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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수상 및 후보시

2016년 창자 21 봄 신인상 수상작 : 사막의 저녁 외 / 이선유

by 혜강(惠江) 2017. 2. 2.


<2016년 창자 21 봄 신인상 수상작>




사막의 저녁 외


이선유

 

먹빛을 거느린 밤은 왜 이리 먼가

너무 밝아 어두운 대낮의 거리는 왜 이리 아득한가

높은 빌딩은 그에게 더 큰 그늘을 안겨 줄 뿐

별이 뜨지 않는 지하방

골목에 버려진 폐지는 이곳으로 모여들고

끼니마다 한 움큼의 모래바람이 지나갔다

오래전 흩어진 가족들

이 사막에서 족적을 찾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닫힌 입처럼

귓문을 닫아버린 그의 얼굴에 그늘 꽃이 피었다

아무도 그의 비루한 앞날을 묻지 않았다

막다른 구석마다 눅눅한 옷가지들

몇 겹을 껴입고도 냉기에 떨었다

그때마다 모래바람에 눈앞이 흐려지고

그는 사구에 잠기고 있었다

늙은 낙타 한 마리

오래도록 발효된 시간을 끌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다

제 주검을 끌고

멀고 먼 오아시스로 떠나는 그 앞에

모처럼 골목이 들썩거린다


수상한 가족사

 

​한겨울 잎을 다 떨군 고욤나무

한 해 농사를 거두지 못한 채

가지마다 빽빽하게 전시 중이다

할 말이 많다는 듯

할 말이 없다는 듯

지우지 못한 마침표 허공에 가득하다

나는 한동안 하늘 밖 방점으로 서서

저 자잘한 것들의 악착을 보고 있다

풋감도 아닌 것이 곶감도 아닌 것이

절대로 가지를 놓을 수 없다고

바람을 밀어내며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다

조글조글한 과육은 이미 씨들에게 내어주고

하늘 끝이 허옇도록 떨떠름한 맛이라니

허공을 놓친 열매들 바닥에 구르고

직박구리 몇 마리 고요를 입질하는 저녁


제 허리 분질러 감나무를 껴안고

다음 생을 건너가는 저 불우한 유전자들

감씨가 왜 고욤나무에 싹을 틔웠는지

그 누구도 불편한 가계를 말하지 않는다

나이를 속이고 마흔 넘어 재가(再家)했다는

감나무 집 누이는

언제쯤 실한 자식 하나 남길 수 있을까



초록의 무늬

 


누가 다녀갔을까

연둣빛 나뭇잎에 새겨진 상형문자

쓰다 지운 흔적의 필체가 둥글다

은밀한 식탐에

숲은 얼마나 진저리를 쳤을까

잎맥이 끊어진 자리마다

어느 미물의 한 끼 식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오월의 빗방울이 찢어진 페이지를 읽고 또 읽는다

구멍으로 모음 하나가 또르르 구른다

이가 빠진 잎사귀들의 안간힘,

상처가 힘이다

잎사귀를 닮은 노모의 낡은 팬티

빨랫줄 집게가 늘어진 허리를 물고 있다

햇빛에 드러난 구멍들

본래의 문양인 듯 태연하다

내 옆구리 어디쯤 접혀있는 얼룩들

그때 온몸으로 진물을 흘렸다

가만히 꺼내보면

상처위에 밀어 올린 꽃이 더 향기로웠다

상처도 아물면 초록의 무늬가 되었다


백비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 조아리듯

푸른 솔 병풍으로 둘러쳐진 묘

가을이 다소곳이 내려앉은 상강(霜降)날 아침

빈 비문을 읽는다

몇 자 비문을 새기는 것조차

당신의 이름에 흠이 될까봐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마음 속 돋을새김

때로는 꽉 채운 문장보다 한 장의 백지가

깊은 의미를 더 하듯

침묵으로만 읽을 수 있는 바람의 필체

추상같은 유언에 눈비도 비켜갔는지

햇살에 기대어 선 말씀이 눈부시다

 

묘지 앞을 지키는 감나무 한 그루

긴 세월 풍상 속에서 비문을 해독했을까

딱따구리에게 제 몸을 둥글게 내주고

허리를 관통한 자리 허공이 푸르다

 

가지마다 붉은 촉수들

한해 농사를 점검하며

나무는 이제

목민관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중이다

가면시대

 

​불공평한 유산

그 상속이 맘에 들지 않아

대대로 내려온 유산에 손을 대기로 했다

날선 칼날에 서슴없이 얼굴을 맡기는 순간

진실이 삭제된 가면은 완성되고

이제 나는

위선의 대열에 합류했다

완벽하게 제조된 가면

이것은 견본대로 조립되는 공식이다

비슷한 가공의 우아한 표정들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고

명품가방을 둘러멘 어깨를 들썩이며

스카이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신다

진보된 의술로 포장된

무덤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현란한 전광판처럼 표정을 바꾸며

아름다운 도시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선유 

충남 청양 출생

방송대학 국문과 졸업

시옷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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