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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남도

수덕여관에 얽힌 사람들의 애틋한 이야기

by 혜강(惠江) 2017. 10. 19.

 

수덕여관에 얽힌 사람들

 

그들의 굴곡진 애틋한 삶의 이야기

 

 

글·사진 남상학

 

 

 

▲덕숭산 자락의 수덕사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 내린 태백산맥에서 서해로 방향을 튼 차령산맥이 시 쉬어가는 곳, 호서(湖西)의 금강산(金剛山)이라고도 불리는 덕숭산 중턱에 수덕사가 있고, 수덕사 금강문 바로 왼쪽, 수덕교 건너에 초가집 한 채가 있다. 그 여관이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경내에 있는 수덕여관은 원래 수덕사 비구니 스님들의 숙소였으나, 그 후 이응로(李應魯) 화백이 편히 쉴 곳을 찾다가 이 숙소를 매입하여 수덕여관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1054㎡의 터에 정면 5칸이 길에 접해 있으며 반대편으로 각각 6.5칸과 4칸이 ㄷ자형 날개를 이룬다. 이응로 선생 사적지 수덕여관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다.

 

 

▲수덕여관 전경

 

 

  조용한 산사 입구에 자리한 수덕여관은 지난 70여 년 동안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 중에는 일엽 스님과 나혜석이 있다. 일제 말기 신여성을 대표하던 김일엽과 나혜석. 잡지 <폐허>와 <삼천리>에서 동인으로 활동하며 돈독한 우정을 나눴던 두 사람의 인연은 수덕사까지 이어졌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로 시작되는 ‘수덕사의 여승’이란 유행가처럼, 그들이 수덕사에서 남긴 이야기는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면서 수덕사가 바구니의 사찰로 오인될 정도였다. 또한 나혜석으로부터 그림그리기를 배우며 화가의 꿈을 키웠던 청년화가 이응로와 일엽의 아들 김태신(후에 일당 스님이 됨), 그리고 이응로 화백의 부인 박귀옥 여사의 애달픈 사연이 거미줄처럼 서려 있다.

 

 

▲'수덕여관'이란 글씨는 이응로의 친필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그 후 주인도 객도 떠나간 뒤에는 한때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을 예산군이 기념물로 보존하기 위하여 2009년 비용을 들여 종전 건물을 해체하고 방 7개, 툇마루·온돌 등 옛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다.

 

  현재 수덕여관의 현판은 이응로의 작품이다. 이제 수덕여관은 산뜻하게 새 단장을 끝내고 수덕사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장소로서 미술 전시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수덕여관이 이응로 화가의 사적지임을 알리는 현판과 표지석

 

 

1. 수덕사와 김일엽(金一葉)

 

  수덕사는 일엽 스님(1896~1971)과 관련이 있다.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일엽 스님(법명, 본명은 원주=元周)은 9세 때 신학문의 길로 들어서 진남포 삼숭여학교, 이화학당 등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그후 도쿄 일본 닛신[日新]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다.

 

  그녀는 문재가 뛰어나 12세 때 〈동생의 죽음〉이라는 신체시를 썼고 이화학당 시절 '이문회'(梨文會] 활동을 했다. 일본에서는 이광수 등과 교류하면서 ‘일엽’이라는 호는 일본에 유학할 당시 이광수와 교류할 때, 이광수가 일본의 유명작가 히구치 이치요(1872~1896)처럼 한국의 이치요가 되라고 김일엽에게 붙여준 필명이었는데, 그는 훗날 작가로 활동할 때도, 승려로 출가한 후에도 ‘일엽’이라는 법명을 사용하였다.

 

 

▲김일엽 스님

 

 

  일엽은 도쿄의 영화학교에 유학중 일본 명문가의 오타 세이조를 만나 시대가 용납하지 않는 사랑을 나누었다. 오타 가문은 손주(일당 스님)가 태어났음에도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치 않는다. 이 일로 인해 오타 세이조는 아버지와 가문과 의절을 했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남편과 이혼 뒤에는 1920년 10월 YMCA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폐허〉 2호에〈먼저 현상(現象)을 타파하라〉등의 글을 발표했다. 25세에〈신여자〉를 창간했으며,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며 문명을 떨쳤다. 나혜석(羅蕙錫), 윤심덕(尹心悳)과 함께 한국 근대 개화기를 주름잡은 그야말로 신여성이었다.

