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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쉴러와의 첫 만남 / 괴테

by 혜강(惠江) 2014. 1. 11.

<수필>

 

쉴러와의 첫 만남

 

괴테

 

  급진전을 이룬 실러와의 관계는 만년에 나에게 행복을 마련해 준 가히 최상의 것으로 손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내 모든 욕구와 희망들을 압도했다. 나는 이 유익한 일이 식물의 변형론 연구 덕이라 믿는다. 이로 인해 오랫동안 그와 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오해가 없어졌던 것이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일어났던 일에 구애됨이 없이 온갖 예술 분야에서 보다 명료하고 순수한 자아를 형성시키려 했던 이탈리아에서의 귀향 이후로 나는, 그 대단한 명성을 떨치며 점점 영향을 끼치는 최근의 문예 작품이나 옛 문예 작품이 유감스럽게도 극도로 역겨운 것들임을 깨달았다. 이를테면 하인제의 <야드링겔로>와 쉴러의 <군도>가 그것이다. 전자는 감성과 혼란된 정신 자세를 조형 예술을 통해 고상하게 보이고자 하는 겉치레가 싫었고, 또 후자는 힘차긴 하나 미숙한 재능을 가지고, 내가 순화시키고자 노력했던 바로 그 윤리적이며 극적인 패러독스를 격동적으로 조국 위에 쏟아 붓는 것이 싫었다.

  나는 천재적인 두 사나이가 시도하여 그 성과를 거두었던 것을 못마땅해 하진 않았다. 인간은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활동하려는 의지를 단념할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그들은 처음엔 무의식적으로 교양 없이 시도했다가, 그 다음은 형성의 매 단계마다 점점 더 의식적으로 시도했다. 그리하여 세계 위로 그같이 매우 걸출한 것과 진부한 것이 확대되고, 혼란에서 또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조국에서 일어난 요란스러움, 즉 열렬한 학생이나 교양 있는 귀부인들이 일반적으로 온갖 신기한 산물에 보내는 갈채는 나를 아연케 했다. 내 모든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대상들과 이를 위해 나 자신을 형성했던 방식들은 내게서 제거되거나 마비된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것은 나와 관련된 모든 친구들 하인리히 마이어, 모리츠, 또 친구처럼 지내는 미술가 타쉬바인과 부리가 내 보기에 똑같이 위태로운 것 같았다는 점이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가능하다면 조형 예술의 고찰, 시 예술의 활용을 기꺼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독창적인 가치와 생동하는 형태의 창조를 능가하는 전망은 어디에 있는가? 내 마음 상태를 생각이나 해 보라! 나는 가장 순수한 직관의 내용을 키워 주며 전해 주고자 애썼지만, 그 결과 고작 아르딩겔로와 프란츠 모르 사이에 끼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역시 이탈리아에서 귀향하여 오랫동안 내 집에서 머물렀던 모리츠는 나와 함께 열정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확신하게 이르렀다. 그런데 나는 비이마르에 체류하면서 내 이웃에 살았던 쉴러를 피했다. <돈 카를로스>의 출판으로 나는 그와 가까워지기가 싫었다. 나와 이미 가까웠던 사람이나 그에 관한 소식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모두 그만둔 채 나는 그와 한동안 나란히 거리를 계속 두고 살아 나갔다. 그가 쓴 논문 <우미와 숭고>는 우리를 화해시키는 수단이 되지 못했다. 주관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높이 올려 주는 칸트 철학을 그는 기뻐하면서 자아 속에 받아들여다.

  칸트 철학은 자연이 자신의 본질 속에 두었던 비범한 것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최고의 자유와 자기 결정의 감정 속에서의 쉴러는, 모르긴 몰라도 그를 의붓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좋은 어머니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 칸트 철학을 자명하고 생생하게 가장 깊은 것에서부터 가장 높은 것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고찰하는 대신 그는 그것을 몇몇 경험적이고 인간적인 자연관이란 측면에서 받아들였다. 나는 그 논문의 어떤 어려운 부분까지도 직접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것들은 한 거짓된 빛 속에서 내 신앙의 고백을 나타내 주었다. 이 때 나는 그것이 나와 아무 관계 없이 언급될 경우 한층 곤란해지리라 느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의 사고 방식 사이의 놀라운 간격은 점점 더 어쩔 수 없이 벌어지기만 할 뿐인 까닭이었다.

  어떠한 결합도 생각할 수 없었다. 숭고함 때문에 쉴러의 작품들은 존경할 수 있었던 달베르크의 온화한 설득까지도 소용 없었다. 그와 결합되기를 반대했던 나 나름의 근거들은 절대 부정될 수 없는 것이었다. 누구도 정신적으로 대립되고 있는 우리 둘 사이에 지구의 지름보다 더한 엄청난 차이가 생겨 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때 두 사람은 양쪽에 선극으로 여겨질 수 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하나로 일치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의 연관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시작되었다.

