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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밀양 표충사

by 혜강(惠江) 2012. 10. 29.

 

밀양 표충사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는 밀양 표충사

 

- 사명(四溟)대사의 우국충정이 서린 호국성지 도량 -

 

·사진 남상학

 

 

 

* 표충사 전경 *

 

 

  밀양의 얼음골과 무봉사의 태극나비, 만어사의 어산불영경석과 함께 밀양의 ‘4대 신비’로 불리는 표충비는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의 높은 뜻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비면에 땀방울이 맺히는 ‘한비(汗碑)’로도 유명하다. 

   표충사(表忠寺)는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말사로 그 자리는 경남의 알프스로 불리는 명산들이 겹겹으로 에워싼 명당 중의 명당이다. 한반도 풍수 혈맥은 참으로 신묘해 백두대간이 강원도 태백산을 일으키며 정기를 내륙(소백산)에 밀어주고도 우렁찬 기운이 넘쳐난다. 그 혈맥(穴脈)들이 곳곳에 응결돼 정기를 발산하니 바로 낙동정맥이다. 이중에도 가지산·운문산·재약산을 북현무에 업고 양수(兩水)가 겹쳐나가는 밀양지역 산세는 강직한 의인들이 출생하는 물형이다.  

  일주문에서 재약산(載藥山) 기슭에 자리잡은 절까지의 산책로는 깊은 계곡에 어울리게 가을이 물들었고, 절집은 거기에 깃든 고승들의 자취만큼이나 정갈한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예부터 명산유곡으로 이름이 높았던 표충사 일대에는 산세가 뛰어난 곳으로 특히 사계에 따라 수시로 변화는 주위 풍광이 장관을 이루어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 표충사 경내에 들기 전의 우거진 숲 *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617-686)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한 것을 신라 흥덕왕 때부터 영정사(靈井寺)라 하였고, 고려 충렬왕 12년(1286)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이 1,000여명의 대중을 맞아 불법을 중흥하여 동방 제일선찰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현종 때(1839) 월파 천유화상이 임진왜란을 맞아 승병을 일으켜 큰 공훈을 세운 서산(西山), 사명(泗溟), 기허(騎虛)등 3대선사(三代禪師)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서원을 사찰 안에 둠으로써 절 이름도 영정사에서 표충사(表忠寺)라 명명하였다.

   그런데 표충사(表忠寺) 안에는 또 다른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다시 말하면, 유생들을 교육하고 성현들을 제사하는 표충서원이 사찰영역 안에 있어 불교와 유교가 한 자리에 공존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즉 불상을 봉안한 절(寺) 안에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숭유억불(抑佛崇儒)의 조선왕조시대 서로 견원지간이었던 유교와 불교가 무슨 연유로 한 도량 안에 공존하는 것일까. 표충사는 임진왜란 당시 호국 승병장으로 국난을 극복해 낸 사명(四溟·1544-1610)대사의 우국충정이 서린 유서 깊은 절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사명대사는 조선 중기의 뛰어난 군승이면서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가사 장삼을 군포로 바꾼 호국 승병으로서 절체절명의 위기에는 나라를 구출하고자 애쓴 승려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국방정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전국의 산성 개축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했다. 선조의 지원을 받아 그가 수축한 성은 남한산성을 비롯해 금오·용기·약견·이숭·팔공·부산성에까지 미친다.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권장해 양대 전란이 끝날 때까지 4000여 석의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이끈 혜안도 놀랍다. 

 

 

'제538회 護國大聖 四溟大師 秋季享祀'를 위해 달아놓은 축하등 * 

 

   조정에서는 이를 기려 국장으로 지내고 밀양 표충사(祠)와 묘향산 수충사(祠)에 서원 편액을 내리며 유교식 제향으로 봉행토록 했다. 당시 사회서 승려에 대한 파격적인 예우였다. 그러다 다시  헌종 8년(1839)에 표충사(寺) 경내로 사당을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표충사는 승려가 살지 않는 폐사였다.

  사명대사 진영이 봉안된 표충사당과 유물관에는 그가 걸쳤던 금란가사·장삼(중요민속자료 제29호)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16세기 말-17세기 초 법복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가사 장삼은 대사의 체취가 풍겨날 것 같이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또 표충사는 일제강점기 판사였다가 사형선고를 내린 뒤 입산해 불교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자리에 올랐던 고승 효봉선사가 표충사서 수행하는 동안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일화도 그렇거니와 그가 입적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경내에는 삼층석탑, 석등 등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고, 대광전과 마주하고 있는 우화루에서 바라보는 계곡 또한 수려하기 그지없다. 

 

 

 

   표충사로 드는 단장면 일대는 대추 산지로 유명하다. 길가에는 곳곳에 추수한 대추를 출하하는 작업에 분주하고, 지나가는 여행객에게 판매하는 곳이  많다.

 

 

* 단장면 일대 대추 산지에서 수확한 대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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