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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충남 금산, 살짝 늦게 달아로른 연분홍 산벚꽃이 절정

by 혜강(惠江) 2018. 4. 12.







박경일 기자



국내 최대 산벚나무 자생지인 충남 금산의 보곡산골에 지금 산벚꽃이 만개했다. 덜 핀 것과 다 핀 것, 지는 것의 색이 모두 다 다르다. 발치에 피어난 건 조팝나무꽃이다. 보곡산골이란 군북면의 궁벽한 산촌인 보광리, 상곡리, 산안리를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충남 금산은 ‘비단 금(錦)’에 ‘뫼 산(山)’ 자를 씁니다. 뜻 그대로 쓰면 ‘비단 뫼’입니다. 금산 땅을 휘감아 흐르는 금강(錦江)도 마찬가지로 ‘비단 금’ 자를 씁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금산에서는 산도, 그리고 강도 모두 화려한 비단 같지요. 산과 강화사한 봄꽃과 신록으로 수놓아지는 이즈음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 이성계의 탯줄을 왜 금산 땅에 묻었을까.

태조 대왕 태실 얘기부터 하는 게 바른 순서겠다. 충남 금산 땅이 가진 비범함에 대해 말하고자 하면 말이다. 태실은 왕손의 태를 묻은 자리. 태조 대왕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이른다. 이성계는 함경도 영흥 땅에서 태어났다. 그가 조선을 건국한 후에 조급하게 서둘렀던 건, 뜻밖에 ‘태실 이전’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듬해에 이성계는 함경도에 묻었던 자신의 태를 파서 금산 땅에다 다시 묻도록 했다. 지금도 심히 의심스러운 건, 왕손이 아니었던 그가 과연 태를 보관해두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찌 됐든 분명한 건 정권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이성계는 자신의 태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태실을 옮겨 묻는 것은, 자신이 국왕의 운명을 타고났으며 조선 건국이 숙명적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일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새 왕조의 첫 번째 태실 자리를 찾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까. 물색과 숙고 끝에 태실 자리는 충남 금산의 만인산 자락으로 정해졌다. 땅의 기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그 자리를 찾아낸 이는 물론이고 본래 그 자리에서 묘를 쓰고 집을 지어 살던 이에게까지 현감 벼슬을 내렸을 정도였다. 태실 자리를 내주고서 지금으로 치면 군수가 됐으니, 그것 또한 명당이 가진 발복의 힘이었을까.

태조 대왕 태실은 대전과 금산의 경계 부근인 추부터널 위 만인산 푸른 학습원 숲속에 있다. 지금의 자리가 본디 있던 자리는 아니다. 일제는 1928년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태실에 보관된 왕조의 태를 서삼릉으로 모았다. 태를 꺼내면서 석물은 내팽개쳤다. 이걸 훔쳐가기 위해 도굴범들이 석물을 매일 조금씩 움직여 도로 가까이에 옮겼다. 도굴범들이 실어가기 직전에 길가에서 태조의 태실석물을 발견한 주민들이 도난을 막기 위해 이를 인근 중부대 운동장에 가져다 놓았다. 석물은 그러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태실 자리는 이미 땅 임자가 묘를 쓴 뒤였다. 1993년 태조 태실이 본래 자리에서 1㎞쯤 떨어진 언덕 위에 복원된 이유가 이렇다.

석물은 만인산 푸른 학습원의 숲속 오솔길로 200m 남짓 걸어 들어간 자리에 있다. 금산 땅을 굽어보고 있는 태실 앞에 서면 아늑한 땅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곳이 이성계의 태를 묻었던 본래 자리가 아니고, 태실 안에 있던 태마저도 이미 꺼낸 뒤라는 걸 알고 봐도 그렇다.

조선왕조의 시작을 묻은 태실이 금산에 있었다는 건 그곳이 기운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의 수많은 왕족은 지세가 좋은 명당 중의 명당을 찾아내서 수백 기의 태실을 조성했는데, 그 처음이 이곳 금산 땅이었다니 더 무슨 말을 할까. 강과 산이 어우러지는 금산의 빼어난 경관은 이런 맑은 기운과 지세의 덕이 아닐까.





금강의 물길을 끼고 있는 오지인 충남 금산의 ‘작은 방우리’ 농원 마을 강변 길 끝에서 만난 습지. 여기서부터 적벽강까지의 금강구간은 강변 산자락의 경사가 급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전인미답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 아는 이 적어서…여유작작 봄꽃 구경

금산의 봄 풍경이 가장 화려한 무늬를 갖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적다. 내로라하는 봄의 명소들은 행락객들로 시끌벅적한데, 금산에서는 아직도 호젓하게 봄을 누릴 수 있는 건 그래서다. 그러니 뭐 알게 되더라도 굳이 주변에 소문을 내지는 마시라. 그저 아는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와서 화려한 봄날의 여유를 느긋하게 즐기면 그뿐이다.

