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 및 정보/- 미국. 캐나다

스탠퍼드대학교, 연구 중심 대학으로 우뚝 선 미국 명문 사립대학

by 혜강(惠江) 2015. 5. 18.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연구 중심 대학으로 우뚝 선 미국 명문 사립대학

 

 

·사진 남상학

 

 

 

 

  

   미국 최고의 사립대학교 중 하나인 스탠퍼드대학교(Stanford University, 이하 스탠퍼드) 구경하기로 한 날은 날씨가 쾌청했다. 스탠퍼드는 캘리포니아 주 실리콘밸리 북쪽, 소도시 스탠퍼드 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호세에서 승용차로 불과 40분이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약 50km 떨어져 있다

 

 

* 붉은 타일 지붕이 인상적인 스탠퍼드 대학 건물이 푸른 잔디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보인다. 잔디광장의 중앙의 꽃으로 장식된 화단에는 'S'자가 선명하다. *

 

 

   약 9백만 평이나 되는 넓은 터를 차지한 이 학교 건물은 뉴욕 시에 있는 센트럴 파크를 설계한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 건물은 오래된 캘리포니아 교회 건축물과 비슷한 스타일로 넓은 회랑과 개방형 아치, 붉은 타일 지붕이 얹혀 있는 낮고 긴 건물이며, 부드러운 황갈색 사암(砂岩)으로 되어 있다.

 

  또 수많은 종려나무와 지중해식 붉은 기와지붕의 나지막한 건물들로, 이 학교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으며, 학교라기보다 고급 리조트 같은 인상을 주는 캠퍼스를 보유한다. 

 

 

 

                         * 후버탑 위에 올라 바라본 스탠퍼드대학교의 모습 *

 

 

   스탠퍼드대학교는 철도왕이며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1824~1893)에 의해 1891년에 설립되었다. 그는 란초 샌프란시스코(Rancho San Francisco) 지역의 650 에이커의 토지를 매입하여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거대한 말 목장을 운영하였는데, 훗날 이 말 목장이 오늘날의 스탠퍼드대학교의 캠퍼스가 되었다.  

 

   그가 학교를 설립하게 된 동기는 그의 외아들의 사망과 관련이 있다. 1884년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 중 그의 아들이 15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사망한 아들을 기리기 위해 "캘리포니아의 젊은이들을 모두 나의 자녀로 삼겠다"는 계획 아래 6년간의 공사 끝에 1891101555명의 남녀학생들로 스탠퍼드대학교를 개교했다.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딴 릴런드 스탬퍼드주니어 대학교(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이라 이름하였다가 지금은 '스탠퍼드대학교' 또는 '스탠퍼드'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릴런드 스탠퍼드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逸話)가 전해지고 있다   

 

 

* 릴런트 스탠포드 부부와 쥬니어 * 

 

 

   “어느 날 빛 바랜 줄무늬의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허름한 홈스펀 양복을 입은 남편이 보스턴에서 기차를 내려 약속도 없이 하버드대학교 총장의 사무실로 어릿어릿하며 걸어 들어갔다. 총장 비서는 이 사람들을 보자마자 시골촌뜨기 부부가 하버드는 물론이고 케임브리지에서조차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남자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꺼냈으나 "총장님은 오늘 하루 종일 바쁘실 것입니다." 라며 비서가 총장과의 면담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면 기다리겠습니다" 부인이 대답을 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자 당황한 비서는 총장에게 "잠깐만 만나주시면 곧 갈 것입니다"라고 알렸다. 총장은 마지못해 그런 사람들과 만나 시간을 낭비할 수 없고, 이들의 행색으로 인해 사무실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이 싫어서 굳은 표정으로 위엄을 부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부인이 총장에게 말했다. "우리에겐 하버드에서 일 년 간 다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애는 하버드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학교생활에 무척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약 일 년 전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제 남편과 저는 캠퍼스 내에 그 애를 위한 기념물을 하나 세웠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총장은 퉁명스레 말했다. "부인, 우리는 하버드에 다니다 죽은 사람 모두를 위해 동상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곳은 아마 공동묘지같이 보이겠지요." "아니요 동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버드에 건물을 하나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총장은 이들 부부에게 소리를 높여 말했다. "건물이라고요? 건물 하나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재 하버드에는 750만 달러가 넘는 다수의 건물들이 들어 차 있습니다." 이들 부부가 아무 말이 없자 총장은 이제야 그 사람들을 보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뻐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얼굴을 돌리고 조용히 "대학교를 하나 설립하는데 비용이 그것밖에 안 드나 보죠. 그러지 말고 우리들의 대학교를 새로 하나 세우지 그래요."라고 말했다. 부인의 말에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총장의 얼굴은 혼돈과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이 부부 스탠퍼드 리랜드 씨 내외는 곧장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Palo Alto)를 향한 여행을 떠났고, 거기에서 아들을 기념하기 위해 자기들의 이름을 딴 스탠포드를 설립하였다. 이를 뒤늦게 안 하버드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는 글귀가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사람을 보는 기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설립된 스탠퍼드는 현재 연구 중심 사립대학으로, 2010년 기준 문리·공학·지구과학·교육·경영·법학·의학 7개 단과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제공한다.