 

  일본과 국내에서 숱한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 김일엽은 개화기의 여류시인으로 나혜석·김명순 등과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부르짖던 인물이었으나 결혼과 이혼, 일본 명망가 집안 자제와의 사랑과 실패 등을 겪으며 그녀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 때 지인을 만나 불교에 눈을 뜬 일엽은 마침내 1931년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고 당시 심정을 나혜석에게 털어놓는데 나혜석은 “현실 도피로 종교를 선택해선 안 된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일엽은 아들을 오타 세이조에게 맡기고 홀연히 사라져 목사의 딸에서 비구니로 극적인 삶의 반전을 하게 된다.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낀 그는 30대 초반에 직지사를 찾았다. 일엽은 이곳에서 탄옹 스님의 인도로 머리를 깎고 출가한 뒤 탄옹의 추천으로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의 제자로 들어갔다.

 

  일엽은 ‘글도 망상(妄想)의 근원’이라는 만공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절필하고, 불꽃같은 젊은 날을 뒤로 하고 수덕사의 비구니선원인 환희대, 견성암에 머물며 수행에 몰두했다. 멀리서 어린 아들 김태신(후에 일당 스님이 됨)이 수덕사까지 찾아 왔을 때에도 이미 속세를 떠난 몸이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뿌리칠 정도였다. 아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사랑했던 남자 오타가 찾아오지만 일엽은 그 역시 만나지 않았다.

 

  승려생활 초기만 해도 언론은 그를 잊지 않고 ‘김일엽 여사의 동냥승’(삼천리 1935년 1월호) ‘법당에서 참선으로 청춘을 잊는 김일엽 여사(가인 독수공방기)’(삼천리, 같은 해 8월호)같은 기사를 내놓지만 그는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러던 일엽 스님은 30여년 뒤인 1950년대 후반에서야 침묵을 깨고 다시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60년에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발표하고,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발표하며, 1964년에 마지막 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발표하였고, 그녀는 1971년 수덕사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환희대에서 열반하였다.

 

 

  한편 오타 세이조는 소식이 끊긴 일엽을 찾다가 출가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평생 홀로 살면서 두 사람 사이의 혈육인 김태신의 후원자로서 일엽 스님과의 사랑의 서원을 지켰다. 두 사람은 만년에 수덕사 견성암에서 일엽이 병상에 있을 때 단 한 번, 눈물로 재회하며 '미완의 사랑'을 확인했을 뿐이다. 오타는 이후 외교관이 됐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970년 독일에서 세상을 떠났다.

 

 

2. 나혜석(羅蕙錫)과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김일엽 외에 나혜석의 사연이 얽혀 있다. 나혜석(1896~1946)은 김일엽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김일엽이 문학 전공인데 반해 나혜석은 미술을 전공하였으나 두 사람은 당대에 쌍벽을 이룬 개화기의 여성이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면서 춘원 이광수와 교분을 쌓는가 하면, 1919년 김마리아등과 함께 3.1운동에 여학생 참가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화가의 꿈이었던 나혜석은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그 때 오빠 친구인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졌고 결핵을 앓던 최승구가 사망함으로서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1920년 귀국하여 그의 나이 24세 때 부유한 집안의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김우영과 결혼함으로써 화가가 되려는 꿈을 이어갔다.

 

 

▲나혜석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로 이름을 떨친 나혜석이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에서 첫 서양화 전람회를 열었는데,〈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개인전으로 외에도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폐허’ ‘삼천리’를 비롯한 신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신여성으로서 맹렬하게 활동하였고, 파리로 건너가 그림공부를 하였다.

 

  파리로 건너가 그림공부를 하던 나혜석은 한국 유학생들이 주최한 환영회에서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민족대표 33인중 하나로 천도교 교령이던 최린(崔隣)을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30년 사랑을 택해 두 번째 결혼한 남편 김우영과 결국 이혼하기에 이른다.