꼽자면 더 못 꼽을 것도 없지만, 여기서는 금산의 딱 세 곳의 명소만 골라봤다. 봄날의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그래서 누구나 그 앞에 서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풍경을 품고 있는 곳들만 챙겼다. 한 곳은 산이고, 두 곳은 강변이다. 먼저 산 얘기.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꽃, 혹은 산골 마을 얘기다.

금산의 군북면에 ‘보곡산골’이 있다. 충남에서 가장 높은 산인 서대산과 천태산 사이에 들어선 궁벽한 오지 산촌마을인 보광리, 상곡리, 산안리 마을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세 마을을 한데 묶은 이름을 만든 건 산꽃 때문이다. 봄철에 마을이 끼고 있는 산중에 산꽃이 화르르 불붙었다 지기를 거듭한다. 진달래에서 시작해 생강나무꽃과 산벚꽃, 조팝꽃이 마을과 산자락을 뒤덮은 뒤 이어 철쭉과 병꽃나무, 산딸나무, 국수나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운다. 봄날의 그 경관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보곡산골이란 이름을 따로 지어 붙여줬다.


# 산벚꽃이 아름다운 까닭

 

보곡산골에 피는 봄꽃 중에서 특히 압도적인 것은 산벚꽃이다. 일대가 국내 최대의 산벚꽃 자생군락지다. 자그마치 661만여 ㎡(200여 만 평)의 산자락 가득 산벚꽃이 피어난다. 자연에서 저 스스로 자란 산벚나무는 꽃이 늦다. 산 아래 벚꽃들이 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개화를 시작한다. 짐작해보건대 보곡산골 산벚꽃의 절정은 이번 주말쯤이겠다.

산 아래 벚꽃에 대면 산벚꽃은 수수한 쪽에 가깝다. 대신 연두색 신록과의 대비로 눈이 부시다. 산 아래 벚꽃이 모여 피어서 화려하다면, 산벚꽃은 연두색 새잎의 신록과의 대비로 돋보인다는 것이다.

보곡산골은 마을 세 곳을 끼고 있어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보아야 할지 막막하다. 아니, 그 전에 보곡산골을 찾아가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다.

보곡산골을 감상하는 길이 셋 있다. 첫 번째는 산 아래 자진뱅이 마을에서 출발해 크게 산을 한 바퀴 도는 길. 두 번째는 ‘보이네요’란 이름의 정자까지 차로 간 뒤, 산길을 휘적휘적 걸어 봄 처녀 정자를 지나 자진뱅이 마을에 닿는 길이다. 세 번째는 정자에서 곧바로 자진뱅이까지 내려오는 길이다. 첫 번째 길은 너무 길다. 권하는 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길이다.

보이네요 정자까지 가겠다면 제원면 신안리의 절집 신안사를 목적지로 삼으면 된다. 거기서 군북면 산안리의 보이네요 정자까지는 차로 금방이다.

신안리와 산안리. 비슷한 마을 이름이다. 보곡산골이 있는 군북면에는 산안리가 있고, 산안리와 경계에 신안사가 있는 제원면 신안리가 있다. 서로 이웃한 산안리와 신안리의 이름에 모두 ‘편안할 안(安)’ 글자가 들어간다. 산안리는 산(山)이 편안(安)하고, 신안리는 몸(身)이 편안(安)하다. 산이 편하고 몸이 편하니 자연도 나도 다 편안하다. 행락인파 없이 고즈넉하게 즐기는 보곡산골의 봄꽃 구경도 더없이 편안하다.




충남 금산의 보곡산골 인근의 절집 신안사. 법당 마당의 아름드리 벚나무의 벚꽃이 절정이다.


# 스님과 고양이의 동화 속 풍경

신안사는 소박한 절이다. 마을 안에 들어선 절집은 변변한 담장도 없다. 마을도, 절도 스스로 고요하니 구태여 담을 지어 삶과 수련의 경계를 둘 일도 없겠다. 소박하게 사는 마을의 삶이 곧 불법을 닦는 일과 뭐 그리 다를까. 신안사가 들어선 마을 이름이 ‘화원(花園)’. 즉, 꽃동산이다. 이름에 걸맞게 지금 화원동은 조팝나무꽃으로 마을 전체가 그득하다.

신안사 법당 앞에는 꽃 핀 가지를 구름처럼 받들고 서 있는 벚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있다. 늙었으되 당당한 아름드리 벚나무가 법당 마당에 드리운 꽃그늘이 크고 환하다. 마당 끝으로 물러서서 보니 화려하게 꽃을 피운 벚나무가 마치 부처님 앞에 바친 탐스러운 연분홍 꽃다발 같다.