 

   학부과정에서는 물리학, 경제학, 공학, 철학, 영어, 심리학, 정치학, 대학원 과정에서는 영어, 경제, 역사, 정치학, 심리학, 사회학 부문의 수준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창의적 사고, 문제해결 능력 향상, 연구방법론 제고 등이 스탠퍼드에서 가장 중시하는 교육의 목적이다.

 

 

  

 

* 스탠퍼드의 건물은 오래된 캘리포니아 교회 건축물과 비슷한 스타일로 넓은 회랑과 개방형 아치, 붉은 타일 지붕이 얹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탠퍼드대학교 안의 성당(Personal Parish)은 산호제(San Hose) 교구에 속하는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맡고 있다.  

 

 

* 큰아들 남석우가 미국에 들어왔을 대 다시 방문하여 촬영한 사진 *  

 

 

 

 * 스탠퍼드 내에는 후버탑, 스탠퍼드 내에는 스탠퍼드를 졸업한 허버트 후버에 의해 설립된 전쟁·혁명·평화 연구소가 있다. *

 

 

* 후버탑을 배경으로 손을 번쩍 치켜올린 손자 남기찬 *

 

 

* 로댕의 조각 작픔들이 들어찬 스탠퍼드대학교 정원 * 

 

 

   캠퍼스에는 700개가 넘는 건물이 있으며, 메모리얼교회, 스탠퍼드 영묘, 후버탑 같은 상징적 건물과 윌리엄 웨트모어 스토리(William Wetmore Story)의 조각작품 슬픔에 잠긴 천사, 로댕조각정원, 파푸아뉴기니조각정원이 유명하다.

 

   또, 해-허니콤 하우스(1937), 1차 세계대전 중 스탠퍼드를 졸업한 허버트 후버에 의해 설립된 전쟁·혁명·평화 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에는 20세기의 국제관계에 관한 100만 건이 넘는 인쇄물 및 필사본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루 헨리·허버트후버 하우스는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다.

 

    또 스탠퍼드는 1961년에는 미국 의회가 원자력위원회와 계약하여 11,400만 달러를 조성하여 3.2길이의 입자가속장치를 설치하고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를 설립했다. 주 캠퍼스에서 144km 떨어진 몬테레이 만의 퍼시픽 그로브(Pacific Grove)에 홉킨스 해양연구소(Hopkins Marine Station:1892)가 있다.

 

    부설시설로는 그린도서관·메이어도서관을 비롯한 여러 도서관, 550개가 넘는 병상을 갖춘 부속병원, 캔토시각예술센터, 미술관, 후버전쟁·혁명·평화연구소, 선형가속기센터, 프리먼스폴리국제학연구소, 식품연구소 등이 있다.

 

 

 

 

  

   스탠퍼드는 최상위권 우수 대학의 전통적인 진지함에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이국적인 정취가 혼합된 대학이다. 미국의 대부분 주요 대학에 비하면 설립 역사가 짧으나 '금세기의 가장 성공한 대학'으로 묘사되고 있을 만큼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학교이다.

 

  2011년 현재 <포브스>, <워싱턴먼슬리> 등이 발표한 미국 대학 순위에서 각각 5위와 4, 영국의 글로벌대학 평가기관 QS가 발표한 세계대학 순위(QS World University Ranking)에서 11, <타임스> 세계대학 순위와 상하이자오퉁 대학의  ARWU 세계대학 순위에서 각각 2위를 기록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명문대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 아내와 둘째아들 남경우, 손녀 가연이, 현지 *

 

 

* 잘 단장된 잔지밭을 밟자마자 초등학교 2, 3학년 손녀가 신이 나서 덤불린을 하고 있다.  따스한  햇볕에 학생들이 운동을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다. *

 

     

* 두 번째 방문 때 스탠퍼드 기프트 샵에서 구입한 축구공, 손자 손녀들 * 

 

 

    학부 재학생 중 동양계 학생(동양계 미국인 및 유학생 포함)25% 정도이며 이 중 한국 학생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입학생의 90% 이상은 출신 고등학교에서 상위 10%에 드는 우등생들이며, 전체의 75% 이상이 평균 학점 4.0 이 넘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탠퍼드는 학생들을 위한 재정지원 또한 최고 수준이다. 학생 가정의 연간 수입에 따라 수업료 외 기숙사비까지 면제 받는다.