 

  “~ 조선 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고,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중략)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나혜석의「이혼고백서」중에서)

 

  그의 애정관은 다음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 위안물 되도다

남편과 자식들에게 대한 /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 사람이 되고저

나는 안다 억제할 수 없는 / 내 마음에서
온통을 다 헐어 맛보이는 /진정 사람을 제하고는
내 몸이 값없는 것을 / 나 이제 깨도다 ... (나헤석의 「인형의 가(家)」

 

 <인형의 집>에 갇힌 노라처럼 위안물로서의 여성의 삶을 비판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열망과 자신을 한 가정의 부속물이나 장식품으로서가 아니라 욕망과 의지를 가진 한 인간으로써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혼에 대한 상처를 씻으려고 일본에서 그림공부에 몰두하던 혜석은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제전(帝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그림을 그려 제12회 제전에서 입선하고 다시 귀국하여 선전(鮮典)에 출품하기 위하여 금강산과 해금강을 주유하며 그림 공부에 열중하지만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나혜석이기에 그림공부에 몰입할 수 없었는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나혜석이 그린 자신의 초상화

 

▲나혜석의 그림

 

  이때, 이혼의 아픔을 극복하려고 그림 그리기에 전념하는 한편 신문 잡지에 여성 인권신장과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과감하게 저항하는 칼럼을 기고하던 혜석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자신에게 성(性)을 가르쳐준 최린을 상대로 '유부녀의 정조를 유린했으니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지방법원에 소송를 제기한다. 조건 없는 열정적인 사랑을 주장하던 혜석으로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였다.

 

 경성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조롱거리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혜석은 문제가 확대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최린 측의 제의로 사건을 합의하고 종결하지만 혜석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로부터 화려했던 인생은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그는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그 사이 나혜석은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몸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1935년 병든 몸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다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짐을 풀었다. 그 이유는 출가를 결심하고 먼저 수덕사 여승 김일엽을 찾아왔던 것이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나혜석과 김일엽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김일엽이 출가를 결심할 때 “함께 승려가 되자”는 김일엽의 청을 거절했던 나혜석이 마음이 바뀌어 승려가 되려고 했을 때는 김일엽이 거절했다는 사실이다.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하였지만, 나혜석은 만공선사로부터 일언지하 거절을 당했다.

 

 

3. 수덕여관을 찾아온 김일엽의 아들 김태신(金泰伸)

 

그 무렵,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 스님을 찾아왔다. 수덕여관에서 만난 소년은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왔다"고 했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태신(金泰伸, 1922~2014, 훗날 일당스님)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일엽 스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천륜이라는 모정에 이끌려 눈길을 헤치고 수덕사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 일엽은 따뜻한 정으로 아들을 안아주는 대신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며 냉정하게 뿌리친다. 이런 매정한 김일엽을 보고 수덕여관에 묵고 있던 나혜석은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 하고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수덕여관에서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 후에도 김일엽의 아들 김태신은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나혜석이 머물고 있는 수덕여관을 찾았는데 그 때마다 나혜석은 자기 자식을 대하듯 모성애에 굶주린 김태신을 보살폈다. 이 때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이응로, 김태신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은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그러던 그가 66세라는 늦은 나이에 불문에 귀의했다. 일본의 3대 미술상을 휩쓸고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서 300여 회의 전시회를 열만큼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일당(日堂)김태신 화백은 왜 이 늦은 나이에 출가를 한 것일까? 그 곡절을 잠시 짚어본다.

 

김일엽이 일본에서 유학할 당시, 일본인 오다 세이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김태신은 3살 때까지 도쿄에서 아버지 친구인 신도 아라키의 보호 아래 자랐고, 조선총독부로 아버지의 근무처가 바뀌자 역시 아버지 친구인 황해도 신천의 송기수(宋基洙)의 양자로 입적돼 송영업(宋永業)이라는 이름으로 소학교를 졸업하던 해까지 성장한다.

