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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어느 장님 부부의 사랑이야기 / 전경린

by 혜강(惠江) 2014. 1. 11.

 

<수필>

 

어느 장님 부부의 사랑이야기

 

 - 전경린  

 

 

  산에는 요즘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 아카시아 향과 찔레 향을 앞세운 산 향이 왈칵 왈칵 넘쳐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민가로 덮친다. 창을 열면 금세 내장 속까지 음기 가득한 푸른 멍 빛이 들어 버린다. 오랜만에 앞산의 안부를 알자고 늘 입고 뒹구는 목면 원피스 아래 발목까지 오는 면양말을 신고 운동화 차림으로 나섰다. 쉰여섯 개의 계단을 빙빙 돌아내려가니 좁은 길에 봉고차 한 대가 서 있고 옆 통로에 사는 장님 부부가 젖먹이 아기를 안고 나와 있었다.

  봉고차엔 종로구 세탁물 봉사대라는 글귀가 박혀 있다. 중증 장애자와 독거노인, 소년 소녀가 가장인 가정의 세탁물을 씻어다 준단다. 봉사대들이 4층 장님부부의 아파트에서 이불 보퉁이와 빨래거리를 안고 내려오느라 부산했다. 나는 그 광경에 잠시 멍해졌다. 세상이 아름답다.

  그 장님 부부를 처음 본 건 재작년 봄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동네 재래시장의 좁은 통로를 지나고 있을 때 몹시 내성적인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핀 속에 어떤 그림이 있어요?"

  흡사 캄캄한 벽장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잇댄 차양 사이로 새는 빗물을 피해 걷던 나는 멈칫 섰다. 야채 가게와 생선 가게 사이에 있는 두어 평 액세서리 점포 앞이었다.

  "안개꽃이에요."

  점포 점원이 대답했다.

   "안개꽃은……. 꽃송이가 아주 조그맣고 흰색이죠?"

  두 눈이 깊이 매몰된 창백한 ㈏微?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렇죠. 점처럼 작고 희어요."

  장님 여자는 안개꽃이 그려진 머리핀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전생을 추억하듯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고무줄을 풀고 핀으로 머리를 묶고 비가 새는 차양 틈새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을 장님 남자가 보았는지 따라 웃으며 돈을 건넸다.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아침에 지팡이를 휘저으며 아파트 아래 여든 다섯 개의 계단 길을 위태롭게 내려가는 무표정한 장님 남자가 같은 사람인 것을 몰랐다. 그가 늦은 밤에 계단 길을 오르는 것을 여러 번 보았고 어느 날은 만취해 비틀거릴 때도 있었다. 늘 짧게 머리를 자르고 단정하고 깨끗하게 옷을 입었으나 지팡이를 쥔 장님 남자의 표정은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다. 어느 때는 당장 지팡이를 휘두르며 비명을 내지를 것처럼 급박하게 불행해 보였다. 나는 그와 거리를 두며 걸었고 스칠 때는 잔뜩 경계하였다. 그의 불행은 당연한 것이고 스쳐 지나는 행인에게 갑자기 난폭해진다 해도 이해해야 할 만큼 특별하게 여겨졌다.

  장님 부부를 다시 발견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여섯 시 무렵, 아카시아 향이 눈이나 비처럼 생생하게 내려 마을을 덮고 꽃잎이 길 위에 하얗게 깔려 있었다. 자동차를 몰고 내려가다가 나는 아, 하고 시선을 멈추었다.

  장님 남자와 여자가 고개를 치켜들고 정전된 방처럼 어두운 두 눈의 한가운데로부터 웃고 있었다. 남자는 등에 젖먹이 아기를 가뿐하게 지고 여자는 남자의 팔을 잡고 언덕길을 경쾌하게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들의 매몰된 눈 속에서, 웃음으로 패인 입가에서 푸른빛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푸른 잎들과 아카시아 향이 가득한 5월의 세계 속에 나와 함께 있었다.

  그 후론 장님 남자의 지친 귀가길이 그저 평범한 이웃 남자의 평범한 저녁 피로로 보였다. 그 역시 뭇사람들처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힘겹게 집밖으로 나다니는 것이다.

  나는 착한 이웃이 되어 세탁물 봉사대의 전화번호가 적힌 인쇄물을 한 장 얻어 계곡 끝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께 전해주었다. 할머니는 늘 그렇듯 떡과 과자와 주스를 내놓고 옛날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한 시간 반 만에 간신히 할머니 손아귀를 빠져나와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산에는 그새 꽃다발처럼 뭉쳐서 피었던 새하얀 팥배나무 꽃이 모두 지고 새로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아카시아와 찔레꽃과 산딸기 꽃 사이에서 새로운 꽃을 피운 나무의 이름은 영어로 스노우 벨(snow bell), 눈종 나무란다. 이름 그대로 눈처럼 흰 꽃이 종처럼 조롱조롱 아래로 붙어 흔들린다.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눈종꽃을 오래 보다가 지나는데 해일처럼 큰 바람이 숲을 뒤집고 지나갔다. 문득 친구가 늙은 연인에게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숲 속의 나뭇잎 중에 흔들리지 않는 나뭇잎이 있을까요?"

  의 늙은 연인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더란다.

   "돌았니?"

  나는 쿡쿡 웃는다. 돌았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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