  쉴러는 예나로 옮겼다. 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똑같은 시기에 바츄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열의를 띠고 자연 연구 협회를 활발히 움직여 왔으며, 훌륭한 집회와 뛰어난 기구 위에 기초를 세웠다. 이들의 주기적인 모임에 늘 나는 참석했다. 그런데 언젠가 나는 바로 그 곳에서 쉴러를 발견했던 것이다. 우린 둘 다 우연히 문에서 나오다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는 강연의 내용에 동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나 세밀히 분류하여 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모처럼 그 문제에 쾌히 동의하는 문외한의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몹시 호의적이면서 사려 깊고 분별 있게 나한테 표명했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이것은 대가들에게도 아마 달갑지 않을 거라는 점과 자연을 구분하고 개별적으로 상술할 게 아니라, 움직이는 그대로의 자연의 행동감을 살리며 전체에서 부분의 내용에 이르도록 자연을 서술하는 또 하나 다른 방식이 존재할 수 있노라고 했다. 그는 이에 관한 해명이 있기를 바랐으며 자신의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튼 그는 내가 주장했던 바와 같은 그러한 것이 이미 경험에서부터 나타난 것임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의 집에 이르렀을 무렵 대화에 끌려 그만 그 집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때 나는 식물의 변형론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그의 눈앞에 뚜렷이 드러나게끔 펜으로 여러개의 선을 그어 하나의 상징적인 식물을 명확히 나타내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또한 세밀한 관찰력을 감지하고 이해했다. 내가 말을 마쳤을 때 그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하지만 그것은 경험이 아니라 이념이지요."라는 말을 했다.―나는 멈칫했다. 어느 정도의 역정이 나기도 했다. 우리가 서로 구별되는 점이 그러한 표현을 통해 가장 엄밀하게 드러났던 까닭이다. <우미와 숭고>에서의 주장은 다시금 내 마음에 등게 되었으나, 역세 예전의 노여움이 꿈틀거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내가 이념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과, 당신 또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다 같이 무척 반가운 일이 될 수 있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나보다 훨씬 처세술 있고 나보다 많은 생활 방식을 터득한 쉴러, 그리고 그가 출간하려 마음먹었던 잡지 [호렌] 때문에 반발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거기에 나를 끌어들이고자 생각했던 쉴러는 교양 있는 칸트 학파의 사람들보다 그 문제에 잘 응답했다. 결국 나의 완강한 사실주의로 인해 격렬한 모순 대립의 많은 동기가 세워졌을 때 많이 다투었다가 휴전 상태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둘 중의 누구도 승리자로 생각하 수는 없었다. 양자는 서로 이겨 내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다. 일찍이 하나의 이념에 적합한 경험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문구는 내 속을 퍽 썩였다. 그것이 만약 존재할 수 없다면 경험이 이념과 결코 일치될 수 없으리라는 점에서 이념의 독자성이 곧 성립되는 까닭이다.―그러나 내가 경험이란 말로 표현했던 것은 그는 이념이라 생각했을 때, 양자 사이에 중개될 것이고, 서로 관련된 그 어떤 것이 거기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니 어쨌든 첫걸음은 내디딘 셈이었다. 쉴러의 사람을 끄는 힘은 대단했다. 그는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모든 것을 꽉 붙들었다. 또한 나는 그의 의도에 공감하며 나에게 숨겨져 있던 많은 것을 [호렌]지 일에 바칠 것을 약속했다. 내가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왔던 그의 부인은 지속적인 이해를 위해서 자신이 지닌 모든 정성을 바쳤고, 양쪽의 모든 친구들도 기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완전히 조정될 수 없는 객관과 주관의 경쟁을 통하여 끊임없이 계속되며, 우리와 다른 많은 선한 사람들을 위해 활용되는 하나의 제휴를 약속했다.

  특히 내게 있어 이것은 모든 것이 기꺼이 서로 함께 싹을 터서 껍질을 깨는, 말하자면 씨앗과 잔 나뭇가지에서 솟아나는 새봄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 양편의 편지들은 이에 관한 가장 직접적이며 가장 순수하며, 또한 가장 온전한 증언이 되고 있다.

  이같이 행복스러운 출발이 있은 후, 10년 간의 교제가 이루어지면서 내 타고난 본성이 내포하고 있는 만큼의 철학적인 소양은 점점 발전해 나갔다. 이로써 가능한 한의 가장 좋은 해명이 주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비록 현실적인 어려움이 모든 식자의 눈에 곧 띌 수밖에 없긴 하지만, 보다 높은 입장에서 인간 오성의 확실성, 즉 그 대상들이나 그 관계에서 자연을 인식하고 파악하고 존중하고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건전한 인간이 가진 오성의 확실성을 개관하는 모든 자들―그러한 사람들은, 숱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는, 아마도 보다 순화되고 보다 자유롭고 자각된 상태로의 추이 과정을 서술하려고 작정할 때 거의 불가능한 것이 시도된다는 사실을 기꺼이 고백할 것이다. 문화 형성의 단계에 관해서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마 사도, 샛길이나 뒷길에 관해서는 언급할 수 있으며, 그 다음에 보다 높은 문화에로의 생각지 않았던 비약과 활기찬 도약에 관해서도 언급할 수 있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결국 그가 의식의 최고 영역에서 항상 과학적으로 소요하노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 이 영역이란 사람들이 외부의 것을 최고의 신중성을 가지고, 또 조용하기 보다는 날카로운 주의력을 고찰하는 곳이며, 또한 동시에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것을 현명한 통찰, 겸손한 조심성으로, 그것도 참으로 순수하고 조화를 이룬 직관의 인내력 있는 희망 속에 다루는 곳이다. 세계가 우리들 마음을 흐리게 하지 않을까, 또는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요소를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우리는 경건한 욕구를 품을 수 있다. 또한 달성할 수 없는 것에 애정을 갖고 접근하는 건 금지되지 않는다. 우리들의 서술에서 우선 달성되는 것을 우리는 오래 전부터 사모해 온 친구들과 동시에 선과 정의에 진력하는 독일의 젊은이에게 주고 싶은 바이다.

  우리는 그들이 참신한 참여자와 미래의 후원자가 되도록 이끌어들여 붙잡아 두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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