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의 의미
신과 인간 사이 희생양이 된 예수의 가르침 “이길 수 있어도 져라”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불결한 것은 용서 못하는 신과 죄많은 인간 사이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한 몸을 바친 예수
옛 인류는 폭력 악순환 끊기 위해 고아·포로·이방인을 희생양 삼아
오늘날 갈등과 긴장 풀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스스로 나서는 게 신앙인의 소명
어느 유명인의 섹스 스캔들이나 마약 연루 사건이 보도되면, 매체들이 온통 떠들썩해진다. 동시에 이런 의혹도 제기된다. “이거 뭐 하나 덮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고 정말 덮이기는 하는 걸까. 원시사회에서, 어느 두 부족 간에 폭력적 분쟁이 시작되면 그 결과가 치명적일 수 있었다. 어느 한 쪽이 멸절할 때까지 폭력의 악순환이 좀처럼 멈추기 않기 때문이다.
폭력은 에너지와 같다. 내가 옆 사람을 한 대 치면, 폭력의 에너지가 옆 사람에게 전이된다. 그 에너지는 반드시 소진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옆 사람은 곧 나를 반격한다. 다시 나에게 넘어온 폭력을 나는 다시 옆 사람에게 되갚고, 이렇게 폭력이 순환되다 보면 결국 둘은 죽기 직전이 된다. 한 대 때리고 도망가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폭력은 소진되어야 하기에, 맞은 사람은 물건이라도 집어 던져 박살을 내야 분이 풀린다. 그렇게 그 에너지를 소진해야 한다.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면, 폭력의 에너지가 자기 안에서 폭발 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병이 난다. 이렇게 폭력은 그 에너지가 소진해야만 한다.
폭력의 악순환 멈추는 희생양
두 부족 간에 폭력이 발생하여 서로 멸절할 위기에 이르게 되면, 이런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바로 희생물을 잡아 죽이는 것이다. 주로 고아나 전쟁 포로, 이방인 중에 하나를 고른다. 사회적 유대가 약하기 때문에 폭력을 당해도 되갚을 일이 희박한 이들이다. 두 부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 ‘희생양’에게 폭력의 에너지를 소진해 버리면, 그 후 두 부족 간에는 폭력의 긴장이 사그라지고 평화가 찾아온단다.
그래서 누군가의 스캔들이 희생양이 되어 악용되기도 했던 것은 맞다. 국민의 불만이 고조되어 사회의 긴장감이 극에 다다르면, 사회에 큰 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안정을 위해선, 그 폭력적 에너지가 어딘가에서 소진되어야만 한다. 대개 애매한 공직자 한 사람이 국민의 분노를 다 뒤집어쓰고 파면을 당한다. 혹은 유명 연예인의 막장 스캔들이 하나 터져 주면, 사회의 분노는 다행히(?) 거기에서 소진되는 수가 있다.
인간 역사를 잠깐만 훑어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역학이다. 아주 고약하게는, 위기에 몰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애꿎은 전쟁을 일으켜 폭력 에너지를 외부에 소진하게끔 한 적도 있다. 그 전쟁에 희생당한 이들은 참으로 불쌍한 희생양이 된다. 아니 어쩌면 언젠가 다시 피어 오를 잠재적 폭력이 되기도 하다.
원시 부족들은 그렇게 희생양을 죽이고 평화를 찾았던 경험을 주기적으로 기념했다고 한다. 기념을 할 때에는 인간을 희생양으로 죽이지 않고, 대신 동물을 잡아 모방 행위만 했다고 한다. 그런 주기적 기념행사가 발달하여 종교적 제의가 되었다고 보는 종교학자들도 있다. 이런 이론으로 보자면 종교의 출발은 평화 추구였다.
구약, 거침없는 폭력의 기록
구약성서 사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정말 참혹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을 져버리고 인간 보기에 좋을 대로만 살아가던 사람들의 막장 드라마를 묘사한다. 시작은, 어느 한 레위인의 첩이 밤새 낯선 마을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죽음에 이른 것이었다. 그 여인이 폭력적으로 죽고 나서, 이스라엘 안에는 보복성 폭력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결국 한 지파가 멸절 위기에 이르렀는데, 심지어 그들은 자손을 이어갈 여자마저도 없었다.
원시사회에서는 여자가 없으면 남자들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켜 여자를 빼앗아 오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희생양’을 찾아낸다. 어느 마을에 잡혀온 어린 소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납치해 가서는 아내로 삼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사사기의 막장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한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시작한 공동체의 위기는, 결국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하나님을 져버린 인간들의 폭력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폭력도 거침없이 묘사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폭력적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태양이 폭력적인 것과 같다. 태양이 비윤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속성이 뜨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양은 아쉽게도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다.
하나님은 거룩하기 때문에, 깨끗하지 못한 것은 그 앞에서 다 진멸해 버린다. 그래서 문제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떻게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다시 ‘희생’이 언급될 수밖에 없다.
예수는 희생양이다
그렇다면 신과 인간 사이에 누가 희생양이 되어야 할까? 위에서 살펴 본 설명에 의하면, 희생양은 보복의 출로가 막혀있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제시된 희생양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룰 그 희생양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였다. 이렇게 묘사된 희생의 기제는, 인간이 차마 상상하기도 어려운 비현실적 제시다. 부모는 차라리 자기가 대신 고통 받거나 죽는 것을 택하지, 눈앞에서 자기 자식이 당하는 참혹한 폭력은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성한 폭력은 그렇게 소멸되었다. 예수의 희생 이후, 하나님과 인간은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한다. 고통은 오로지 하나님의 몫으로 넘겨졌다.
사실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의 희생이 이와 같은 이론으로 설명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매우 전통적인 히브리적 사고를 빌어, 당시 헬라 문명을 향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서 3:23-25) 이렇게 종교, 인간, 희생, 평화는 성서 안팎에서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참 평화란 희생 없이 오지 않는다. 달갑지는 않지만, 거룩한 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믿는 이들이다. 이 때문에 성서는 누누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본받아 이웃을 위해 희생할 것을 명령한다. 우리 사회에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갈등과 긴장이 해소될 수 있다면 누가 나서야 할까? 두말할 것 없이 기독교인의 몫이다. 이웃을 위한 희생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생 소명이다.
희생양 예수 따르려는 자가 교인
그런데 신앙인이 지지 않으려고 하니 문제다. 가족 안에 갈등이 있을 때, 신앙인이 지면 된다. 이길 수 있어도 희생하라고 부름받은 이가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평화를 불러와야 한다. 사회 안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먼저 묵묵히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따른 것이다. 예수는 기꺼이 지셨기 때문에, 진정으로 승리하실 수 있었다.
이방인에게 예수를 설명한 다음 구절을 보자. 유대인은 이방인을 원수처럼 여겼는데, 유대인인 예수가 자신을 희생하고 평화를 일으키셨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에베소서 2:16-20)
<출처> 2018. 9. 6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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