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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훈자, 살구꽃, 배꽃이 지천에... 히말라야의 꽃밭

by 혜강(惠江) 2018. 5. 7.

 

파키스탄 훈자

 

살구꽃, 배꽃이 지천에... 히말라야의 꽃밭 '훈자'

 

 

변종모 여행칼럼니스트  

 

 

 

세계최고 장수 마을, 파키스탄 훈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배경이 된 곳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니 꽃처럼 순해졌다
 
 

방대한 히말라야의 꽃밭, 봄의 훈자./변종모


  다시 파키스탄 훈자(Hunza)였다. 두 번의 여름을 지낸 이곳에 다시 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에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Nausicaa Of The Valley Of Wind, 1984)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 그야말로 그림 같은 마을. 아니다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라면 그림 보다 아름다운 마을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그림 속에는 내가 없기 때문에.
  그림 보다 아름다운 봄의 훈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박 한 달간의 봄을 지냈다. 아니 살았다. 파키스탄의 최북단으로 중국과 아프카니스탄 그리고 북인도의 가장 깊은 히말라야를 경계로 우뚝 솟은 마을 훈자. 3월 말의 훈자는 봄이 아니다. 국가 간을 연결하는 도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 KKH(카라코람하이웨이, Karakoram Highway)를 관통하는 곳이니 봄이 더딜 것이다. 봄이라는 단어에 세상 모든 따뜻한 감정들이 다 녹아 있어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 했지만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저 눈발이 곧 꽃잎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았다. 알고서 견디는 마음이 더욱 지루하지만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인 것처럼, 훈자의 봄도 그랬다. 세상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결재를 받은 것처럼. 갑자기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새하얀 꽃의 세상이었다. 한 번 시작된 꽃의 속도는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이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더욱 짧은 봄날의 추억이 계곡처럼 깊다.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은 처음이었다. 

 

 

한 번 시작된 꽃의 속도는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이 막무가내다./변종모


  이곳이 고향인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문을 연 숙소도 몇 없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식당 때문에 불편의 날들이 많았지만, 꽃이 피기시작한 때부터 모든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매일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나도 꽃처럼 순해졌거나 조금 아름다워졌다는 생각을 했다. 천지가 꽃이다. 때로는 꽃 속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꽃이었다가 흔들리는 꽃잎이 이웃집 아이의 얼굴 같기도 했다.

  꽃이 가장 흔한데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꽃이다. 훈자의 주 수입원이 되는 살구꽃이 대부분이었고 체리나 사과, 아몬드나 배꽃들이 비슷한 시기에 어우러졌다.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튼실한 열매가 되는 날 또한 머지않아서 사람들도 꽃의 속도에 맞춰 움직인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일정은 자연의 변화에 맞춰져 있는 듯하다.

  겨우내 묵었던 살림을 봄바람에 털어내도 지천으로 꽃잎 날리고, 부지런히 밭을 일구는 동안에도 늘 꽃밭이었다. 아이들은 꽃 속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머리 위에 꽃잎을 이고 햇볕 드리우는 담벼락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다. 그 풍경을 보는 마음이 꽃처럼 좋아졌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평화가 날마다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졌다. 아무래도 세상의 속도에서 밀려난 삶을 사는 이유로 천국이 되기도 할 것이다.

  자연의 가장 깊은 곳에 속한 삶. 이 척박한 산중이 세계 3대 장수마을에 속한 이유도 그게 전부가 아닐까. 대단한 음식도 없고 편리한 시설도 없으며 풍족한 것이라곤 오로지 자연이 주는 것뿐인 곳.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제 몸을 스스로 움직여 땀 흘리고 사는 삶이 보통의 삶으로 아는 사람들. 까마득히 솟아 오른 만년설의 히말라야와 눈이 녹은 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땅.
 
 

꽃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곳. 그래서 나도 꽃이 되는 곳. 세계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변종모


  유일한 공해는 새들이나 염소들이 우는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마을. 정전이 되는 밤이면 별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곳. 더러는 이곳의 누군가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희망을 품고 도시로 나가기도 하겠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이곳만의 정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나열할 수 있는 곳. 그런 것들을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 사계절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며 품는 삶은 표정으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꽃잎 같은 아이들도 많지만, 아이의 얼굴처럼 맑고 밝은 얼굴을 가진 노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곳. 그래서 이곳은 걷기만 해도 배움이 되고,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해도 교훈이 된다. 훈자를 다녀간 많은 여행자들이 경치에 대해서 말하지만 끝내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사는 곳을 닮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다음 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기 해마다 꽃이 사태 지는 이곳이고 싶다.

  깊은 산중의 봄은 길지가 않았다.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던 봄이 무참하게 지고 있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가슴 속으로 금이 간다. 골목길에 뿌려지는 새하얀 살구꽃잎을 밟으며 잠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 사과 꽃이었는지 배꽃이었는지 무슨 꽃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에 어머니의 머리 위로 소복하게 내려앉던 그 꽃잎을 할머니가 이고서 간다. 골목을 돌아 텃밭을 지나 저 멀리 살구꽃이 사라지는 설산방향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다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또 금방 봄눈처럼 쌓인 꽃잎들.
 
 

히말라야의 설산을 배경으로 핀 꽃/변종모

 

  바람아 불지마라, 누구도 이 꽃잎을 흔들지 마라.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생겼다. 그대, 세상에 지쳐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 싶으면 이곳을 천천히 걸으라. 걷다보면 느려질 수밖에 없는 골목들. 꽃과 같은 젊음이 인생의 짧은 한 때라면, 이곳에서의 젊음은 조금 더 길게 찾아온다. 꽃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곳. 그래서 나도 꽃이 되는 곳. 세계최고의 장수마을 훈자로 꽃을 밟으러 가자.

 
PS 서울 벚꽃 필 때 훈자 살구 꽃 핀다

  겨울의 끝이라 생각하며 준비해야할 것들이 있다. 난방이 열악한 이곳의 사정에 맞춰 방한 준비는 필수다. 이른 봄은 여행자들이 뜸한 시기라 문을 연 식당도 먹거리도 많지 않다. 그래도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의 대부분은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은 기본 24시간 이상을 생각해야하며 길기트까지 비행기가 있으나 장담할 수 없으므로 가장 많이 준비해야할 것이 시간과 인내다. 바랄 것이 있으면 행운이기도 하다. 친절하고 순한 훈자마을 사람들 사이를 꽃밭을 걷듯 예의바른 여행자의 마음가짐 또한 가장 먼저 챙겨야할 덕목이다.


 

 

◆변종모는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등을 썼다.



출처 : 2018. 3. 26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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