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관련/-문화일반

영화이야기 (2) : 조선인 상설극장 ‘흥행쟁투 3파전’

by 혜강(惠江) 2019. 3. 10.

 

영화이야기(2)

 

조선인 상설극장 ‘흥행쟁투 3파전’

필름 임대료 6,000만원까지 치솟던 ‘조선영화관 전성시대’

 

 

조재휘 영화평론가

 

 

 

장군의 아들 김두한도 즐겨 찾던 전통의 강호 우미관 겨냥해
단성사는 스타 변사들 스카우트, 조선극장은 현대식 설비로 무장
일본 우민화 정책과 거대 자본 앞에 경영난 지속돼 결국 역사 속으로

※ 한국영화가 탄생 100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일보>는 영화만큼 재미있는 한국영화 100년의 이야기를

영화전문가들을 통해 매주 토요일 들려드립니다.

 

 

 

2008년 배우 조희봉(왼쪽)이 현존 가장 오래된 한국 영화인 ‘청춘의 십자로’(1934) 상영회에서 변사로 분해 영화 속 인물의 대사를 대신하면서 내레이션까지 하고 있다. 변사는 한국과 일본의 독특한 영화 문화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11년 경성의 극장 고등연예관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빚어졌다. 그날 상영된 활동사진은 서양 권투 선수와 일본인 유도선수가 맞붙는 이종격투를 담은 영상이었다고 한다. 권투 선수가 한 판을 이기자 조선인 객석에서 환성이 일어났고, 다음 판에서 유도 선수가 이기자 일본인 객석에서 박수와 탄성이 터졌다. 시합은 유도선수의 승리로 끝났고, 이윽고 컴컴한 극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들이 조선인 관객을 향해 방석과 귤껍질 등을 집어 던지며 욕설을 퍼붓고 나막신으로 때리자, 의기소침해있던 조선인 관객들도 맞대응해 패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일본 순사들조차 손쓸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관객은 흩어졌다. 제국주의의 강점 속에서 빚어진 민족 간 대립의 축소판이었다.

 

 초기 한국 극장들은 판소리를 중심으로 전통연희를 공연하는 틈틈이 활동사진 상영을 겸했다. 이후 191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상설영화관으로의 변신을 꾀하게 된다. 연흥사, 장안사, 목조건물이었던 초창기의 단성사 등지에서 단편적인 활동사진 영상을 선보이던 수준을 넘어서 장편 극영화를 소화할 본격적인 영화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일본인 사업가 가네야마 긴조가 황금정을 인수해 1910년에 설립한 고등연예관은 조선 최초의 상설영화관이었다. 일본인 소유의 극장이었지만 조선 사람들도 많이 드나들어 객석의 반을 채웠다고 한다. 앞의 일화처럼 극장이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 간 대립과 충돌의 공간으로 비화되자 1913년부터는 일본인 전용 극장과 조선인 전용 극장이 분리되기에 이른다. 훗날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본거지로 유명해지는 우미관은 1912년 12월에 설립된 첫 조선인 대상 극장으로 일본인 관객을 받던 대정관과 별개로 운영되었다.

 

 

배우 조희봉이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 변사 공연을 하고 있다. 변사는 애드리브를 섞어가며 영화의 재미를 더하는 역할을 해 연예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대본을 읽을 수 있도록 탁상전등이 있고, 입이 마르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주전자가 놓인 점이 흥미롭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조선인’ 위한 상설극장 우미관 태어나다

 

 "우미관 구경 안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퍼질 만큼 우미관이 극장가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다. 우미관에서는 주로 ‘황금광 시대’(1925)나 ‘로빈 후드’(1914), ‘명금’(1915)과 같은 미국영화나 ‘프로테아’(1914), ‘환토마’(1915), ‘파우스트’(1926)와 같은 유럽 영화 등 서구권 영화를 수입해 극장 프로그램으로 편성하곤 했다. 1934년 들어서 일본 영화를 일정한 비율로 상영해야 한다는 ‘활동사진 영화취체규칙’이 시행되기 이전까지 조선인 극장의 상영작 태반은 서구 외화로 채워졌다. 조선 사람의 손에 의한 조선의 영화가 탄생하기 전이었던 시절이었다. 외화에 대한 열광적인 선호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국책영화를 거부하려는 조선인 극장 운영진과 관객들 나름의 암묵적 저항을 내포하고 있었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1990)을 보면 김두한이 막 조직에 발을 들인 뒤 극장을 찾았을 때 변사의 해설을 곁들여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광경이 펼쳐진다. 이는 1930년대 이전까지 조선인 극장의 풍경을 정확히 고증한 묘사이다.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소설가 심훈(1901∼1936)에 따르면 이 무렵 변사의 해설은 “득의(得意)의 열변을 위하여”, “영사되는 중의 사진의 템포를 낮춰가며 자막을 번역하고 한문 문자를 써가며 웅변체로 설명”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대정관의 분관인 제 2 대정관과 우미관을 오가며 활약한 변사 서상호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한때 신파극단의 배우 출신이었던 그의 방식은 충실한 해설자라기 보단 독자적인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개그맨에 가까웠다. “타이틀에 쫀(영어이름 존)이나 메리로 있건 말건 (중략) 김서방 박서방 훗두루 맛두루 이름을 붙이다가 나종에는 메리가 뺑덕어멈이 되어” 버릴 정도로 영화에 구애받지 않고, ‘뿡뿡이 춤’이라는 특기까지 만들어가며 대중을 웃긴 그의 해설은 큰 인기를 얻어 ‘우미관의 딸러(달러) 뽁스(박스)’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단성사의 등장… 치열해진 흥행 경쟁