 

그러나 소학교 졸업식 바로 전날 친부모인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친아버지는 일본인이고, 조선인인 어머니는 파혼 후 이미 출가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총독부 고위 관리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소학교 졸업과 함께 친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온 김태신은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화백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김설촌(金雪村)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당 선생의 문하생으로 있던 운보 김기창(金基昶)과 함께 그림공부를 시작하지만, 스님이 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져갔다. 김태신은 도쿄 혼고중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봄방학, 여름방학, 겨울방학 등 틈만 나면 조선으로 나와 이당 선생 댁에 있으면서 한동안은 청전(靑田) 화백의 지도를 받아가며 그림공부에 열중하였다. 시대를 대표하는 두 화백이 그의 개인교사였던 셈이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그리워 수덕사를 찾아 일엽 스님에게 내침을 받았을 때는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던 나혜석의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태신은 한용운, 김동리, 김범부, 허백련 화백 등 우리나라 1930, 40년대의 대표적인 인물들과 교류를 갖고 이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하는 일도 하며, 어머니 일엽 스님의 심부름으로 아버지를 만나 수덕사 보수공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본인 아버지 오타 세이조가 경성(서울) 조선총독부에서 고위 관리로서 자신의 뒤를 돌봐주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김태신은 해방이 되고 남북이 이념의 갈등으로 대치하게 되자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황해도 신천 가족을 탈출시키려고 노력하던 중 북한에 억류되어 강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이후 일당의 일생에서 때때로 복병처럼 불거지면서 조선인으로, 한국인으로 어머니의 땅을 밟으며 살 수 없는 운명으로 그를 내몰았다. 지금도 그가 그린 50호짜리 김일성 대형 초상화가 김일성대학에 걸려 있다고 한다.

 

간신히 홀로 북한을 탈출하였으나 일본에서 머물던 김태신은 고국에 대한 향수로 일본인도 아니요, 한국인도 아닌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일본의 3대 미술상인 닛푸전(日府展) 공모 닛푸전상, 우에노모리(上野森) 미술관상, 신일본미술원전(新日本美術院展) 미술원상을 수상하는 등 본격적인 그림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이미 '빨갱이'라는 오명이 붙어 있었고, 이런 이유로 1971년 일엽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고국으로 올 수 없었던 시절 일본에서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머니의 다른 모습인 관세음보살을 마주했고, 어머니를 부르고 싶을 때는 관세음보살을 불렀고, 어머니와 그를 돌보아준 사람들이 그리울 때에는 관세음보살상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에 몰두하는 일당 김태신 스님

 

 어머니 입적 후 1년이 지나서야 중년을 넘긴 나이에 어머니 나라인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국적을 획득하였으나, 이번에는 한국 화단에서 그를 '빨갱이'로 옭아매어 한국의 화단은 화면을 다 채우면서 색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그림, 즉 북종화 계열의 그림을 일본의 그림이라느니 일본화풍이라느니 하는 왜색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한국화단에 채색화 붐을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석채를 아교에 개서 그리는 동양채색화는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불화나 인물화를 그리는 전통기법이다. 또한 한중일 3국의 화가들을 규합하여 국제미술교류전, 국제선면전, 오원미술전 등의 교류전에 매달린 것은 아버지 나라와 어머니 나라가 진정한 화해를 통해 공동의 발전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일당 김태신 스님의 그림

 

이렇듯 미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일당 화백은, 종심(從心)을 앞둔 66세의 늦은 나이에 자신의 일생에 대전환을 꾀했다. 그는 어머니 일엽스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고 싶다는 오랜 숙원을 풀기 위해 직지사 산문의 관응(觀應) 대종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득도하였다. 직지사 조실이자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유식학(唯識學)의 선구자인 관응 스님은 어머니 일엽 스님의 머리를 깎아준 탄옹(炭翁) 스님의 제자이다.

