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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읽고 싶은 시

그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by 혜강(惠江) 2014. 5. 9.

▲완도타워 2층에 걸린 송수권의 시 <그 적막한 바닷가>


그 적막한 바닷가  

 

 

- 송수권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바삐 서녘 하늘을 채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


- 송수권 <그 적막한 바닷가>


더러는 비워놓고,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완도타워에서 다섯 번째 희망편지를 띄웁니다. 침묵의 바다가 원망스러워 산 언덕으로 올랐지만 여전히 적막한 마음을 달랠 수 없습니다. 전망층에서는 다도해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오른쪽으로 소안도, 보길도, 노화도, 횡간도, 흑일도가 보였습니다. 진도 참사 현장은 아마도 횡간도와 흑일도 사이 그 너머 먼 바다인 듯싶습니다.

밝혀진 진실은 우리를 너무 놀라게 합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 엄청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사실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그들을 믿고 배를 탄 것이 어리석었던 것일까요? 이런 생각을 하니 적막감은 격분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참으며 타워 2층으로 내려와 전시벽에 걸린 송수권 시인의 시 <적막한 바닷가>를 읽었습니다.

행여 뒤질세라, 빼앗길세라,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탐욕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는 그들이 원망을 넘어 가련하고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 가련한 모습이 오직 그들만일까요? 나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왔던가요? 생각해 보니 이 글을 쓰는저 자신도 마찬가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보다 더 가지려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남보다 권력을 가지려고 더러운 욕망과 탐욕으로살아온 우리. 그래서 진실이 감춰지고, 거짓이 횡행하고, 속임수가 판을 치고, 사회가 혼란해졌습니다.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찬 우리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완도타워 2층에서 발견한 <그 적막한 바닷가>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라고. 이 말이 오늘은 잠언(箴言)처럼 내 귀에 속삭입니다. 시인은 우리의 적막한 마음을 예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더럽고 추악한 욕망과 탐욕을 버린다는 뜻일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야 세속에 물든 순수(純粹)를 비로소 명철하게 바라볼 수 있고,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비로소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간 본연의 진정성, 참다운 인생의 지혜, 바른 삶의 행로는 비워진 마음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온전히 비워놓고 고요히 바라볼 때, 양심과 진실, 꿈과 사랑, 희망과 평화 등의 ‘그리움’같은 소중한 가치가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어서 그는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 또는 바삐바삐 서녁 하늘을 깨워가는 / 갈바람소리에 / 우리 으스러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 캄캄하게 저물 일이다.”라고 일깨워 줍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잠깐입니다. 그 잠깐 인생이 끝나는 순간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부(富), 명예, 권력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마지막 바닷가, 캄캄한 밤이 오기 전에 “우리들 적막한 마음이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 “서녘 하늘을 깨우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지도록” 열정(熱情)으로 온몸을 불태워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바로 오늘 이 순간, 그리고 우리 삶이 지속되는 그날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을까요?
(완도에서 남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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