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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修德寺), 덕숭산 자락에 안긴 유서 깊은 고찰

by 혜강(惠江) 2017. 10. 14.


예산 수덕사(修德寺)


덕숭산 자락에 안긴 유서 깊은 고찰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덕산면), 종무소 041-330-7700


·사진  남 상 학



수덕사 전경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은 북으로는 가야산,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수덕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불가의 큰 맥을 지키고 있는 절이다. 조계종 5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의 본산으로 도도한 선풍을 지키고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는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다. 그러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수덕사 선문


부도전


선문에서 일주문까지 이르는 길에는 돌비 여럿이 서있다.


원담 스님 부도탑


선(禪)미술관


 매표소에서 매표를 하고 선문을 들어서서 우측의 부도전을 지나면 좌측은 상사화 군락지다. 9월 말인지라 붉은 꽃술이 거의 시들고 있었다. 일주문에 이르기 전, 왼쪽에 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2010년 지은 국내 최초의 ‘선(禪)미술관’이다. 선 미술관에는 전시실 2곳이 있다. 이응로 화백과 수덕사 방장을 지낸 원담(1927~2008) 스님의 작품을 전시한 곳과 일반 미술가들의 상설 전시관이다. 관람료는 없다.


 그리고 사찰 경내의 시작을 알리는 일주문 옆으로 계곡 옆은 바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수덕여관이다. 한국 현대 미술계의 거장인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이 있다. 이응로 화백은 1944년 초가집인 수덕여관을 사들여 1958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기거했다. 그는 수덕여관 뜰 바위에 암각화 2점을 남겼다.



수덕교 건너 보이는 초가집이 수덕여관이다.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본전으로 오르는 길


 일주문에서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문(黃河精樓)을 거쳐 대웅전까지는 곧장 으리으리한 돌계단을 놓았다. 수덕사를 새로 정비할 때 놓은 돌계단인듯 한데 웅장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오히려 풍치를 잃었다. 황하정문을 오르기 전에 우측에는 만공기념관이 있고, 주변에 칠층석탑과 코끼리석등, 미륵의 화신을 상징하는 포대화상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로 지정된 칠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으로서 지대석 위에 기단 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그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황하정문은 대웅전을 보호하고 사세를 안정시키는 구실을 하는 일종의 전위 누각인 셈인데 오른쪽으로 근역성보관(성보박물관)이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대웅전 바로 밑, 황허정문과 나란하게 있는 만공기념관에는 만공스님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돼있다.


 불법을 수호하는 두 명의 금강역사를 봉안하고 있는 금강문과 금강역사


사천왕을 봉안하고 있는 사천왕문과 사천왕


미륵의 화신인 포대화상


석탑 뒤로 보이는 것이 칠층석탑(충남 문화재 자료 181호) 

 

수덕사의 본전, 대웅전

 

 계단 마지막을 지키고 선 황하정루를 지나면 눈에 익은 건물 하나 올려다 보인다. 대웅전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국보 49호)은 수덕사의 얼굴이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면 3칸, 옆면 4칸에 겹처마와 맞배지붕을 지닌 주심포계 건물인 대웅전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고건축물로 700년 세월을 견뎌온 셈이다. 기교나 화려한 장식을 생략한, 단순하면서도 균형감을 강조한 맞배지붕 건물의 참맛을 느끼게 해준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마지막 계단이 꽤나 가파르다


차례대로 금강보탑과 삼층석탑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가까이서 본 대웅전(국보 49호)


 대웅전은 미학적 관점에서도 매우 높은 점수를 받는다. 대웅전의 균형미와 안정감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측면에서 볼 때 한결 돋보인다. 측면은 다섯 개의 배흘림기둥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돌출된 들보가 아름답게 면을 분할하고 있다. 숱한 전란을 용케도 피한 채 지금까지 건재한 목조 건물인 만큼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심우당(尋牛堂) 등이 있다.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은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범종각(梵鐘閣)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법고각(뜰의 우측)


범종각(뜰의 좌측), 높이 2.7m.둘레 4.4m의 청동 대종이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백련당, 청령당, 관음전, 명부전 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보는 세상도 시원하다. 축대를 쌓아 올린 마당의 끝에는 느티나무 고목과 노송이 선승처럼 서 있다. 그 뒤로는 사하촌과 마주선 산이 보인다. 특히, 마주보이는 산은 원근감으로 인해 수덕사를 꽤 높은 자리에 터 잡은 절로 여기게 만든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정혜사로 오르는 길목,1924년 만공 스님이 암벽에 조성했다는 관음보살입상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걸린다. 수덕사에서 만공이 머물던 정혜사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돌계단이다. 정혜사로 오르는 길은 벽초 스님이 1080배를 드렸다는 돌계단 등 오르기가 꽤나 힘든 길이다. 중간에 소림초당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입상, 향운각 등이 있다.