 

 오랫동안 이어져온 우미관의 독점체제는 1918년에 이르러 깨지기 시작한다. 광무대를 운영했던 박승필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사들여 본격적인 흥행 경쟁에 돌입한 것이다. 새로 단장해 재개관한 단성사는 일본 덴카츠 영화사만이 아니라 1922년 쇼치쿠와도 계약해 일본으로부터 직접 필름을 수급하는 등 안정적인 외화 필름 공급망을 확보하는 한편, 우미관의 간판이던 서상호를 비롯해 다수의 변사와 직원들을 스카우트해오고, 1923년엔 모리스 상회와 접촉해 우미관이 보유하고 있던 유니버설 영화사 작품의 상영권을 빼앗아 오는 등 우미관을 겨냥한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가장 오래된 만큼 시설이 낙후되었고 신흥 주자의 등장으로 인해 2류 극장 신세로 밀려난 우미관은 이른바 ‘10전 빵’이라 하여 저렴한 표값을 내세워 명맥을 유지한다.

 

 극장의 명운을 건 조선인 상설영화관의 흥행 경쟁은 1922년 11월 조선극장이 개관하면서 더욱 치열해진다. 조선극장은 경영주 황영균의 주도로 5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3층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등 현대식 설비로 무장했다. 전통의 강호 우미관을 후발주자인 단성사와 조선극장이 맹렬히 추격하는 트로이카 3파전의 양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당시 극장 간의 흥행 경쟁이 얼마나 가열찬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 세실 B. 드밀 감독의 ‘왕 중 왕’(1927)과 프랭크 보제이즈 감독의 ‘거리의 천사’(1928)를 유치하기 위한 단성사와 조선극장 간의 경합은 소송으로까지 번졌다. 더글러스 페어뱅스 주연의 ‘검은 해적’(1926ㆍ국내 상영 제목은 ‘따글라스 해적’)은 필름 임대료가 거금 1,200원(현재 가치로 4,800만~6,000만원)으로까지 치솟을 정도였다.

 

 이러한 경쟁은 극장의 홍보, 선전 문화에도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당시엔 요즘 같은 영화 포스터는 없었고 극장의 홍보 수단은 상업예술가가 그린 극장 간판과 신문광고, 전단지에 주로 의지했다. 대략 5일에서 일주일 간격으로 상영작이 교체되는 주기가 오면 ‘마찌마와리’(町回り), 우리말로 ‘마을 돌기’라 하여 악대가 극장 인근을 배회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전단을 배포하기도 했다. 극장 전단지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건 단성사의 선전부장 이구영이었다. 보통 전단지는 영화의 제목과 장르 표기, 변사의 이름 정도만을 기입하는데 그쳤는데, 이구영은 16쪽 분량 안에 영화의 스틸 사진을 곁들이고 당대의 영화 트렌드에 대한 짧은 논평과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글을 싣는 등 체계적인 프로그램북을 만들어 조선 영화 홍보의 현대화에 크게 일조했다. 조선 영화계 홍보의 아이디어맨이었던 이구영은 이후 조선극장으로 옮겨가서 200여명의 고정 관객을 중심으로 ‘조극 팬구락부’를 조직한다. 관객에게 1년 정기관람권과 특별 시사회 초대, 영화강좌 개설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오늘날 예술영화관의 회원제 운영을 방불케 하는 서비스로, 비록 2개월 남짓 지속되었지만 시대를 훨씬 앞서간 발상이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말모이’(2019) 속 극장의 모습. 대흥극장이었으나 대동아극장으로 바뀌어 일제 국책영화들이 상영된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일제 야욕에 쓰러진 조선인 극장

 

 

 1930년대 초까지 번성하던 조선인 상설영화관은 영화 정책에 관한 조선총독부의 방침이 뒤바뀌면서 몰락의 기로에 접어든다. 총독부는 ‘조선 민중에게 일본 내지(內地) 문화를 이해’시킨다는 의도로 13개조에 달하는 ‘활동사진 영화 취체 규칙’을 발표하는데, 여기에는 극장 상영작 중 일정비율은 반드시 일본의 국책영화를 틀도록 강제하는 일종의 스크린쿼터 제도와 외화의 수입을 통제하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영화자본의 수익성과 영향력 확대를 도모하는 동시에 영화라는 미디어를 장악해 세뇌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중국과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침략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일본 영화를 상영하게 되면서 일본인 극장과의 차별성을 잃고 도호와 쇼치쿠의 배급라인에서 제외되는 등 외화의 수급에도 차질을 겪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수익성의 악화로 경영난에 시달리게 된다. 1936년 6월 조선극장이 화재에 휩싸여 소실되고, 1939년 여름엔 단성사의 운영권까지 완전히 일본 자본의 손으로 넘어가 대륙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대, 영상 문화의 산실로 고단한 민중의 심정을 달래주었던 조선인 상설영화관의 역사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출처> 2019. 3. 6 / 한국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