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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충북 옥천, 신록이 꽃보다 곱다

by 혜강(惠江) 2016. 5. 23.

 

 

충북 옥천

 

금강 물가서부터 올라온 신록, 꽃보다 곱다.

 

 

 글·사진 박경일 기자

 

 

▲금강에 합류하는 물길을 끼고 있는 충북 옥천 군북면 지오리 마을 언덕에 올라서 내려다본 서화천의 모습. 연둣빛 신록의 강변과 초록빛의 청보리 밭이 한데 어우러지는 강변의 짧은 비포장길로 차 한 대가 들어섰다. 보아 하니 신록의 아름다움에 홀렸던 모양이었다.

 


봄꽃이 화르르 지고 난 뒤의 주인공은 이제 신록입니다. 나뭇가지 끝에서 채도를 달리하며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여린 새순들이 꽃보다 더 화려할 때인 것이지요. 이제 숲은 하루하루 초록빛이 더 짙어지면서 황홀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입니다. 연둣빛에서 초록으로 옮겨가는 시간. 마음이 급해지는 건 신록의 시간이 꽃만큼 짧기 때문입니다.

충북의 옥천. 조선 초기 당대 최고의 글쟁이였던 서거정은 옥천 땅에 서서 붓으로 이런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높이 뜬 매인 양 천 겹 묏부리를 우러러보고, 놀란 뱀 같은 형상인 몇 굽이의 시내를 굽어본다.” 그의 시편 그대로 옥천은 깊은 산을 휘도는 금강의 물굽이가 흘러가는 곳입니다.

봄의 신록이 빚어낸 경관을 만나러 옥천으로 간 까닭은, 거기에 금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봄이면 신록은 물이 오르는 물가의 나무들부터 시작합니다. 너무 넓지 않고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강폭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징검다리 여남은 개쯤이면 건너갈 수 있는 너비의 물길에서 신록은 가장 화려합니다. 감히 말하건대 매화 피는 이른 봄의 강이 섬진강이라면, 봄의 한복판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은 바로 금강입니다.

옥천은 금강의 상류에 있습니다. 대청호에 담기기 전의 금강의 물줄기. 그러니까, 서거정이 말한 ‘놀란 뱀처럼’ 사행하는 물길이 바로 옥천에 있습니다. 그 물줄기를 따라가면서 ‘세상의 모든’ 초록의 색을 만났습니다. 연한 수채화 물감이 지나간 색감이 있는가 하면 굵은 붓으로 물감을 듬뿍 찍어서 빠르게 휘저은 것 같은 초록도 있었습니다. 강이 시작되는 곳에서 만나는 이런 신록 앞에서 어리고 순한 것들의 아름다운 시간을 생각합니다. 어리고 순한 것들이 내쉬는 여린 숨을 생각하며 그 앞에서 울컥했던 건, 그날이 마침 세월호 사고 2주기를 하루 앞둔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화천의 물길을 끼고 있는 옛 서당인 이지당. 건물 양쪽에 높이가 다른 누각이 있다. 자연을 감상하는 자리인데, 누각은 높지만 처마를 낮춰서 그곳에 드는 이의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한다. 이지당은 이른바 ‘도끼상소’로 알려진 선비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인 조헌이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 이상향의 고향이 거기 있다…옥천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충북 옥천은 어쩐지 ‘이발소 그림’ 속에 등장하는 고향의 전형적인 풍경과 닮아있다. 여기서 고향이란 저마다 나서 자란 구체적인 지역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편적인 의미로서의 고향이다. 뿌리 뽑혀 도시를 부유하는 이들이 늘 그리워하지만 정작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그저 아련한 기억 속의 목록에 담아놓았다가 도시살이가 고될 때마다 술잔을 앞에 놓고 꺼내보는 그런 고향 말이다.

아무려나 도시에서의 날품의 삶이 그나마 허리 휘는 농사일보다 편했으니 고향은 떠나왔으되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상향의 공간으로 남았다. 전형적인 고향의 풍경이 곧 이발소 그림이 되고 마는 이유다. 그나마 중년 이상의 세대들은 떠나지 못한 이들이 여태 남아있는 고향이라도 가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도시의 소음을 과연 고향의 기억으로 아련하게 추억할 것인지, 아니 그보다 허물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는 도시의 공간이 추억이 될 때까지 남아있기나 할 것인지를 생각하면 말이다.

