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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및 정보/- 일본

나가사끼, 길고 긴 해안선을 따라 흘러들어온 서양 문물

by 혜강(惠江) 2017. 3. 29.

 

'서양으로 난 窓' 나가사키

 

길고 긴 해안선을 따라 흘러들어온 서양 문물

 

'조슈 파이브'와 함께… 日 근대화에 앞장 선 '스코틀랜드 사무라이'

 

 

 

이선민 선임기자

 

 

 

 

 

  글로버와 사쓰마·조슈번의 연결은 당시 세계적으로 전개되던 영국과 프랑스 대결의 일부이기도 했다. 글로버의 뒤에는 일본 주재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가 있었다.

  1865년 5월 부임한 파크스는 글로버를 통해 사쓰마·조슈번의 핵심 인사들과 접촉하며 반(反)막부 활동을 지원했다. 반면 1864년 3월 일본에 온 프랑스 공사 레옹 로슈는 막부 편에 섰다. 그는 막부에 무기를 공급하며 조슈번 정벌을 부추겼고,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將軍)이 되자 재정·경제 개혁을 지도했다. 1868년 막부가 에도성을 내주고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준 대정봉환은 두 나라의 대결에서 영국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에 앞서 글로버는 1863년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 조슈번의 젊은 사무라이 다섯 명의 영국 밀항(密航)을 도왔다. 요코하마와 상하이를 거쳐 4개월 항해 끝에 영국에 도착한 '조슈(長州) 파이브'는 런던대에서 화학 등 자연과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철도 건설, 화폐 주조, 공학교육을 선도했다. 그는 또 1865년 고다이 도모아쓰를 비롯한 사쓰마번 청년 열다섯 명의 영국행도 주선했다. 이들 역시 서양 근대 문물을 배우고 귀국해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19세기 일본이 외국과 교역하면서 문물을 받아들인 단 하나의 통로

 

일본의 근대화는 지리적 이점의 산물"

 

 

 

 

  '서양으로 난 근세 일본의 유일한 창(窓)'. 규슈 서북쪽 끝에 자리한 나가사키(長崎)는 쇄국(鎖國) 시대였던 17~19세기 일본이 외국과 교역하면서 문물을 받아들인 단 하나의 통로였다. 1603년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정부의 외국 교류를 차단하고 외국 선박이 많이 드나들던 나가사키를 직할지로 지정해 무역 이익을 독점했다. 이어 1636년에는 인공섬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포르투갈인을 몰아넣었다.

 

  가톨릭 선교 활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에 반발한 일본인 가톨릭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포르투갈인을 내쫓고 인근 히라도섬에 있던 네덜란드인을 이주시켰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는 무역에만 몰두했다. 이후 1858년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데지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이 설치돼 일본과 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제 데지마는 섬이 아니다. 몇 차례에 걸친 매립 때문이다. 가로 120m, 세로 75m의 부채꼴 모양은 사라졌다. 20세기 중반 복원 계획이 세워졌지만 공사는 1996년에야 시작됐고, 원래 있던 25동의 건물 중 지금까지 10동이 복원됐다.

 

 서쪽 출입구를 통해 데지마에 들어서니 왼쪽으로 '선장(船長) 건물'이 보였다. 머나먼 바닷길을 고달프게 헤쳐온 무역선 선원들이 묵던 곳이다. 네덜란드 상관이 활동하던 200여 년 동안 이곳에 들어온 배는 모두 606척이었다. 그 뒤로는 각종 무역품의 보관 창고들이 있었고, 맞은편 건물들에는 데지마에 상주하던 네덜란드 상관장(카피탄)과 일본인 관리책임자(오토나) 등이 살았다. 데지마 상관에는 네덜란드인 20여 명이 파견됐다. 창고들을 지나 '네덜란드인 주택'으로 들어가니 이곳에서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간 난학(蘭學)을 소개하고 있었다.

