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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련/- 단문(수필)

(수필) 말의 힘과 책임 / 이규호

by 혜강(惠江) 2014. 1. 10.

<수필>

말의 힘과 책임

 이규호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상황이나 현실 속에서 살고 있고, 또 그 상황에 필요하다고 믿는 ‘말’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큰 힘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말은 좋지 않은 방향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생각할 때에는, 말에 따르는 ‘책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말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려 한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위한 말의 창조적 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에 따르는 책임에 관해서도 말해 보려고 한다. 어쩌면 우리의 언어생활을 반성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의 힘

 

   어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한 뒤에 “폐병(肺病)입니다.”하고 말했다 하자. 또 어떤 판사가 사건을 심리(審理)하고 나서 “이것은 과실치사(過失致死)다.”하고 말했다 하자. 그리고 서로 잘 만나는 두 남녀 중의 한 사람이 그의 상대편에게 “사랑합니다.”하고 말했다 하자.

 

  이 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말의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경우는, 말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방식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까지 따지는 것은 너무 힘든 작업이므로, 여기서는 피하기로 한다.

 

   우선, 폐병이라고 진단한 의사의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이 떨어지기 전에도 물론 그 환자의 몸엔 폐병이라고 하는 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의사가 진단을 내리기 이전의 상황은 불확실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환자와 그의 가족, 그리고 병원측은 어디서 무슨 병이 들었는지,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아니,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벌이게 된다.

 

   과실치사라고 하는 판사의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상황은 하느님만이 알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정당방위(正當防衛), 과실, 고의(故意) 등 구구하게 해석되는, 모호(模糊)하고 다의적(多義的)이고 가변적(可變的)인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유동적(流動的)인 상황이 고정(固定)되고, 이에 따라 피고(被告)와 그의 관계자들은 희비(喜悲)를 체험하면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실제로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잘 만나는 두 남녀는 양쪽이 다 사랑을 느낄 수도 있고, 한쪽만이 느낄 수도 있다(서로 싫어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으므로 생각지 말자.). 사랑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되지만, 그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못 된다. 다시 말하여, 사랑한다는 말이 떨어지기 이전의 상황은 불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짐으로써 분명하게 되고, 이에 따라 두 사람의 생활은 변모하기 시작한다. 양쪽이 서로 애정을 느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대체로 좋은 반응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애인이란 관계로 묶이고, 이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사랑을 사양한다든지 결혼생활을 설계한다든지 하게 된다.

 

   다음은 한쪽만이 애정을 느끼고 사랑을 고백(告白)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는 좋은 반응을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될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애인이 될 수 없는 관계로 묶이고, 이에 따라 두 사람은 대체로 복잡한 심적 동요를 체험하면서, 한쪽은 더 간곡히 고백하고, 다른 쪽은 보다 정성스러운 위로의 말로 단념하도록 이끈다든지 하는 등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이상의 세 가지 예를 검토해 보면, 말은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현실)을 일정한 것으로 고정하고, 또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 달리 말하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큰 힘이 있다는 사실을 귀납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우리의 삶을 창조하는 힘인 것이다.

 

 

말과 책임

 

   우리는 어떤 소지품을 잃고서 친구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더러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의심하는 뜻을 담아 “혹시 내 만년필 못 봤니?”와 같은 말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몸이 불편하면 의사의 진찰을 받게 된다. 그러면 의사는 우리를 진찰하고서 “늑막염이군요.”와 같은 말로 진단을 내린다. 이런 말들도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을 일정한 것으로 고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책임’이란 면에서 이 말들을 살펴보자. 의심이 의심으로 끝나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의심하는 동안에, 잃은 물건을 찾으면 그것으로 의심이 풀릴 수도 있고, 또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을 수도 있다. 때로는 그 의심이 친구에 대한 나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이것도 대체로 나 혼자의 문제로 그친다. 그러나 의심하는 뜻으로 “혹시 내 만년필 못 봤니?”하는 한 마디의 말이 떨어지고 나면, 이 말은 곧 가시가 되어 그 친구의 가슴에 박히고 만다. 

 

  그런데 다행히 다른 데서 그 물건을 찾았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나의 의심하는 말을 취소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취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취소한다고 해서 앞서 한 말이 정말로 취소될까? 서먹서먹해진 두 사람은 취소한다는 말로써 우정을 회복한 것처럼 보이고, 또 두 사람이 다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의심한 적이 있다.’는 생각, 또 ‘너는 나를 의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 친구의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늑막염으로 진단을 받은 환자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자기의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차도(差度)가 없다. 그래서 의사는 다시 진찰을 하고, 그것이 늑막염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질환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늑막염 정도의 질환이 오진될 리는 없겠지만, 하나의 예로서 살펴보자. 의사는 늑막연이란 진단(말)을 취소하고 새로운 병명을 밝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알맞은 치료를 베풀어 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다. 여기서도 취소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환자는 자기의 병이 늑막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으므로, 의사의 취소는 정말 취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시 완전한 취소는 되지 못한다. 훗날, 그 환자가 무슨 까닭으로인지, 가령 때때로 옆구리가 결리게 되었다고 해 보자. 그 때 그는, 옛날 그 의사가 늑막염아라고 한 말을 상기하면서, 그것이 오진이 아닐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이런 예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의 취소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은 한번 입에서 떨어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취소한다고 해서 이미 한 말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취소한다는 말과 함께 객관적인 사실로 남는 것이다. 우리 선인(先人)들은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란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어찌 남아(男兒)뿐이겠는가. 우리가 하는 말은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참으로 어렵게 발견하고 애써서 선택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심(銘心)해야 할 것이다.

 

   나는 위에서 말의 힘과 말에 따르는 책임에 관해서 간단히 말해 보았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을 위한 말의 창조적 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의 언어생활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우리가 말의 창조적 구실을 이해한다든지 각자의 언어생활을 반성한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생활을 더욱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가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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