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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사고뭉치 베드로, 소심한 마가를 일으켜 세우다

by 혜강(惠江) 2018. 12. 1.

 

치유

 

사고뭉치 베드로, 소심한 마가를 일으켜 세우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로렌초 베네치아노의 그림 ‘베드로를 물에서 구해주는 예수’(1370). 베드로는 예수를 믿지 못하여 물에 빠지는 일을 당한다.

 

 

 베드로는 과잉행동장애(ADHD)를 지닌 것 같아 보인다. 예수의 제자 중 제일 유명하며 초기 복음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훈련을 받을 때만 해도 스승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늘 생각보다 말이 앞서고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미안하지만 특별 관리가 필요했었을 학생이다.

 

 한 날,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이때 베드로가 100점짜리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마태복음 16:16) 물론 제일 먼저 대답을 했다. 감격하신 예수는 ‘베드로(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했다.(16:18-19) 그런데 이 특급칭찬이 있은 후, 아래로 서너 줄만 읽어 내려가면, 선생이 제자에게 할 수 있는 초특급 꾸지람이 베드로를 향해 터진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16:23) 그날은 예수도 베드로도 하늘에서 땅으로 초고속 수직강하를 하셨다.

 

◇ 예수를 곤혹스럽게 하는 베드로

 

 예수가 베드로 때문에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은 예수가 바다에서 곤경에 빠진 제자들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신 적이 있었다. 이때도 베드로는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앞섰다. 예수를 보고 제자들이 유령이라며 호들갑을 떨 때, 베드로는 스승의 마음에 흡족한 말을 했다. “주님, 주님이시면, 나더러 물 위로 걸어서,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14:28) 이 정도 믿음이면 됐구나 싶으셨는지 예수는 베드로를 물 위로 초청하신다. 그리고는 곧이어 베드로의 비명을 듣는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무작정 물에 뛰어들었다가 무서워 그만 빠진 것이다.

 

 예수와 그의 믿음 충만한 수제자가 거친 물 위에서 서로 걸어와 포옹을 하였다면 그 얼마나 멋진 시나리오였을까? 기대했던 명장면 대신 허우적대던 베드로를 끌어 올리면서, 예수는 그의 귀에 나지막이 말씀하였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14:31) 명화를 찍으려다가 개그를 연출하였다.

 

 하루는 예수가 유대인의 최고 위인인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러 산으로 가셨다. 이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아마 제자들 중 성적순 3등까지 데리고 가신 것 같다. 자랑스럽게 보여 드리려 말이다. 기적 중의 기적이며, 너무나 영화롭고 신비로운 신중한 시간이었다. 스승께서 위인들과 엄중히 대화를 나누시는 그때,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가 또다시 돌발행동을 했다. 감히 그 대화에 끼어들어 엉뚱한 말을 내뱉은 것이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17:4)

 

 십자가의 희생과 과업을 심각하게 논의하던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기가 막힌 예수는 대꾸도 안하셨다. 아마 위인들 앞에 얼굴이 붉어졌을지도. 다행히 하늘이 베드로의 입을 막았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수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순간 모든 제자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17:5-6)

 

◇ 베드로를 옹호한 마가

 

 같은 사건이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에 모두 적혀 있는데, 흥미로운 기록 하나가 마가복음에만 나온다. 베드로의 돌출 행동을 이렇게 설명한 것이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마가복음 9:6) 왜 마가만 친절하게도 베드로를 변호하는 말을 남겼을까?

 

 사실 마가에게 베드로는 무척 특별한 사람이었다. 마가의 이야기를 하자면, 미안하지만 그가 잊고 싶어 하는 어떤 사건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수는 생애의 마지막 저녁 만찬을 마가의 어머니 집에서 하였다. 젊은 마가는 어쩌면 그날 예수를 처음 보았는지도 모른다. 자기 어머니가 어떻게 예수를 섬기는지 보았으며, 자신도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을 듣고 그를 깊이 존경했을 것이다.

 

 그날 밤, 마가의 집 밖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예수가 붙잡힌 것이다. 그 일에 대한 기록에 마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14:50-52) 이 구절의 이름 없는 한 젊은이, 붙잡혀 가는 예수를 보고 용감하게 뛰어나갔다가 무서워서 벌거벗고 도망가 버린 그 젊은이가 바로 이 이야기를 기록한 마가 자신으로 추정된다. 벌거벗은 젊은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의 그림 ‘그리스도의 배반, 마가를 쫓는 군인’(1522). 예수가 잡혀가던 날, 마가가 호기를 부리다 옷이 벗겨져 도망가고 있다.

 

 호기를 부렸다가 줄행랑을 쳤던 기억을 뒤로하고, 마가는 새 삶을 살았다. 신약성경의 위인인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다니며 전도사역을 도왔다.(사도행전 13:4-5) 비록 경험이 적고 어리숙했지만, 바나바가 그의 삼촌이었기에 같이 일할 만 했을 것이다. 특히 바나바는 인격적으로 매우 덕망이 높던 평화와 화해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가가 그만 사고를 쳤다. 전도 여행 중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13:13)

 

◇ 마가를 일으킨 베드로

 

 처음 벌거벗고 도망갔던 사건보다 더 실망스러웠을 도주였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이 일로 심지어 평화의 인물인 바나바가 바울과 크게 싸웠다고 한다. 마가가 돌아간 뒤 어느 날, 바나바는 바울에게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바울은 한때,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 그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15:38-39) 삼촌 바나바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마가는 얼마나 자책을 했을까.

 

 바나바와는 달리 바울은 까칠하기로 유명했던 자다. 아마 마가가 도망갔던 이유도 바울의 엄격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은 마가를 그리워하며 편지에 이런 말을 썼다.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디모데후서 4:11) 나중에는 마가가 바울의 신임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성숙한 사역을 다시 시작했던 것 같다. 그의 편지에 자주 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소심하고 자존감이 낮았을 마가가 어떻게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사역을 재개할 수 있었을까? 흥미롭게도 베드로가 등장한다. 전도사역을 베드로와 같이하게 된 것이다. 그 둘은 서로 합이 잘 맞았나 보다. 베드로가 마가를 ‘아들’이라고 불렀을 정도다.(베드로전서 5:13) 마가가 기록한 마가복음은, 어쩌면 예수를 근거리에서 가장 잘 살펴 볼 수 있었던 베드로가 마가에게 전해준 증언을 중심으로 적혔다고 보기도 한다. 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역사상 최초의 복음서이니, 그 둘이 협력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

 

 한껏 위축되었던 마가를 베드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웠을까? 어렵지 않았다. 마가 못지않게 스승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실망시켰던 베드로였다. 그만큼 수도 없이 예수로부터 용서받고 용납받았을 베드로다. 마가에게는 전문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이 필요치 않았다. 베드로의 코미디 같은 좌충우돌 사고 일화들을 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어있는 베드로와 함께하면서 저절로 치유되지 않았을까? 품어주고 용서하는 것, 바로 스승 예수가 해주었던 그대로를 베드로는 마가에게 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마가 정도는 1,000만번도 더 용납해 주었을 것이다.

 

 우리는 늘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다. 애초에 잘난 사람이 필요했다면,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왔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마태복음 9:13) 자기의 치명적인 상처는, 아픈 친구의 최고의 명약이 될 수 있다. 마가와 베드로의 이야기는 더 들을 바가 있는데, 다음 주의 2부를 고대하여 주시길.

 

<출처> 2018. 9. 29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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