서울에서 옥천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서 옥천IC로 나오면 금방이다. 하지만 길이 바쁘다면 모를까, 산과 들이 온통 신록으로 물들고 있는 이즈음의 옥천은, 그렇게 가는 게 아니다. 청주쯤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25번 국도를 타고 피반령을 넘어 보은을 거쳐 옥천으로 가는 길을 잡는 것이 몇 배쯤 낫다. 그게 너무 멀리 도는 길이라면 경부고속도로에서 당진∼영덕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회인IC로 나와서 수리티재를 넘어가는 것까지는 양보할 수 있다. 수리티재를 넘어서 보은과 옥천을 가르는 고갯마루 위에서 옥천 땅을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산자락의 능선과 능선이 겹쳐지는 이 풍경이야말로 서거정이 붓으로 그려낸 ‘천 겹 묏부리’다. 몇 개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한적한 이 길은 시간도 더 걸리고 속도도 낼 수 없지만, 빨리 질러가면 볼 수 없는 아늑한 시골 마을의 고향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빨리 질러가느라 놓친 것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 가장 아름다운 신록을 두른 강…금강



옥천에서 만나는 고향의 풍경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빛날 때가 바로 신록이 물들기 시작하는 이즈음이다. 가보지 않은 이라면 말할 수 없다. 딱 이맘때의 금강을 이루는 물줄기가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신록을 두르고 있는지를…. 지도를 펼쳐보면 옥천 땅에서 금강을 이루는 상류의 물줄기는 마치 뱀의 형상과도 같다. 대청호의 거대한 물그릇으로 옥천 땅에서 급격히 사행(蛇行)하는 물줄기들이 담긴다. 금강의 본류는 말할 것도 없고, 서화천, 금천천, 보청천, 안남천의 물길이 대청호로 흘러드는데, 그 물길이 이룬 습지에는 지금 물오른 나무들이 빚어내는 신록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색감으로 빛난다.

옥천의 금강 상류 물줄기 가운데 가장 급격하게 사행하는 것이 서화천이다. 옥천 땅에서 금강의 본류가 그렇듯, 서화천의 물줄기도 옥천읍을 감아 돌고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서화천 물줄기의 신록을 겨눠서 찾아가는데 기억해둘 이름이 ‘지오리’다. 서화천에서 그림 같은 강변을 따라가는 여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지오리는 주민이래야 56가구 100여 명이 고작인 자그마한 마을이다. 여느 농촌 마을이 그렇듯 마을을 지키고 있는 건 죄다 노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그곳에서 나서 그곳에서 죽는 마지막 세대들. 그럼에도 그들은 물길 저 아래 대청댐이 들어서기 전의 마을의 옛 모습을 그리워했다. 고향에 있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셈이었다.

지오리 주민 유선열(85) 씨는 물길 아래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 서화천의 물이 얼마나 깨끗했으며, 마을 풍경이 근사했는지를 두고 한참을 설명했다. 봄볕 아래 의자를 내놓고 모여 앉은 마을 노인들은 다들 강변의 모래밭에서 씨름을 하고, 천렵으로 메기며 쏘가리, 마주(모래무지) 따위를 잡아 가마솥에 관솔가지를 때서 매운탕을 끓여 먹던 맛을 잊지 못했다.

 


# 신록 속의 서당에서 만난 선비의 정신



서화천이 굽이치는 지오리 마을 뒤에는 불쑥 솟은 동산이 하나 있다. 산이라기에는 어림없고, 언덕이라 하기에는 좀 높은 곳인데 여기 올라서 굽어보는 서화천의 물길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발아래로 크게 U자로 굽이치는 물길 주변으로는 제법 너른 청보리밭이 펼쳐져 있는데, 청보리밭을 마당 삼은 농가에 배꽃과 복사꽃이 만발했다. 물가 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의 활엽수와 수변의 버드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색감의 연둣빛으로 물들고 있다. 물길 옆으로 수질개선을 위해 조성한 생태 습지 수면 위로 구름이 담겼다. 물길을 따라 이어지는 짧은 비포장도로로 승용차 한 대가 들어왔다. 누군지 몰라도 필시 연둣빛 봄 풍경에 홀려서 그랬으리라.