 

김태신에게 있어서 머리를 깎는 일이 늦어졌을 뿐, 어머니의 길을 좇아 수행의 길에 있었던 것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의 일이었다. 그가 직지사를 선택한 것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직지사는 어머니 일엽 스님이 탄옹 스님의 인도로 머리를 깎고 출가한 곳이기에 말이다. 출가하여 불도에 정진하던 일당 스님은 나중에 한국불교 미륵종 제5세 종정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일당 스님은 한국 화단에 잃어버린 우리의 북종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황무지 개척보다도 더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그의 구도의 삶은 천불도사라는 기인을 만나 새로운 「명당도」를 탄생시켰으며, 이 그림을 통해 기적을 보았다는 사람과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2004년, 일당 김태신(金泰伸) 스님은 "라훌라(부처님이 속가에 두었던 친아들 이름)의 사모곡"「한길사 간행」,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문학과 의식 간행」에 이어 자전소설 "화승, 어머니를 그리다" 「이른아침 간행」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 스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널리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것은 모두 일당 김태신 스님의 인생에 어머니가 끼친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보통의 사람은 '양친부모'가 있지만 나는 '십친(十親)부모'가 있다"고 할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살았던 일당 김태신 스님은 2014년 12월, 부모로부터 비롯된 일당의 인생유전(流轉)을 끝내고 93세를 일기로 원적에 들었다.

 

  1922년 9월, 오타 세이조라는 일본인과 당시 유학 중이던 한국의 신여성 김일엽 사이에서 태어나 한일 근세사의 굴곡과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그의 삶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 이후의 한국 근대사가 걸어온 풍경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세밀한 풍경화가 아닐 수 없다.

 

 

4. 나혜석을 찾아온 이응로(李應魯)

 

  나혜석은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는 것마저 거절당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거의 5년여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1인 시위를 하는 한편,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찾아오는 예술인들을 만나며 그림을 그렸다. 이 때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화가 이응로(1904~1989)였다.

 

  1904년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아버지 이근상과 어머니 김해 김씨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와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내다가 이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17살 때 가출한 이응로는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한 나혜석을 만나러 수덕여관을 찾아왔다. 그리고 이응로 화백은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로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 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고암 이응로는 나혜석의 제자로 그의 그림과 바람처럼 살아온 날들을 동경했다.

 

  나혜숙을 찾아 수덕여관에 자주 드나들던 이응로는 나혜숙과 숙식을 같이하며 기거했다. 그러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 특별한 애정관계는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육체의 신비를 모르는 것은 연애가 아냐” 라고 거침없이 말했던 나혜석이었지만,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여자에게 이응로는 8살 아래인 풋내기일 뿐이었다.

 

 

 

▲이응로가 머물며 그림을 그리던 방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버린 이응로는 나혜석이 이곳을 떠날 무렵 1944년 아예 수덕여관을 사버리게 된다. 그러나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화가 지망생 이응로에게 파리 유학에 대한 꿈과 환상을 키워주었고, 이응로는 그 후 그 꿈을 차근차근 실현해 나갔다.

 

한편, 만공선사로부터 중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낀 나혜석은 결국 출가를 포기하고 1944년 수덕여관을 떠났다. 그 뒤 나혜석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 아닌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다가 몇몇 양로원을 전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양로원에서 뛰쳐나온 그녀는 정처 없이 행려병자처럼 떠돌아다가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쓸쓸히 50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5. 이응로와 그의 아내 박귀옥 여사

 

 이응로 화백은 40년대 초 선배 화가였던 나혜석을 만나면서 수덕여관과 인연을 맺었다.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로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였다. 한국전쟁 때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겼다.

 

그 후, 갓 스무 살의 청년 이응로는 1923년 서울로 올라와 당시 유명한 서화가였던 해강 김규진의 문하생이 되어 서예·사군자·묵화 등을 배웠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묵죽〉을 출품하여 입선했고, 1935년 일본으로 가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에게 사사했으며,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박귀희(朴貴嬉, 1909~2001)와 결혼하여 예산 수덕사 인근에서 함께 여관을 운영하며 살면서 1938년 제17회 선전에서는 이왕직 상을 받고, 이후 1945년까지 선전과 일본화원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했다.