이제 막 만개한 벚꽃 그늘 아래서 신안사 주지 맥산 스님이 ‘꽃, 좋다’며 올려다보는데, 고양이 한 마리가 비틀비틀 기어 와서 스님의 발목에다 몸을 비볐다. 눈이 먼 고양이라고 했다. 한쪽 눈이 멀어서 스님이 ‘일목(一目·하나의 눈)’이라 이름 붙여줬는데, 이내 다른 눈마저도 안 보이게 돼서 ‘심안(心眼·마음의 눈)’이라 이름을 바꿔줬다고 했다.

주변에서 사람의 기척만 느껴져도 툇마루 아래로 숨어들던 고양이가 스님만 나오면 어찌 알고 반갑게 나와서 몸을 비볐다. 맥산 스님은 “고양이가 나를 찾아 헤매다 길을 잃고 산으로 들어 가버린 게 세 번인데, 그때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았다”고 했다. 봄볕이 환하게 쏟아지는 요사채 툇마루에 스님이 앉자, 고양이 심안이도 이내 스님 발치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절집을 두르고 있는 봄꽃의 화려한 색감이 동화책 삽화의 배경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을까. 봄볕 아래 툇마루에 나란히 앉은 스님과 눈먼 고양이의 모습이 동화 같았다.


# 절집의 호랑이와 강변의 호랑이



▲ 충남 금산 천내리 강변의 호석(虎石). 해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신안사에는 고양이가 아니라, 한때 호랑이도 있었다. 나무로 만든, 네 다리로 서 있는 호랑이다. 왕방울처럼 툭 불거진 눈에다 웃는 듯 송곳니를 드러낸 호랑이의 해학적이고 친근한 모습은 바라보기만 해도 슬며시 웃음이 지어질 정도였다.

신안사가 당당한 대가람이었던 시절, 호랑이는 아마도 산신각에 모셔져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사세가 기울면서 신안사는 달랑 주불전 극락전과 대광전만 남았다. 다른 전각에 있던 부처님들도 극락전에서 곁방살이하며 비나 피했으니 나무호랑이는 오죽했을까. 대광전의 한쪽 구석에 옹색하게 자리를 내줬지만, 투박하고 못생긴 나무호랑이 처지에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나무호랑이는 1998년 호랑이띠 해에 ‘가장 한국적인 호랑이’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급기야 잡지인지 달력인지, 표지 모델도 됐다. 새옹지마. 하루아침에 유명해지자 누군가 나무호랑이를 감쪽같이 훔쳐 가버렸다. 잃어버린 호랑이는 여태 찾지 못하고 있다. 금산 향토관에 작게 복제한 것을 전시해 두었는데 박물관신축 공사로 향토관을 헐어서 지금은 볼 수 없다.

금산에는 나무로 만든 호랑이뿐만 아니라, 돌로 만든 호랑이도 있다. 화려한 문양의 용과 익살맞은 호랑이를 돌로 쪼아 만든 ‘용호석(龍虎石)’이다. 용호석은 금강의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군북면 천내리에 있다. ‘천내(川內)’. 우리말로는 ‘내 안’이다. 천내리 강변의 남쪽에 용석(龍石)이, 북쪽에는 호석(虎石)이 있다. 용이 섬세하고 정교하다면, 호랑이는 민화에 등장하는 해학적인 모습 그대로다.

용석과 호석을 여기 세워둔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온 공민왕이 천하의 명당자리에 자신의 능묘위치를 정한 뒤 석물로 사용될 용호석을 세워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진짜 그랬을까.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범부나 꿈꿀만한 부귀공명을 기원했다거나 왕후장상의 후손이 나올 명당을 찾았다는 게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아무래도 훗날 조선 중기 이후의 음택 풍수의 이야기가 덧대져 만들어진 것이란 혐의가 짙다.


# 봄 풍경의 절정을 금강에서 보다.



금산 땅에서 볼 수 있는 봄 풍경의 절정은 금강 변에 있다. 봄의 강은 섬진강이라지만 그건 매화 피는 이른 봄 얘기고, 봄이 깊어지는 이즈음의 강은 단연 금강이다. 섬진강의 봄 풍경이 하동과 광양에 집중돼 있다면, 금강의 봄 풍경은 분산돼 있다. 금강의 물길은 굽이치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관을 군데군데 몰래 부려놓고 간다. 그래서 금강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비밀스러운 곳이 적잖다.

