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여행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혼을 따라
- 거장이 지은 건축물 375개, 하나하나 역사 머금은 보석 -
에디르네·이스탄불(터키) = 글·사진 박경일 기자
▲ 터키 이스탄불 골든 혼 일대의 바다를 건너는 갈라타 다리 위에서 바라본 술레이마니예 사원의 야경. 오스만제국의 전성기인 술탄 술레이만 재위 시절, 미마르 시난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지은 사원이다. 외부에서 사원을 보는 경관도, 사원에서 외부를 보는 경관도 다 훌륭해 어느 게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다.
500여 년 전 동서양을 잇는 대제국을 건설한 오스만튀르크에는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있었습니다. 낯선 이름입니다만 그가 제국의 전성기와 함께하면서 이룬 건축적 성취는 놀랍습니다. 그는 기하학을 동원해 거대한 돔을 지어서 기도하는 누구도 기둥 뒤로 가려지지 않는 사원의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두운 사원에 환한 빛을 끌어들였고 사원 벽과 천장은 종교에 바치는 헌신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려내지 못했을 섬세한 문양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지금 이슬람 건축의 아름다운 선들은 모두 그의 손으로 다듬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서양의 길목에 위치한 터키에는 수많은 문명이 지나갔습니다. 터키를 여행한다는 건 그 문명의 자취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오스만튀르크의 심장이었던 터키의 에디르네에서 이스탄불까지. 옛 제국의 수도를 따라가며 천재적인 건축가 시난이 남기고 간 건축의 공간을 찾았습니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는 그 여정에서 만난 제국의 천재 건축가가 구현해낸 아찔한 아름다움에 대한 것들입니다.
# 종교와 종교가, 제국과 제국이 만나는 광장
터키 이스탄불 관광의 중심에는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 있다. 이스탄불에 막 도착한 여행자가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 이스탄불에서 딱 하루, 아니 딱 한 시간만 주어진다 해도 꼭 가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이스탄불을, 아니 터키를 대표하는 아야소피아 박물관과 블루 모스크는 바로 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듯 마주 보고 있다. ‘대치’란 단어를 쓴 건 아야소피아는 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블루 모스크는 오스만튀르크의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아야소피아가 이곳이 동로마 수도였을 때 지어진 걸작 건축물이라면, 블루 모스크는 이스탄불을 점령한 오스만튀르크가 그 강성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이 두 건축물이야말로 이스탄불이 지나온 역사를 보여준다. 어디 이스탄불뿐일까. 터키 땅 어디에서든 기독교와 이슬람이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
터키에서 오래된 역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 하나가 ‘건축’이다. 고색창연한 유럽의 도시를 여행한다는 것도 사실 건축을 본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오래된 건축물에는 당대의 미감과 그 눈부신 미감을 빚어낸 열정과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오래된 건축에서 그들이 살아낸 삶과 믿었던 종교, 그리고 도달하고자 했던 꿈을 읽는다. 사라진 과거와 역사를 해독하는데 이만큼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터키에서 한 사람의 행로를 따라가기로 했던 건 그래서다. 미마르 시난. 강성했던 오스만튀르크 최고의 건축가, 동시대를 살았던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전설이었던….
▲ 왼쪽에 4개의 첨탑을 두른 사원이 오스만튀르크 시대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터키 서북부 도시 에디르네에 지은 셀리미예 사원이다. 81개의 사원과 55개의 기도소를 비롯해 375개의 건축물을 지은 시난은 이 사원을 자신의 최고 걸작으로 꼽았다.
인간이 빚을 수 없는 '완벽한 돔'
설계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 미마르 시난과 도시 에디르네
이스탄불 이야기는 뒤로 잠시 미뤄두고, 먼저 오스만제국의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자취를 따라 터키 서북부의 도시 에디르네로 간다. 이스탄불에서 차로 2시간 30분 남짓. 에디르네는 터키 전체 영토 중 3%를 차지한다는 유럽 땅에 있다. 그리스, 불가리아와의 접경지역. 오스만튀르크가 첫 번째 수도였던 부르사를 떠나 두 번째 수도로 삼았던 곳이 바로 여기 에디르네다.
에디르네는 발칸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 지금의 그리스와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구 유고슬라비아 일대를 모두 통치했던 거대한 영토의 오스만제국에서 발칸지역은 가장 부유한 땅이었다.
이 도시에서 힘을 키운 오스만튀르크는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 땅을 점령할 수 있었다. 에디르네야말로 중세 이후 세계 지도와 역사를 바꾸는 계기를 만든 역사적인 도시인 셈이다.