관음보살입상은 만공 스님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로서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이다. 


만공탑(滿空塔)과 만공 스님


 그런데 이 길에는 근대 최고의 선승으로 불리는 만공(1871~1946)의 자취가 서려 있다. 만공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이 그것이다. 만공탑은 만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둥근 돌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부도이다.



정혜사로 오르는 길목에 세운 만공탑


 전북 정읍 태생인 만공(滿空, 1871년~1946) 스님은 조선과 일제 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한국 현대 불교의 대선사로 속세의 성은 송씨로, 송만공으로도 부르며, 법명은 월면(月面)이며 만공은 법호이다.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조선 불교를 지키려 하였다. 또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덕숭산 수덕사(修德寺), 정혜사(定慧寺), 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중창하였으며, 1920년대초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선승들의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인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그는 이론과 사변을 배제하고 무심의 태도로 화두를 구할 것을 강조하고, 제자들에게 무자화두에 전념할 것을 가르쳤다. 1940년 대에는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쓰다가 1946년 예산 전월사에서 수행하던 그는 1946년 10월 20일, 거울을 보며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수고 많았네"라 중얼거린 뒤 잠들듯이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만공 스님에 얽힌 이야기들

 나이 서른에 덕숭산 정혜사의 조실이 된 만공은 숱한 기행으로도 유명하다. 1937년 만공이 마곡사(麻谷寺) 주지를 지낼 때의 일이다.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조선 31본산(本山) 주지회의가 열렸다. 당시 회의석상에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조선불교의 일본불교화를 주장하자 이에 호통을 치며 공박하였다. 만공은 회의석상에서 미나미 지로 총독에게 “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말로는 독실한 불자라 하나 조선의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교리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며 오히려 그의 명복을 빌어주자며 조롱하였다.


 이 외에도 그와 관련된 일화는 많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만공은 다른 승려들과 함께 탁발을 먼 곳까지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걸어서 하루는 걸리는 산을 오를 때였다. 시주미를 메고 묵묵히 걸어오던 중 다른 스님들이 만공에게 쉬었다 가자고 보채고 졸랐다. 해는 이미 서산에 걸렸고 산에 오르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때 만공 스님은 근처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았다. 순간 만공 스님은 갑자기 그 여인에게 달려가 더듬고 키스를 하였다. 놀란 여인은 비명을 질렀고 그곳에 함께 있던 남편과 시아버지가 낫을 들고 “저 땡초놈 잡으라” 소리 지르며 쫓아왔다. 놀란 만공 일행은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고, 두어 시간 만에 절에 당도하였다.


 이 때 어느 스님이 “아니 스님, 어쩌려구 그런 짓을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만공 스님은 껄껄 웃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절에 도착했겠냐? 아마 밤새워 왔을 거야. 짐도 가볍게 지고 오지 않았느냐?”라고 대답하였다.」이와 비슷한 일화는 여럿 있다.


 또 만공이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만공의 이 같은 행보는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는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말을 낳게 했다. 유흥준 교수는 만약 만공이 속세에 살았다면 대단한 기인이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덕숭산 산정에 있는 정혜사(定慧寺)



덕숭산 정상 가까이에 세운 정혜사(능인선원), 돌 위에 세운 두 개의 석탑이 인상적이다.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는 본사인 수덕사와 함께 559년(법왕 1)지명법사(智明法師)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이후 많은 고승대덕들이 수도한 곳이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30년 만공선사(滿空禪師)가 중수한 이후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가 이 절 선원의 조실이 된 이래 문하에 100여 명의 승니(僧尼)가 따랐고, 현대의 불교계를 움직인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정혜사 앞뜰의 나무와 돌


 현존하는 당우로는 관음전을 비롯하여 수도본전인 능인선원(能仁禪院)·산신각·불유각(佛乳閣)·주지실·요사 등이 있으며, 그 중에도 정혜사의 현판이 걸려 있는 선원은 고색과 무게를 갖춘 당우이다. 또한, 깨끗한 정원의 구석에는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작은 2기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어 쌍탑 또는 남매탑(男妹塔)이라고 하나 유래 및 연대 등은 알 수 없다. 나는 정혜사 뜰에 서서, 20여 년 전 〈덕숭산을 오르며〉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생각났다.  