금산 땅에도 봄날의 금강이 빚은 화려한 풍경이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금산 부리면 방우리의 ‘농원 마을’과 부리면 수통리의 ‘적벽강’ 사이 전인미답의 금강 구간이다. 이쪽의 금강 구간은 협곡이라 강변으로 접근할 수 없다. 농원마을과 적벽강은 지척에 있지만 물로 막혀 길이 없으니, 차로 산을 넘어 돌아 들어가야 한다. 두 곳 모두 충남 금산 땅인데, 육로를 따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가려면 충북 영동과 전북 무주를 딛고 가야 한다. 강물로는 5분이면 닿는 거리를 이렇게 돌아가면 차로 50분이 걸린다.

방우리는 금강의 물길이 U자 형태로 급하게 휘어 흐르며 땅을 물방울 모양으로 만든 자리에 있다. 육지와 연결된 땅을 떠내면 그대로 섬이 될 듯하다. 본래 지명은 ‘방울’이었는데, 한자로 적으면서 ‘방우리’가 됐다. 방우리 마을은 큰 방우리와 작은 방우리 두 개다. 상류 쪽에 큰 방우리가 있고, 하류에 작은 방우리가 있다.

좁고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당도하는 작은 방우리를 농원 마을이라 부르는 건 그곳에 1960년대 간척된 농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농원은 6·25 전쟁 후 정착민과 피란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쇠망치와 정으로 바위산에 물길을 돌리는 250m의 바위굴을 뚫어 만들었다. 주민들이 피땀을 쏟아부으며 맨손으로 일군 농원 마을은 한편의 인간승리 드라마였다. 이런 이야기는 1963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쌀’로 만들어져 널리 알려졌다.

금강하류로 이어지는 농원마을 길 끝에는 습지가 있다. 온통 초록으로 가득한 이국적인 공간이다. 여울을 이루는 강변에는 지난가을의 억새와 새로 돋은 버드나무의 신록이 그득하다. 그 사이로 물새들이 날아와서 앉았다가 갔다. 이토록 풍경이 화려한데도 농원 마을은 적막하다.

적벽강도 마찬가지다. 강변에 번듯한 주차장을 만들어 놓았고 인근 수통리 마을에 식당도 몇 곳 있으니, 구멍가게 하나 없는 농원 마을보다야 사정이 낫긴하지만, 봄날 적벽강에도 인적이 없다. 농원 마을에서, 또 적벽강에서 수채화 물감이 번진 듯한 강변길을 걷다가 떠오른 질문. “이렇게 아름다운 봄 풍경이 있는데 여길 놔두고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진짜 궁금해서 묻는 얘기다.


■ 여행정보




적벽강 가는 길 = 적벽강은 금산읍에서 37번 국도로 타고 부리면소재지까지 가서 601번 지방도로로 갈아탄 뒤 금강을 건너는 수통대교와 적벽대교를 건너가면 닿는다. 강에 막혀 길이 끝나는 적벽강 마을 수통리는 궁벽하지만 청정한 강변 마을이다. 수통리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적벽강 인근에서 식당 종가집(041-752-0229)을 운영하는 길선근(59) 씨는 “지금이야 차가 닿지만 과거에는 배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고 했다. 적벽강의 물길을 건너는 적벽대교 곁의 준공비에 그 시절 얘기가 있다. 유실과 복구가 되풀이됐던 출렁다리 얘기가 자못 비장하다. 번듯한 시멘트 다리 적벽대교를 놓은 건 1988년 12월의 일이다.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감격했던지 ‘다리를 놓은 뜻’을 비석에 적어두고 ‘후세에 전하니 길이 빛내달라’는 당부까지 덧붙여 놓았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적벽강이 있는 수통리에 마을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적벽강 휴양의 집’(041-751-7142)이 있다. 최근 보수작업을 하면서 새로 짓다시피 해서 쾌적하고 깔끔하다. 숙소 인근 마을회관 2층에 마을박물관도 있다. 주민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 등을 전시해놓은 공간이다. 금산읍에서는 금산한방스파&호텔휴(041-750-1001)가 가장 좋은 숙소다. 평일 기준 숙박요금은 6만6000원. 강변 풍경과 습지가 있는 방우리 농원 마을은 전북 무주를 거쳐 들어가야 하는데 인근에 무주 향로산 자연휴양림(063-322-6884)이 있다. 지지대를 받쳐놓고 공중에다 지은 숲속 나무집이 독특하다. 금산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민물고기로 끓여내는 어죽과 튀긴 피라미에 고추장을 발라 내는 도리뱅뱅이. 특산품인 인삼을 넣은 ‘인삼어죽’을 내는 곳도 많다. 제원면의 원골식당(041-752-2638)이 어죽으로 이름났다. 산약초샤부샤부, 당귀떡갈비 등 약초음식을 내는 솔내음(041-752-6369)도 알아주는 집이다.



<출처> 2018. 4. 11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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