 

  난학은 네덜란드(화란·和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학문·기술·문화를 가리킨다. 의학과 군사학·천문학 등이 중심이었다. 수많은 일본인이 난학 때문에 나가사키를 찾았고, 이곳에서 팔려나간 서양 서적은 18세기 말~19세기 초에만 1만 권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 어디를 가나 난학에 심취했던 지식인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사진·배드민턴·당구·맥주·커피·초콜릿·피아노 등 서양 문물도 이곳을 통해 일본에 소개됐다.

 

 

 

 

 

  작은 정원에는 상관에 의사로 파견됐던 독일인 시볼트(1796∼1866)가 선임자였던 캠베르(1651~1716)와 튄버르흐(1743 ~1828)를 위해 세운 기념비가 있었다. 데지마의 서양 의사들은 난학을 배우려는 일본인이 가장 만나고 싶어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들 세 명은 일본에 대한 연구와 저술을 통해 일본을 유럽에 알렸다. 시볼트는 데지마 밖에 의학교를 세우도록 허용받았고, 귀국할 때는 1000여 종의 일본 식물을 가져가 서양에 소개했다.

 

  개항 후에도 데지마는 서양 문물을 전하는 거점이었다. 1878년 성공회 신학교가 세워졌고, 1903년 외국인과 일본인의 교류 공간으로 나가사키 내외클럽이 들어섰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이 건물들 옆에는 나머지 상관 건물들의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네 면의 바다를 모두 드러내고 석축을 복원하여 원래 모습을 되살릴 예정이라고 한다.

 

  1859년 데지마에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상인 토머스 글로버(1838~1911)가 들어왔다. 동아시아 최대 무역회사였던 자딘 마티슨 직원이었던 그는 2년 뒤 글로버 상사를 세워 독립했다. 그리고 다시 2년 뒤 오우라 언덕 위에 일본 최초의 목조 서양식 주택을 지어 이사했다. 글로버 저택이 있던 곳은 지금 '글로버 정원(구라바엔)'으로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글로버를 비롯해서 워커·링거·올트 등 같은 시기에 나가사키에서 활동했던 영국인들의 주택과 시내 각지에서 옮겨진 학교·공공기관 등 10여 채의 서양식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로 유명한 사해루(四海樓) 앞에서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회인 오우라 성당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다시 조금 걸어가자 예쁘게 단장한 구라바엔 입구가 나타났다. 경사진 지역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경내는 곳곳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었다.

 

  구라바엔 초입의 글로버 저택은 방갈로(베란다가 딸린 단층 건물) 스타일로 글로버 가족이 사용하던 가구와 사진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일본인 아내 쓰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하나의 결혼식 사진도 있다. 1897년 영국 상인 월터 베넷과 결혼한 하나는 사업차 한국으로 온 남편을 따라 인천에 정착했고, 1938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 인천 청학동 외국인묘지에 묻혀 있다. 쓰루는 소매에 나비가 그려진 기모노를 즐겨 입었고 푸치니 오페라 '나비 부인'의 모델이 됐다고 한다.

  글로버는 뛰어난 사업가였다. 차(茶) 무역으로 시작한 그는 군비를 증강하던 사쓰마와 조슈번에 군함과 총을 공급하며 부를 축적했다. 이어 석탄 광산과 조선 산업에 뛰어들었고 맥주 회사 설립에도 관여했다. 그는 메이지 초기 일본의 산업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글로버는 상인 이상의 인물이었다.

 

  그는 격변하는 일본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는 사쓰마·조슈번 동맹의 핵심 인물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고 다카모리, 사카모토 료마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들을 지원했다. 일본 근대사를 만들어간 젊은 인재들에게 공감했던 그는 '스코틀랜드 사무라이'라고 불렸다. 일본에 귀화한 그의 아들 구라바 도미사부로(1870~1945)는 일본 수산업 진흥에 크게 기여했다.

  글로버 저택을 돌아보고 정원에 서니 나가사키만이 내려다보였다. 저 뱃길을 따라 서양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일본인들은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서양 과학자와 사업가들이 있었다. 그 시절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에 가로막힌 한반도는 이 지역에서 서양 근대 문물이 마지막 도달한 곳이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근대화는 지리적 이점의 산물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졌다는 나가사키는 바다를 통해 퍼져나간 근대 문명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본이었다.

 

 



[출처] 2016. 1. 21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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