 

 

* 스탠퍼드대학교 박물관 앞의 조각상 *

 

 

*스탠퍼드대학 에 세워진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 조각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막내  귀요미 남현지 * 

 

 

    <칼레의 시민> 은 조각가 로댕(Rene-Francois-Auguste Rodin: 1840 - 1917)이 제작한 조각으로, 1347년 프랑스의 북부 해안도시 칼레 시가  영국에 의해 포위되었을 때 시민들을 위해 밧줄에 목을 매어 처형받기로 자원한 6명의 칼레시민들을 조각한 작품이다.


  1347년 도버해협 양쪽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때, 1년 가까이 영국의 공격을 막던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는 원병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칼레시의 항복사절은 도시 전체가 불타고 모든 칼레의 시민이 도살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였는데,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항복의 조건을 내 놓았다. "칼레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으니, 그러나 누군가는 그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 도시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대표적인 시민 대표를 골라  교수형에 사용될 밧줄을 목에 걸고  맨발로 영국군 진영으로 가서 도시의 열쇠를 건넨 후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때 용감하게 6명이 선뜻 나섰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이며 절정의 삶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이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자원했다.  

 

  그러자 시장이 나섰고, 그의 아들도 나섰다. 드디어 일곱 명이 되었다. 한 사람은 빠져도 되었는데, 누구도 빠지기를 원치 않았다. 제비를 뽑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생피에르는 "내일 아침 장터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 고 제의했고 이에 모두 동의하였다. 그들의 고통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고, 이튿날 이른 아침 여섯 명이 모였다. 그러나 생 피에르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궁금했다. 모두 안 나와도 그는 나올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음을 자원한 사람들의 용기가 약해지지 않도록 칼레의 명예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처형되려던 마지막 순간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기독교도였던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려주었다. 그로부터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市는 이들의 용기와 헌신을 기리기 위해 생피에르에 조각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조각가 로댕에게 의뢰하였는데, 이 작품이 바로 <칼레의 시민들>이다. 이 조각은 1895년 6월 3일 제막되었다.

 

  비장한 슬픔으로 얼룩진 이 조각상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스탠퍼드는 스탠퍼드 사망 이후 한때 재정난을 겪었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캠퍼스가 막대한 피해를 입어 큰 위기에 처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대학의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학장이 교수, 졸업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지역산업을 육성하고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창업하도록 독려함으로써 오늘날 실리콘밸리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대학 출신 교수와 졸업생들이 창업한 세계적인 기업으로는 시스코시스템스, 구글, 야후, 휴렛팩커드, 넷스케이프, 실리콘그래픽스, 선마이크로시스템스 등을 포함해 수없이 많다 

 

 

* 자유분방함을 추구하는 학생들답게 대학생들이 놀이에 열심이다. * 

 

 

   지금까지 58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이 학생이나 교수로 스탠퍼드를 거쳐갔으며, 졸업생 또는 교수로 노벨상을 수상한 대표적인 사람은 마이클 스펜스(2001, 경제), 올리버 E. 윌리엄슨(경제), 리처드 테일러(1990, 물리)가 있다.

 

  또 이 대학 출신의 명사로는 미국의 31대 허버트 후버 대통령, 죠지 슐즈 전 미국 국무장관 역임한 윌리엄 페리,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 작가 존 스타인 백, 마이클 커닝햄 존스 홉킨스대의 윌리엄 브로디 총장, 시라큐스대의 낸시 캔토 총장, 보스턴대의 윌리엄 레이히 총장, 예일대의 리차드 레빈 총장, 애리조나대의 피터 리킨스 총장, 골프선수 타이거 우즈 등이 있다.  

 

   한국의 경우,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 홍석현 전 주미대사 중앙일보회장, 남충희 전 부산광역시 정무부시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 일가와 LG가의 상당수를 비롯하여 500여명 스탠퍼드 출신이며, 이 가운데 박사학위 소지자가 250명이 넘는다 

 

 

 

 

  캠퍼스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기프트 샾에 들러 스탠퍼드 마크가 부착된 모자 하나를 스탠퍼드  방문 기념으로 샀다.  그리고 스탠퍼드박물관에서 전시된 작품을 감상했다. (박물관 전시 작품 소개는 별도로 올릴 예정입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