에디르네는 오스만제국 최고의 건축가 시난에게도 각별한 도시였다. 건축가로 전성기를 보내던 무렵에 그는 터키는 물론이고 오스만제국을 이뤘던 다른 나라에까지 가서 사원을 비롯해 수많은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세 명의 황제 치하에서 거의 100세 가까이 살았던 시난은 엄청난 숫자의 건축물을 남겼다. 81개의 사원과 55개의 기도소, 55개의 신학교, 26개의 코란학교를 비롯해 목욕탕과 병원, 다리에 이르기까지 총 375개의 건축물이 그의 손으로 세워졌다.
이쯤에서 미마르 시난에 대해 더 알아보자. 시난은 출생 연도도, 출생 배경도 불분명하다. 이름부터 그렇다. 미마르는 터키어로 ‘건축가’를 뜻하는 단어. 시난이란 이름도 군 복무 시절에 받은 이름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기독교 소년을 대상으로 이슬람교 개종을 유도해 교육하는 ‘데브르시메’ 제도로 징집돼 군에 입대했다. 입대 전부터 수학과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적의 요새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찾아내거나, 다리를 만드는 공병 등으로 전투에 투입됐다. 공병대장을 거쳐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수많은 사원을 지으면서 오스만제국의 최고 건축가가 됐다.
# 거장의 걸작, 셀리미예 사원
▲ 셀리미예 사원의 천장과 창. 수많은 창이 환한 빛을 사원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 가장 걸작으로 꼽히는 것이 그가 여든이 훨씬 넘은 나이에 에디르네에 지은 셀리미예 사원이다. 시난 역시 생전에 자신의 대표작으로 셀리미예 사원을 꼽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셰흐자데 사원은 견습생 시절에,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숙련공 시절에, 셀리미예 사원은 내가 장인이 되고 만든 작품”이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셀리미예 사원 건축으로 인해 자신이 장인의 반열에 들었음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뜻이니, 셀리미예 사원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에디르네에 들어서면 누가 따로 일러주지 않아도 셀리미예 사원을 금세 찾을 수 있다. 도시의 구릉 가장 높은 자리에 4개의 첨탑을 두른 채 거대한 돔형의 지붕으로 서 있는 셀리미예 사원의 모습이 워낙 압도적인 까닭이다. 특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초저녁, 사원의 첨탑과 돔에 불이 들어올 무렵의 아름다움이라니…. 이슬람 사원이 워낙 낯설어서 죄다 비슷비슷하게 보이는 통에 비교가 쉽지 않지만, 셀리미예 사원이 빼어나다는 건 아야소피아와 비교해 보면 명확하다.
오스만튀르크의 건축가들 입장에서는 동로마제국이 이스탄불에 남겨 놓고 간 아야소피아가 큰 숙제였다. 그리스도교도들이 1000년 전에 남겨 놓은 성당의 건축적 완성도를 뛰어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아야소피아의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돔, 그게 바로 오스만튀르크 건축가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사실 아야소피아는 튼튼하게 지어진 건물이 아니어서 지진 때마다 무너졌다. 돔의 크기는 어마어마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건축적 강도는 형편없었다. 급기야 돔 벽이 건물 바깥으로 기울어져 여기저기에 버팀목을 세우기도 했다. 훗날 시난도 아야소피아 보수공사에 투입돼 땜질 작업을 한 적이 있다.
▲ 자신이 지은 술레이마니예 사원 뒤편에 있는 미마르 시난의 묘(왼쪽 사진). 터키 에디르네 시내 한복판에 세워진 미마르 시난의 동상(오른쪽).
# 누구도 기둥 뒤로 가리지 않는 곳
셀리미예 사원의 돔은 아야소피아보다 진보한 기술을 보여준다. 아야소피아는 4개의 거대한 아치가 무거운 돔을 지탱한다. 이름하여 ‘펜던티브’ 구조다. 그런데 이런 구조로 내진 설계까지 갖추자면 돔이 무거워져 기둥이 지탱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건물 외벽에 버팀목을 세우든지, 돌 대신 나무와 회반죽으로 돔을 만들든지, 벽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창문의 크기와 숫자를 줄이든지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난은 버팀목을 세우지 않고, 나무와 회반죽으로 싸구려 돔을 만들지도 않고 거대한 돔과 우아한 건축미가 물씬 풍기는 셀리미예 사원을 지어냈다. 기둥 4개의 펜던티브 구조 대신 거대한 돔을 받치는 8개의 기둥을 세워 훨씬 더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완벽한 기하학적 설계로 건축물이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면서 외벽에 더 크고 많은 창을 낼 수 있었고, 창이 빛을 끌어들여 사원 내부는 한층 밝아졌다.