소나무 떡갈나무
우거진 숲
아늑한 그늘 사이로
한여름 더위가 선잠에 들었다.

가파른 돌계단을 기어오르면
여인네의 둔부 같은 암반 위
앙증스럽게 걸터앉은
너댓간 크기의 암자 하나

허허, 여기가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했다는
소문난 자네
처소인가

산마루에 스치는
상큼한 바람이
속진(俗塵)을 털어내고
정혜사 뜰에 서서 마시는 약수는
불유(佛乳)*라 했지!

너털웃음 쓸며
산 아래 굽어보니
멋에 취한 자네 모습
절로 보이네.


정혜사의 약수를 덮은 보호각에는 그가 명명한 불유각(佛乳 : 부처님의 우유)이라는 현판이 붙어있으니 '불유(佛乳)'가 아니겠는가? 



김일엽 스님이 삭발 수도한 견성암(見性庵)과 환희대


견성암을 알리는 표지석


 수덕사는 만공 스님 외에도 개화기의 여류시인이었던 김일엽 스님이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수덕사(修德寺)의 부속암자인 견성암은 수덕사에서 정혜사(定慧寺)에 이르는 좌측 길 산중턱에 있다. 이 암자는 1908년에 만공(滿空)이 창건하고 1930년 도흡(道洽)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면서 비구니들의 수련도량으로 사용되어 왔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환희대(歡喜臺)에 견성암이 있었으나 그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재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이름을 바꾼이 암자는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가장 대표적인 수도처이다.


 1965년 벽초 스님에 의해 인도식으로 지은 석조 2층 건물의 선방(禪房)에서 80여명의 비구니들이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데, 비록 암자의 규모는 작으나 전국 여승들이 참선, 수도하는 수련장으로서는 종가(宗家)의 구실을 하고 있다. 법당 입구에는 만공이 쓴 「칠근루(七斤樓)」 현판이 걸려 있다. 특히 이곳은 개화기의 여류시인 김일엽(金一葉)이 삭발하고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 개화기의 여류시인이었던 김일엽 스님이 수도한 곳

 

 개화기의 여류시인 김일엽(1896.4~1971.2)의 본명 원주(元周)였다. 일엽은 춘원 이광수가 지어준 이름이다. 불명은 하엽(荷葉). 그녀는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한 맺힌 시를 쓰다가 불교에 귀의하면서 선시(禪詩)를 썼다. 목사의 맏딸로 태어난 그는 9세 때 신학문의 길로 들어서 진남포 삼숭여학교, 이화학당에서 공부했고 일본 닛신[日新]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다.


 12세 때 〈동생의 죽음〉이라는 신체시를 썼고 이화학당 시절 '이문회'(梨文會] 활동을 했다. 25세에 〈신여자〉를 창간했으며 나혜석·김명순 등과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 남편과 이혼 뒤에 1920년 10월 YMCA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폐허〉 2호에〈먼저 현상(現象)을 타파하라〉등의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에 실패한 뒤 자유분방한 사생활과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끼고 속세와 인연을 끊고, 불가에 귀의하여 만공선사가 있던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불도를 닦았다. 출가시 만공선사가 선 수행을 위해 읽고 쓰는 것을 중단하라는 말을 따라, 그녀는 20여 년 집필 활동을 중단하다 1950년대 후반에 다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0년에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발표하고, 1962년 <청춘을 불사르고>를 발표하며, 1964년에 마지막 저서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발표하였고 그녀는 1971년 열반하였다.


 수덕사 구내,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인 환희대는 1971년 2월 김일엽 스님이 열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수덕사가 비구니 절이 아니면서도 비구니 절로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수덕사와 인연을 맺은 김일엽과 나혜석 등 몇몇 여성 때문이리라.


환희대,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 김일엽 스님이 주석·열반한 곳


 수덕사를 둘러보고 수덕사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덕숭산 산정의 정혜사를 거쳐 견성암, 환희대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만공스님과 더불어 수덕사와 연을 맺은 일엽 스님, 그리고 수덕사 경내의 수덕여관에 얽힌 나혜석과 고암 이응로 등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이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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