지오리에서 서화천 물길을 잠깐 따라가면, 물 건너로 양쪽에 누각을 거느린 한옥이 나온다. 서화천의 물과 강변의 신록이 어우러진 봉긋한 구릉에 세워진 이 멋진 건물이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조헌이 낙향해 후학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이지당이다. 서당의 훈장이었던 조헌의 이름에서는 ‘지부상소(持斧上疏)’, 그러니까 ‘도끼상소’부터 떠올리게 된다. 도끼를 들고 대궐에 나가 시국이 어지러움을 비판했을 정도였으니 보통 배포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고향은 본래 김포였으나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의 인연으로 이곳에 낙향해 후학을 가르치던 조헌은 임진왜란이 나자 의병장으로 나섰다가 금산성에서 의병 700명과 함께 전사했다. 이웃 금산의 칠백의총이 바로 그가 의병과 함께 묻힌 무덤이다.

본래 이지당의 이름은 서당이 있던 지명을 따서 지은 각신서당이었다. 그러던 것을 훗날 우암 송시열이 조헌의 기개와 삶을 기려 이지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이지(二止)란 ‘두 개의 그칠 지(止) 자’란 뜻인데, 산이 높으면 우러름을 ‘그칠’ 수 없고, 큰 행실도 ‘그칠’ 수 없다는 뜻이다. 서당은 양쪽 끝에 앉아서 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높이가 다른 누각을 앉혔는데, 누대는 높지만 허리를 세우기에 높이가 낮게 만들어져 있다. 아마도 자연을 즐기되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교육공간의 엄격함이 건축으로 드러난 것이리라.

 



▲충북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의 부소담악. 막대풍선처럼 물 위로 길게 뻗어 나간 석벽의 지형으로 이뤄진 곳이다. 대청호의 수위가 더 낮아지면 위용이 더 당당해진다.


# 부소담악의 절경에서 만난 고향의 그리움



이지당 쪽으로 서화천을 건너는 다리 ‘이지당교’를 넘어서면 길은 곧 물길을 버리고 숲길로 오르게 된다. ‘옥천 부소담악 자전거길’ 안내판을 따라가는 길이다. 자전거길이라지만, 도로를 활용한 길이어서 차가 드나드는 건 제한이 없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이내 고리산(환산·581m)의 허리쯤으로 놓인 길에 올라서게 된다. 이 길에서는 서화천 물줄기가 저 멀리 굽이치는 모습이 바라보인다. 물줄기를 따라 청보리밭의 초록이 따라간다.

벚꽃잎 흩날리는 이 길 위에서 드문드문 만나는 마을마다 어찌나 푸근해 보이는지 아예 서화천이 바라다보이는 자리를 골라 이쯤에다 집을 짓고 살고 싶어질 정도다.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도 여기서만큼은 누추하지 않고 꽃과 신록에 어우러져 정감 어린 풍경을 만들어냈다. 비탈진 산 사면에 배나무를 심어 기르는 ‘고리산 배밭 농원’에는 배꽃이 만개했고, 울안에 심어둔 복숭아나무에는 분홍빛 복사꽃이 꽃등처럼 환했다. 그래, 마음에 담아두고 그리울 때마다 꺼내보는 고향이라면 적어도 이런 모습이어야 하리라.

길은 곧 추소리로 이어진다. 추소리는 길 아래쪽 서화천이 대청호와 만나는 물가에 들어선 마을이다. 추소리에는 부소담악이 있다. 부소담악은 서화천 물길이 가장 급격하게 몸을 뒤치는 곳에 이뤄진 700m 길이의 석벽이다. 가늘게 반대로 이어진 석벽이 마치 막대풍선을 불어놓은 형상이다. 부소담악의 석벽 가운데 난 오솔길이 정자 추소정과 부소정을 지나 석벽의 끄트머리까지 이어진다. 물길이 석벽 끝을 감고 돌아가니 오솔길의 좁은 목에 서면 오른쪽의 물과 왼쪽의 물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추소마을에는 누군가 세워둔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순치’란 호를 쓰는 이가 1994년에 세워둔 비석인데 비석의 글귀가 기리는 건 고향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글이 이랬다. “갑술생인 순치가 갑술년을 맞아 내가 나고 자라던 옛집에서 자고 나면 바라보며 감상했던 앞산과 서화천이 그리워 단풍나무 600주를 마을 청년 10여 명과 식재하여 부소담악 산천이 더욱 풍광스럽게 보전되기를 향인으로 바랄 뿐이다.” 그의 고향은 대청댐 건설로 수몰된 마을이었을까. 사라진 고향 집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나마 달랬던 것일까.