셀리미예 사원은 에디르네의 자랑이었다. 집무실에서 만난 귀나이 외즈데르미르 에디르네주지사는 줄곧 “셀리미예 사원의 돔이 아야소피아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는데, 그게 틀린 말은 아니다. 셀리미예 사원의 돔 크기는 31.22m로 거의 완전한 원형이다. 반면 아야소피아의 돔은 남북 31.87m, 동서 30.86m의 미세한 타원이다. 셀리미예 사원 돔이 남북으로는 짧지만, 동서로는 더 길다. 돔의 형태도 셀리미예의 것이 원형에 더 가깝고 깊이도 3.5m 더 깊다. 돔 크기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건 이 때문이다.
다만 건물 안정성을 위해 셀리미예 사원의 외벽 높이를 낮추는 바람에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아야소피아가 55.6m로 셀리미예 사원(43m)보다 더 높다. 건축물의 크기는 아야소피아가 이겼지만, 돔의 규모와 형태, 그리고 기하학적 구조의 완성도만큼은 셀리미예 사원의 압승이라고 할 만하다.
사원 안의 공간은 넓고 밝았다. 돔을 받치고 선 기둥 8개를 최대한 외벽 쪽으로 빼내면서 확보한 공간감이 시원했다. 거기서 기도하는 이들은 평등했고, 누구도 기둥 뒤에 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감탄했던 건 벽과 천장을 가득 채운 문양이었다. 벽과 천장에 세밀하게 그려진 문양의 정교함은 인간의 솜씨를 넘어선 듯했다. 문양을 그려내는 정교하고도 끊임없는 작업은 종교에 대한 헌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에디르네에는 에스키 사원이 있다. 에스키란 터키어로 ‘오래됐다’는 뜻. 영어로 옮기면 ‘올드(old)’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오래된 사원은 아니고 1414년에 완공된 것이니 셀리미예 사원보다 160년쯤 앞섰다.
에스키 사원의 건축적 완성도는 현격하게 떨어진다. 동로마의 비잔틴 건축양식을 받아들인 뒤에 지어진 셀리미예 사원과 비교하면 뚜렷하다. 건축물의 미감도 모자라고 빛도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그럼에도 이 사원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벽에 적힌 글씨들이다. 벽면에는 가득 하느님과 선지자 무함마드를 뜻하는 글씨들이 회화적으로 씌어 있다. 독특하고 복잡한 문양을 닮은 글씨들을 보면 ‘대체 저걸 어떻게 읽을까’ 싶은데, 실제로 터키 사람들도 극소수만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에디르네 주민들이 이 사원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는 스물한 살의 나이에 동로마를 무너뜨린 오스만튀르크의 메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약속하는 기도를 여기서 했다는 것 때문이다.
▲ 터키 이스탄불 술라마니예사원에서 보스푸르스해협을 내려다 본 경관.
▲ 블루모스크의 위용. 중앙의 돔에 반원형의 돔을 덧대서 크기를 키웠다.
# 우아한 품위의 술레이마니예 사원
다시 이스탄불의 중심 술탄 아흐메트 광장으로 되돌아간다. 광장을 가운데 두고 아야소피아 박물관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블루 모스크로 더 잘 알려진 ‘술탄 아흐메트 1세 사원’이다. 아야소피아의 거대한 돔을 능가하고자 했던 꿈으로 오스만튀르크가 지었던 블루 모스크는 시난 제자들의 솜씨다.
앞서 시난도 오스만제국의 황금기 가장 강력했던 술탄 술레이만 1세로부터 아야소피아에 필적할 만한 건축물을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시난이 지은 것이 언덕 위에서 마르마라해를 내려다보고 있는 술레이마니예 사원이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아야소피아보다 규모는 작지만 우아함은 단연 몇 수 위다. 터키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두른 사원의 조형미, 소박한 내부를 장식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선명한 색감, 사원 남쪽 담벼락에 올라서면 펼쳐지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경관, 야경을 지배하는 존재감까지 무엇 하나 감탄스럽지 않은 게 없다.
술레이마니예 사원은 사원 건축물뿐만 아니라 목욕탕과 병원,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공공부엌, 여러 개의 학교 등이 어우러진 이른바 복합건축물 형태로 지어졌다. 종교적 경건함에다가 사람들의 소용과 필요의 공간이 한데 뒤섞인 이런 양식은 시난이 즐겨 택했던 사원 건축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술레이마니예 사원 담 밖에 시난의 묘가 있다. 평생 영예를 누리며 최고의 건축가로 살았던 그가 손바닥만 한 마름모꼴의 공간에 묻혀 있다. 문이 굳게 잠긴 돌벽 안의 묘 위에는 붉은 터키 국기가 덮여 있었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나, 단 한 장의 설계도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설계도 없이 그 큰 건축물을 지었을 리는 만무한 일. 그렇다면 세밀한 그림과 복잡한 수식의 답이 적힌 설계도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시난이 죽고 난 뒤 제자들은 블루 모스크를 지었고, 다른 제자는 인도의 타지마할을 지었다. 설계도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시난의 천재적인 지식은 어떻게 제자들에게 전해졌던 것일까.
