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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요한일서의 사랑,“서로 사랑하라” 거짓 신앙을 이기는 요한의 가르침

by 혜강(惠江) 2018. 12. 1.

 

요한일서의 사랑

 

“서로 사랑하라” 거짓 신앙을 이기는 요한의 가르침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넥타리우스 쿨육신의 1679년작 '침묵하는 요한’. 요한의 편지에는 단순한, 그러나 잊기 쉬운 가르침이 들어 있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심장이 막 두근대고 잠 잘 수가 없어요.” 이렇게 가사가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듣고 또 듣다가, ‘볼빨간사춘기’라는 밴드의 열렬한 팬이 되어 버렸다. 사춘기 감성을 내 마음에도 터뜨려 버린 두 소녀의 당혹스러운(?) 노래들을 하도 들었더니, 그 밴드가 부른 모든 곡의 가사를 거의 다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누구든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다들 그럴 것이다. 자꾸 또 보고 싶고, 또 듣고 싶고. 책이든 영화든 노래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내 인생의 책, 요한일서

 

 그렇게 좋아하다가 결국 일생을 걸게 만든 것이, 내게는 성경이었다. 성경 안의 여러 책 중에서도 ‘요한일서’는, 나의 인생 책이다. 어릴 적에 읽던 성경의 요한일서를 펼치면, 거의 모든 구절들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이 좋아하는 책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좋으면 보고 또 보아야 할 텐데, 이 책만큼은 늘 펼치기가 두렵다. 읽을 때마다 마치 칼이 심장을 푸욱 찌르는 듯한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히브리서 4:12) 주로 연구를 위해 성경을 읽다 보니, 이런 경험을 자주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요한일서를 읽을 때만큼은 그 ‘칼 날’을 피하기가 어렵다.

 

 요한일서는 요한이 보냈던 편지 중 하나다. 요한은 ‘빛’과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훈훈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기원은 훈훈하지 못했다. 당시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단 사상인 ‘영지주의(靈智主義ㆍgnosticism)’의 위협 아래 있었다. 요한은 그 거짓 가르침으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있던 이들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이 서신을 기록했던 것이다.

 

 복음을 열심히 전파하던 사도들에게는 참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단은 요상한 논리로 어린 신앙인들을 해쳤다.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요한일서 2:22) 열심히 전도하여 기독교인을 만들어 놓았더니, 이단 사설을 듣고는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원자가 아니란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인데 말이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응이 이렇게 시작한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2:24) “처음부터 들은 것”, 즉 기초를 잘 붙들어 두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왠지 미진하게 느껴진다. 혹하는 논리로 신앙인을 유혹하는 이단 사설에 맞서려면, 뭔가 기막힌 신학 이론으로 반박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초에 머물라고만 하니 뭔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요한 “이론이 아닌 실천”

 

 하지만 이어서 요한이 가르치는 내용은, 신앙의 황금률을 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참 신앙인을 어떻게 구별 할 수 있는지 그는 이렇게 가르친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아닙니다.” (3:10) 참 신앙인은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단의 거짓 가르침을 이겨 누르기 위해, 당연히 또 다른 공교한 신학 이론이 제시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요한이 제시한 방법은 사고의 반전이었다. 거짓인 이론을 이기기 이해서는, 참된 것을 실천하면 된다. 요한의 대답은 사랑의 실천이었다. 신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또 다른 관념적 신학 이론이 아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해답이다.

 

 요새 ‘혐오’가 참 많다. 남자가 여자를 혐오한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이러다가 부모도 혐오할 세대가 올까 겁난다. 여러 혐오 가운데서도 기독교와 교회는 혐오의 원조 격이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꽤 오래 전부터 이런 기류가 있었다. 사실 성경과 기독교의 숭고한 가르침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될 리는 없다. 오해는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그 숭고한 가르침을 늘 공부하고 남에게 가르치기까지 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는 그 숭고함에 미치지 못할 경우가 많다. 심지어 반(反)성경적이고 비(非)그리스도적인 교회의 행위가 미디어에 자주 오르내리니, 사회에 해악이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반기독교 셔츠. 교회가 사랑이 아닌 혐오를 일삼으면 교회가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폰세카 제작.

 

 요한이 이단 문제만 가지고 이 서신을 적은 것은 아니다. 세속의 문제 등도 그의 서신이 다루는 문제 거리였다. 하지만 그 모든 문제에 대한 요한의 해결책은 하나로 귀결된다.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회가 지닌 문제에 대하여서도 요한은 이 한 가지를 정답으로 제시할 것 같다. 말만 하지 말고, 행하라고 말이다.

 

오직 사랑이라는 실천

 

 위에서 요한은 처음에 배웠던 기초에 잘 머무르라고 말했다. 이제 그 기초가 무엇인지 이렇게 알려준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11) 서서히 찔러 들어오는 칼날의 쓰라림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처음 들은 가르침을, 구원이 무엇이고 영생이 무엇인지 칭의가 무엇인지 했던 이론들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요한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명언이다. 성경의 앞부분인 구약성경은 ‘율법’이 그 핵심이지만, 핵심인 율법의 문제점만 남긴 체 끝을 맺는다. 이어 신약성경에는 이 율법의 문제에 답하기 위해 예수가 등장한다. 그런데 예수는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훌륭한 법을 손에 들고 오셔서 설파하지 않으셨다. 그의 해결책은 자신의 희생을 동반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요한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표현은 당연히 교인들의 머릿속에 다음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구원, 믿음, 영생, 칭의 등등. 그러나 이 지점에서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14) 매우 놀라운 말이다. 신학적 표현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이라고 표현되었을 자리에, 요한은 과감히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 둘은 하나인 것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사랑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사랑의 실천 없이는 어느 것도 옳지 못하고 온전하지 못하다. 정의가 옳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의도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옳지 못하다. 민주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세계화(globalization)든, 성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랑이 없다면 결국 인간을 기만할 것들이다. 그런데 교회와 신앙인에게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3:16-18)

 

 요한일서는 너무나 사랑하기에, 너무나 아픈 책이 되어 버렸다. 신앙인이 되는 것은 진짜 장난이 아니다.

 

<출처> 2018. 8. 18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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