 

1945년 42세가 된 이응로는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충남 예산의 수덕여관을 인수하여 동생 흥노에게 경영을 맡기고 서울에 '고암화숙'을 개설하였다. 또 1946년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여 일본 잔재의 청산과 민족적인 한국화를 주창했으며, 1948~1950년에는 활발하게 개인전을 열었고, 1954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의 동양화과 교수로 취임하였다. 1956년 '동양화의 감상과 기법'을 출판하였다.

 

1954년 그는 국전의 폐단을 지적하고 국전 추천작가로 초대받는 것을 거절하였다. 미국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현대한국미술전에 '출범'과 '산'을 출품하였는데, 록펠러 재단이 이를 구입하여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 초대전에 동양화가로는 유일하게 초대받아 '숲', '산', '은조'를 출품하였다.

 

 

▲이응로의 작품 '군상'

 

 

1958년, 이응로는 파리 유학의 꿈을 현실로 옮겼다, 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 자크 라상느로부터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라는 초청을 받았던 것이다. 이응로는 파리 방문 초청을 받고 본부인인 박귀옥 여사를 버리고, 새파랗게 젊은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朴仁京)과 함께 파리로 훌쩍 떠났다. 박인경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대인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제1회 졸업생으로 전통 회화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창작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인식을 갖고 서양미술을 체험하기 위해  이응로와 동행했다.졸지에 수덕여관에 홀로 남은 본부인 박귀옥은 청상과부의 신세가 되었

 

으나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켰다. 원망해 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 아내 박귀옥은 남편의 성공을 빌 수밖에 없었다.

 

  한편 파리로 떠난 이응로는 화가로서의 영역을 더욱 넓혀갔다. 1959년에는 서독대사 리차드 허츠 박사의 주선으로 서독을 방문하여 1년간 쾰른, 본, 프랑크푸르트에 체류하면서 독일 본 시립미술관에서 이응로-박인경 부부전을 개최하였고, 프랑크푸르트와 쾰른에서도 개인전을 가졌다.

 

 1960년 1월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재불한국작가전에 출품하였고, 미국 워싱턴 국제현대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파리 폴 파케티 갤러리의 그룹전에도 참여하였다. 1962년 파리 파케티 화랑에서 평론가 자크 라상느의 주선으로 콜라주전을 열었으며, 회갑이 된 이응노는 1964년 11월 프랑스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안에 파리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여 묵화·서예 등을 가르쳐 3,000여 명의 문하생을 배출했다.였다.

 

 또 1965년에는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차지해 주목받았다. 그 외에도 미국, 스위스, 덴마크 등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브라질 제8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이응로 화백이 수덕여관에 남긴 추상문자 암각화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하던 이응로는 1967년에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68년 뜻하지 않게 고국에 납치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박귀옥 여사는 지극정성으로 남편 이 화백의 옥바라지를 했고, 1969년 3월 석방되어 수덕여관에서 요양할 때에도 열심히 남편의 병간호를 했다. 이 때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 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 “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 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났다. 박귀옥 여사는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봐 별거상태를 끝내고 출국 전에 이혼수속을 허락해 주다. 그로부터 박귀옥 여사와 이응로는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혹시나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아 왔지만, 고암 이응로는 1989년 귀국전시를 앞두고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눈을 감았다. 한국 출신 프랑스 화가 이응로는 8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83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장례식에도 가볼 수 없는 박귀옥 여사는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했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제 그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한 많은 여인은 수덕여관을 지키다가 2001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숱한 이야기를 간직한 수덕여관이지만 지금은 모두 옛일이 됐다. 일엽 스님도, 나혜석도, 고암 이응로도, 고암의 본부인도 모두 세월 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를 찾아 이곳을 찾아왔던 아들도. 아들도 훗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다만, 동백림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고암이 이곳에서 몸을 추스를 때 바위에 새겨 놓은 암각화만이 한 시대의 증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수덕여관 앞마당 굴뚝의 담쟁이넝쿨  

 

 

  수덕여관 안마당에는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 굴뚝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넝쿨이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어 허공에서 하늘하늘 춤을 춘다. 어쩌면 더 이상 오를 곳을 찾지 못해 좌절한 여인들의 혼백(魂魄)이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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