시난을 둘러싼 미스터리 때문일까. 관광객들 사이에서는 시난과 술레이만의 딸인 공주와의 이뤄지지 않은 러브스토리도 떠돈다. 시난이 서른 살 아래의 공주를 사랑해 동쪽과 서쪽의 언덕에다 두 개의 사원을 짓고, 공주의 생일인 춘분에 하나의 사원에는 뜨는 해가, 다른 쪽 사원에는 지는 달이 걸리도록 해 선물로 삼았다는 애틋한 얘기다. 누군가 쓴 소설을 각색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구전된 설화라는 얘기도 있지만, 분명한 건 그의 생애가 뿌연 유리 뒤에 있어 누구도 그게 사실이라거나 거짓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에디르네의 셀리미예사원 야경. 불을 밝힌곳이 황금빛으로 빛난다.
# 미마르 시난, 그는 행복했을까
시난의 건축물을 따라가는 여정에서 새삼 깨닫는 건 이슬람의 건축물들이 그림이나 조각의 도움 없이 스스로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이다. 서구의 중세 성당이며 교회들이 거룩한 성화와 뛰어난 조각으로 치장한 채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다면 이슬람 사원에는 건축물 자체와 문양만 있을 뿐이다. 그림이나 조각으로 사람과 동물을 형상화하는 게 이슬람에서 철저하게 금하는 우상숭배의 죄이기 때문이다.
▲ 아야소피아의 내부. 거대한 돔이 만들어내는 공간감이 뛰어나다.
이쯤에서 부질없는 상상 하나. 인간의 노력과 인내, 그리고 신의 도움으로 만들어낸 완벽하고 우아한 종교적 건축물들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일. 그럼에도 내로라하는 유럽의 이름난 성당들에서 조각과 그림을 다 떼어낸 뒤에 순전히 건축적 견실함과 아름다움으로 겨룬다면 과연 시난이 지은 이슬람 사원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이어 시난을 따라나선 여정의 말미에 떠오른 질문. 그는 건축가로서 과연 행복했을까. 오스만 제국의 영광 속에서 오래 권세를 누렸던 그는 술탄의 명령에 건축물을 주문 생산하듯 지어내면서 단 한 번도 격식에 어긋나는, 자신만의 건물을 지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창조적 본능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건축가였을까, 아니면 설계도 한 장 남기지 않을 정도로 이기심으로 가득 찬 권력 지향의 인물이었을까.
■ 여행정보
인천공항에서 터키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까지 비행시간은 11시간 남짓이 걸린다. 터키항공과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이 이스탄불 직항편을 운행하고 있다. 터키항공은 매일 0시4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오전 6시 15분에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하는 비행편을 운항하고 있다. 이스탄불 공항에 아침 일찍 도착해 바로 일정을 시작할 수 있다.
이스탄불에서 셀리미예 사원이 있는 에디르네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 30분쯤 걸린다. 버스를 타면 3시간 안팎이 소요된다. 에디르네는 도시가 그다지 크지 않아 관광지는 어디든 걸어 다니며 돌아볼 수 있다.
터키는 호텔 요금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 에디르네의 호텔은 이스탄불보다 싸서 2인 기준 7만~8만 원이면 괜찮은 호텔을 고를 수 있다.
터키의 화폐단위는 리라. 1리라가 우리 돈으로 289원쯤 된다. 10년 전만 해도 1리라에 600원이 넘었고 3년 전에도 500원 선이었는데 이후 화폐가치가 하락곡선을 그리고 있다. 리라화 가치는 최근 10년을 통틀어 지금이 최저 수준. 리라가 폭락하고 원화가치가 오르고 있는 지금이 터키 여행을 하기에 적기다. 이스탄불 도심의 상점들은 리라뿐만 아니라 달러와 유로 등도 받는다. 아타튀르크 공항 면세점은 아예 상품 가격을 유로화로 매겨 놓고 유로화 기준으로 돈을 받는다.
터키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로쿰’이다. C 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에서 하얀 마녀가 주인공 에드먼드를 유혹하면서 로쿰을 주는 장면이 나와 널리 알려졌다. 로쿰은 견과류나 과일들을 넣어 만든 쫀득한 젤리다.
유럽 땅에 커피를 전파한 터키에는 ‘터키시 커피’가 있다. 터키시 커피는 구리용기에 커피 가루와 물을 넣고 끓여 만드는 걸쭉하고 진한 커피다. 커피 가루를 거르지 않아 가루가 잔 아래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마신다.
잘게 썬 고기조각을 구워 먹는 ‘케밥’과 고기를 잘게 다진 후 떡갈비처럼 뭉쳐 만든 ‘쾨프테’도 터키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먹거리다.
<출처> 2017년 11월 15일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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