있다. 분명히 새로운 실험이다. 이 운동이 과연 어떠한 결실을 낳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로마의 공기는 혼탁하면서도 새로운 맛이 있다. 반전의 묘미다. 이것은 오랜 역사의 풍상을 견디며 형성된 이탈리아의 특징일 것이다. 가령 로마제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기서 인간의 삶을 영구히 지배할 것만 같은 거대한 정치체제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완강한 질서를 전복하는 새로운 힘도 느낄 수 있다.
맑게 갠 2월의 어느 날, 관람객들이 이룬 긴 행렬에 섞여 콜로세움에 들어섰을 때 한 가지 든 생각이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무참히 살해된 기독교인들의 잔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들의 순교는 제국의 무력 앞에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인간의 무력감을 대변한다. 그러나 결국 로마는 어떻게 됐나. 의기양양했던 황제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들은 제국의 끝에서 끝까지 십자가로 장식된 교회를 지었다.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던 로마의 자랑, 판테온조차 기독교회로 바뀌었다.
그런 점만 보아도, 로마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역사의 실험실’이었다. 교통도 혼잡하고 공기도 여간 탁하지 않은 로마. 시민들이 생활고로 이맛살을 찌푸린 이 도시는 혼란과 혼돈 속에서도 빈번히 기존의 역사를 뒤엎고야 마는 새로운 실험의 현장이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대중주의(포퓰리즘)
▲로마인들이 이용하던 대형 공중목욕탕. [위키피디아]
로마의 멸망을 연구한 책은 200종이 넘는다. 이 중에는 기묘한 주장이 적지 않다. 어떤 이는 동성애로 제국이 멸망했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는 로마 수도관이 납으로 만들어져 있어 이를 통해 수돗물을 마신 사람들이 중금속에 중독돼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기후변화가 제국을 무너뜨렸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기온이 떨어져 지중해의 생태계가 무너진 결과라는 것이다. 실제로 로마제국 말기에는 기온이 점차 내려갔다. 그러자 산비탈에 심은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죽어갔고. 산사태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제국의 전성기에는 지중해 연안에 인구가 꾸준히 증가해 산업이 발전했으나, 저온화라는 자연적 암초에 걸려 식량 생산도 감당하지 못하는 곤경을 초래했다는 설명이다. 일리가 있다.
기후변화가 본격화한 것은 5세기 초부터다. 날씨가 추워지자 제국의 변방에 살던 ‘야만인’들은 자신들보다는 여전히 풍요로운 제국의 수도를 습격했다. 고트족, 훈족, 반달족이 교대로 로마를 침략했다. 이것이 결국 제국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생태계의 변화가 정치사회적 혼란과 맞물렸던 셈이다.
철옹성 같았던 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끈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대중주의다. 당시 로마제국은 소수의 귀족들이 재부를 독점하는 양극화가 날로 심각해졌다. 또한 정복지를 확대하기 위해 주변 나라를 끊임없이 침략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농민들은 자신의 농토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농경지는 점차 귀족들의 사유지가 됐다. 터전을 잃은 빈민들은 결국 고향을 떠나 로마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로마의 인구는 나날이 증가했다. 전성기 로마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었고, 그 가운데 절반은 빈민층이었다. 제국은 로마의 빈민들에게 무료 급식을 실시했다. 이는 정치적 불안을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처였다.
권력자들은 빈민들에게 밀과 올리브유, 포도주, 돼지고기 등을 무료로 나눠줬다.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종 오락도 제공했다. 모든 로마인에게 서커스도 무료로 구경시켜줬고, 목숨을 건 검투사들의 경기도 매일같이 연출됐다. 전성기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오전에는 기독교도들을 박해했고, 점심때는 사형수를 처형했다. 오후가 되면 검투사를 등장시켜 피의 향연을 베풀었다. 황제들은 시내 곳곳에 분수를 설치하고 대형 공중목욕탕을 지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빈민들까지도 날마다 목욕탕을 이용할 정도였다. 포퓰리즘 곧 대중주의는 점차 제국의 재정을 갉아먹었다.
서기 200년경, 로마는 연간 27만t의 곡식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에서 수입했다. 그 가운데 3분의 1은 빈민층에게 무상으로 분배했다. 제국의 재정이 넉넉할 때조차 이것은 큰 부담이었다. 훗날 로마제국은 군인황제 시대를 맞아 사분오열되고, 정치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포퓰리즘을 더는 지속할 수 없게 되었고, 빵을 내놓으라는 빈민층의 함성은 폭동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로마는 중심에서부터 스스로 붕괴했다.
요컨대 로마제국은 양극화 문제를 회피하고 기득권층에게서 직접적인 양보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대중주의라는 우회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그것이 끝내는 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독배가 되고 말았다. 나는 한가하게 포로로마노(로마공회장)를 산책하며, 역사가 반복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처>신동아 201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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