 

 

# 옥천의 강변에서 만나는 신록의 은유



옥천의 금강 변 신록을 볼 수 있는 곳이 어찌 서화천뿐일까. 경관에 시선을 뺏겨 지오리부터 여정을 시작하느라 지나친 구진벼루 이야기부터 마저 하고서 둘러보자. 지오리 위쪽의 서화천 상류 쪽에는 구진벼루가 있다. 옥천IC에서 가까운데 변변한 안내판은 없지만 물길을 짚어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구진벼루는 한쪽이 석벽으로 이뤄진 천변인데, 여기가 바로 1500여 년 전 백제 성왕이 신라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 곳이다. 백제 성왕은 신라와 맞선 관산성 전투에 나선 아들 창을 위로하러 근위병을 이끌고 갔다가 기습을 받았고 구진벼루에서 갖은 모욕을 당한 뒤에 목이 베어졌다. 웅진에서 부여로 천도하면서 백제 부흥을 이끌려던 성왕의 꿈이 바로 이 자리에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옥천에서 보드라운 신록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곳이 이원면 이원대교 부근의 지탄역 쪽에서 상류 쪽으로 이어지는 금강 둑이다. 지탄리에서 강변의 길은 곧 끊기지만, 길이 끊긴 자리에서 보는 금강과 거대한 강변에 습지를 이룬 버드나무 신록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은 탄성이 나올 정도로 훌륭하다. 지탄리에서 가까운 ‘옥천학생야영장’ 앞의 금강 변에서는 강 건너편 신록의 숲이 강물과 어우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다 또 한 곳. 동이면 적하리 강변도 빼놓을 수 없다. 음식점 상호인 ‘탐강’의 이름을 차량 내비게이션에 찍어서 찾아가면 너른 자갈밭 너머로 연초록의 강변 마을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는 금강물이 찰랑찰랑 넘치는 보 위를 차를 타고 넘어서 강 건너 마을까지 들어갈 수 있다.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이즈음에 금강을 찾아간다는 건, 여리고 순한 마음을 찾아가는 일이다. 자연의 은유와 상징 속에서 떠나기 전의 고향 마을과 여린 것들의 보드라운 마음을 본다. 그 앞에서 지나온 것들과 새로 시작하는 것들,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것들을 생각한다. 이제 4월의 한복판을 지나간다. 벌써 두 해가, 누군가에게는 이제야 두 해가 지났다.


 

묵을 곳, 먹을거리

 

◇어디서 묵을까 = 옥천은 숙소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옥천 구읍의 춘추민속관(043-733-4007)은 150년 된 한옥으로 독립운동가 김규홍의 생가인 고택인데 한옥체험 민박으로 방을 내준다. 주말 4인 기준 8만 원. 옥천관광호텔(043-731-2435)과 결혼식장을 부대시설로 운영하고 있는 명가모텔(043-733-7744)이 그중 나은 편이다. 가장 최근에 지은 타워팰리스모텔(043-731-0814)도 깔끔한 편이다.

◇무엇을 맛볼까 = 옥천 구읍에는 60년 된 구읍할매묵집(043-732-1853)이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지금의 자리에 문을 열었다. 지난 2009년 주인 할매가 사망한 뒤 막내아들 내외가 전수받아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들이 주워온 도토리를 사서 쓴다. 금강을 끼고 있는 옥천에서는 올갱이(다슬기)국밥도 빼놓을 수 없다. 문 연 지 30년이 넘은 미락올갱이(043-733-4845)와 금강올갱이(043-731-1988)를 알아준다. 다슬기를 씹다 보면 모래 같은 것이 씹힐 때가 있는데, 그건 다슬기 새끼다. 처음에는 모래를 씹는 듯하지만, 씹을수록 부드러워지고 쌉싸름한 맛 뒤에 단맛이 난다. 생선 국수는 청산면의 선광집(043-732-8404)과 옥천읍의 대박집(043-733-5788)이 잘한다. 선광집은 50년 넘게 전통을 이어가는 곳이다. 마주(모래무지) 조림을 내는 금강나루터가든(043-732-3642)도 빼놓을 수 없다. 냄비에 무, 시래기를 깔고 모래무지를 올린 뒤 양념장과 파, 고추 등을 얹어 조려 낸다.

 

 

<출처> 2016년 4월 20일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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