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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경북. 울산

예천 선몽대, 노송 울창한 경승지

by 혜강(惠江) 2015. 4. 28.

 

예천 선몽대, 노송 울창한 경승지

 

경북 예천군 호명면 선몽대길 74, 백송리 74 / 054-654-3801

 

글·사진 남상학  

 

 

 

 

 

  선몽대(仙夢臺)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에 있는 내성천(乃城川) 남쪽 암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 울창한 노송 숲과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절경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노송이 울창하다. 낙동강으로 닿은 내성천 줄기 옆을 굵은 줄기의 소나무들이 마중하듯 울창하게 서 있다. 성인 한 명이 두 팔로 안을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노송들이다. 선 선몽대 숲은 수해와 바람으로부터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된 보호림 또는 비보림(裨補林: 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으로, 소나무와 함께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우암이 1563년 선몽대를 지었으니, 송림의 역사는 대략 450년을 헤아린다. 소나무숲은 천변을 따라 150m 정도 넓고 길게 조성되어 있다.

 

송림에는 두 개의 비(碑)가 있다. 하나는 ‘선대동천(仙臺洞天)’이라 새겨진 비다. ‘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산하호대(山河好大)’로, ‘산이 좋고 하천은 크고 길다’라는 의미다. 송림이 끝날 무렵 우암의 기념비가 있고, 멀지 않은 천변에 선몽대가 보인다. 선몽대는 우암산이 내성천으로 뛰어드는 벼랑에 있다.

 

선몽대 일원은 하늘이 내린 선경이 뭔지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찾아와 시를 주고받던 곳이며, 강과 함께 숨 쉬어온 역사문화 지리서의 중요한 한 장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내성천의 강물과 10리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이 역사적 유래가 깊은 선몽대와 숲과 함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곳으로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경승지로 평가”되는 곳이다.

 

 

우암 이열도 유적비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꿈을 꾸고 난 후 1563년(명종18)에 창건한 정자로, 제일 처음 퇴계 이황이 63세 때 누각의 창건을 축하하러 와서 선몽대라 이름 짓고 대호 석 자를 친필로 쓴 다음, 한시 칠언시를 지어 남겼다. 제목은 ‘기제선몽대(寄題仙夢臺)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붙이다’이다. 


   노송고대삽취허(松老高臺揷翠虛)  
   백사청벽화난여(白沙靑壁畵難如)  
   오금야야빙선몽(吾今夜夜凭仙夢)  
   막한전시진상소(莫恨前時趁賞疏)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흰 모래와 푸른 절벽, 그리기도 어렵네 
   내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퇴계 선생이 위와 같이 칠언절구를 남기자 그 뒤를 이어 종손인 우암 이열도, 약포 정탁, 금계 황준양,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중원 최진방 등이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를 남겼다. 먼저 유성룡(중종37∼선조 40)의 시부터 세 사람의 시를 차례로 소개한다.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호는 서애이다. 이황의 제자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권율 등을 추천하여 나라를 구하는 데 힘썼다. 군사를 기르고 무기를 만들며 성을 쌓는 등 국방을 철저히 하였다. 문장·글씨·덕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저서에 <서애집〉<징비록〉등이 있다.

 

  고대등조약빙허(高臺登眺若憑虛)  
  어조생애아불여(漁釣生涯我不如) 
  화락반정춘사만(花落半庭春事晩)  
  벽렴송영갱소소(碧簾松影更蕭疎)  
  
  높은 대에 올라서 보니 허공에 기댄 것 같구나
  고기 잡고 낚시질하는 삶, 나는 그러하질 못했네
  꽃이 떨어져 뜰의 반을 채우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고요하고 쓸쓸하도다


   다음으로 학봉 김성일(중종33∼선조 26)의 시를 보자.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와서 일본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반무송음도벽허(半畝松陰倒碧虛) 
   옥호금일흥하여(玉壺今日興何如) 
   빙군갱청유선구(憑君更聽儒仙句) 
   편각진연입지소(便覺塵緣立地疏) 

   넓다란 솔 그늘이 푸른 허공에 기울어져
   술 마시는 오늘의 흥취가 어떠한가
   그대로 인해 유(儒)와 선(仙)의 시구를 다시 들으니
   문득 속세 인연이 이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


  다음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의 시다. 김상헌은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 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조선후기 세도가의 직계선조로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사백천명담약허(沙白川明澹若虛) 
 옥산경포교하여(玉山瓊圃較何如) 
 선구만리응난도(仙區萬里應難到) 
 내왕사정차막소(來往斯亭且莫疎) 

 모래는 희고 내가 밝아 맑기가 텅 빈 것 같으니
 옥산과 구슬 가득한 정원에 비교하면 어떨까
 만리 되는 신선의 땅에 이르기 응당 어려울 테지만
 이 정자에 오고감을 또한 성글게 하지 말자

 

 




  이들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하여오고 있으나 도난 방지를 위해 원본은 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이고 현재 선몽대에서 볼 수 있는 편액들은 복제본이다. 

  붕괴 위험 탓에 보수 중인 선몽대엔 직접 못 올라간다. 대신 관광객을 위해 새로 만든 누각에 오르면 선몽대 솔숲과 내성천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선몽대 일대(명승 제19호)는 풍수학적으로 평탄한 모래 위에 앉은 기러기가 앉은 평사낙안(平沙落雁)형 지형이다.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의 백사장이 한눈에 들어오고, 대 아래에는 가늘고 긴 냇물이 굽이쳐 흐른다.  맑은 천 아래 모래가 체로 친 듯 보드랍게 깔려 있다. '선몽대 명사십리라!' 모래사장이 원근의 소실점을 그리며 낙동강 쪽으로 한없이 뻗어 있다. 한 폭 풍경화 가운데 왜가리와 백로 한 쌍이 한가로이 먹이를 찾고 있다. 굳이 문학소녀, 청년이 아니라도 시심이 자연스럽게 동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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