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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부산. 경남

'아리랑'의 고장, 밀양을 찾아가다.

by 혜강(惠江) 2012. 10. 28.

 

경남 밀양

 '아리랑’의 고장 밀양을 찾아가다

- 영남루, 천진궁, 아랑사, 박시춘 선생 옛집을 찾아 - 

 

 

·사진 남상학

 



 

* 밀양역 광장에 세운 밀양아리랑 노래비 *

 

 

결실의 계절이다. 우리 산하 어디를 가도 풍성한 이 가을, 길을 나서는 이들의 마음도 여유롭다. 밀양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밀양은 '진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인 ‘밀양 아리랑’의 고장으로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배우 전도연에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준 영화 ‘밀양’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가을에 굳이 밀양을 찾아 나선 이유는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천황산, 재악산 등 연봉을 케이블카로 올라 억새 우거진 하늘정원을 거닐고 싶어서 일 것이다. 밀양에 도착하여 우리  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 주변을 찾기로 했다.  


밀양 아리랑 노래비




* 영남루 옆 아동산의 읍성으로 오르는 입구에 세운 밀양아리랑 노래비 *


  밀양시에는 아리랑의 고장답게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도처에 있다. 밀양역 광장 한 귀퉁이에도 있고, 영남루가 있는 아동산의 읍성으로 오르는 입구에도 있다.  아리랑은 노래이기 전에 우리 민족의 오래된 통속 민요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작사와 작곡자가 따로 없이, 언제부턴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것으로 오래 불리어 오는 동안 민족의 사상과 생활과 감정에서 우러나온 사설들이 담겨지고 토속적인 가락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벙긋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다~틀렸네    

   가마타고 시집가긴 다 틀렸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가시와 가락이 조금씩 다르게 불리기도 하나 동부지방 민요의 한 축을 이루는 밀양 아리랑은 빠른 장단이 많이 쓰여 경쾌하고 흥겨운 민요이다. 하지만 밀양 아리랑은 그 흥겨움에 반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으스스한 전설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아랑의 성은 윤, 이름은 정옥이었으며, 그는 조선 명종 때 그의 부친이 영남 밀양태수로 부임하면서 밀양에 갔다. 그 시절 한 관노가 아랑의 미모에 반해 사모하게 되었다. 어느 날 이 관노가 침모를 시켜 아랑을 영남루로 유인했다. 아랑이 루에 올라 달빛에 취해 있을 때 그 관노가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했다. 이 때 아랑이 저항 하자 칼로 찔러 살해하고 암매장해 버렸다. 딸을 찾지 못한 부사가 서울로 올라가고 난 후부터 새로 부임하는 부사는 원인 모르게 급사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다가 담이 큰 부사가 부임하여 아랑귀신을 만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죄인을 찾아 처벌하여 아랑의 원한을 달래 주었다” 



  아랑의 정절을 기려 밀양의 부녀들이 부르던 노래가 '아랑가'였는데, 그것이 변하여 밀양 아리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1961년에 양주남 감독, 구봉서, 김희갑, 허장강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그리고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 아리랑의 근원 설화인 아랑의 넋을 추모하는 아랑제를 매년 음력 4월 16일에 열고 있으며, 1999년 밀양아리랑보존연합회가 구성되어 활발한 보존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정조를 지킨 처녀를 기리는 아랑사 



*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 아랑사 * 

 

* 아랑사에 모셔진 아랑의 초상화 *

 


  영남루 옆 밀양강가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아랑사가 있다. 아랑사는 밀양아리랑의 유래가 담겨있는 아랑의 혼백을 모신 사당이다. 계단 이래로 우거진 대나무 숲이 있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남성을 상징한다는 느티나무의 둘레가 한 아름이 훨씬 넘어 보인다. 정순문을 통해 밀양부사의 딸이었던 아랑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길 가장자리에 잔잔하게 피어있는 보라색 들꽃이 어린 소녀처럼 애잔하게 보인다.

  사당 안에는 그날의 상황을 재현한 그림과 단아한 아랑의 영정이 중앙에 그려져 있다. 이 영정은 1963년 육영수 여사가 봉안했다고 한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유모 밑에서 자라 채 피지도 못하고 가버린 규수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이 먼 후대에까지 전해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처롭게 한다. ‘청구야담’에 전하는 아랑의 이야기는 TV로 방영된 드라마 ‘아랑사또전’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아랑사는 정절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 아랑사의 외부 건물과 내부의 그림들 *

 

* 아랑의 정절을 상징하듯 아랑각 옆에 무성한 대나무 숲 *

 

 


 밀양 영남루(密陽嶺南樓),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

 

 

 *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영남루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 *

                           

  

  밀양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영남루(내일동)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꼽히는 밀양의 대표적인 명소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인 밀양 영남루는 신라 경덕왕(742~765년)때 신라의 5대 명사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1365) 밀양부사 김주(金湊)가 규모를 크게 중수하였고, 현재의 누각은 이인재(李寅在)부사가 1844년에 중건한 것이다.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보물 제 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위에 위치한 영남루에 오르니 빛바랜 고풍스러운 단청과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하는 대들보에 조각된 용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사한 꽃과 희귀한 동물 문양이 지나간 시간의 흔적으로 또 다른 화장을 한 채 고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누각에는 퇴계 이황, 목은 이색, 문익점 선생 등 당대의 명필가들의 시문현판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부사의 아들 이증석(11세)과 이현석(7세) 형제가 쓴 ‘영남 제일루(嶺南第一樓)’와 ‘영남루(嶺南樓)’ 현판은 관광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예가들로부터 불가사의한 필력으로 지칭되고 있다. 7살과 11살짜리 어린 사람의 필력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깨끗한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다. 탁 트인 시선 너머로 밀양강이 은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영남루 앞을 지나는 밀양강은 이곳 내륙지역에서 섬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 영남루와 거기 걸린 현판들, 현판글씨의 경연장과 같은 느낌이다. *

 

* 영남루에서 내려다 본 밀양강과 주변 경치 *

 

역대 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 천진궁 내에 모신 단군의 영정 *

 


  영남루 건너편의 천진궁도 들러볼 만하다. 천진궁(경남도지정유형문화재 제 117호)에는 단군 이후부터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 고려, 조선 등 8개 왕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군들의 감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곳에서 죽어간, 또는 힘없는 나라를 생각하며 통탄의 눈물을 흘렸을 이들의 넋이 오래 남을 꽃으로 산화됐는지 영남루 주변으로 비 온 후에 그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석화(石花)가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 천진궁으로 드는 문 *

 

* 왕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

 

* 천진궁 내에 모신 위패와 게시물 *

 

* 천진궁 경내에 설치한 돌비들 *

 

 * 진궁 앞뜰 흙에 묻힌에 바위가 비가 온 후에는 마치 꽃처럼 선명하게 드러나 '석화'라 부른다. *

  

 

박시춘 선생의 옛집

 

* 박시춘 선생 옛집에 세운 박시춘 선생상 *



  영남루 앞에선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대중가요 3000여 곡을 작곡한 박시춘(朴是春, 1913~1996) 선생의 옛집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은 선생이 유년시절을 보낸 옛집으로 7세부터 11세까지 살던 집이다.

  본명이 박순동(朴順東)인 선생은 권번(券番)을 운영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가무를 보고 들으며 부유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부친이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유년시절부터 유랑극단을 따라다니며 여러 악기를 연주하다가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으로 작곡가로 데뷔하였다. 1935년에는 ‘희망의 노래’에 이어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작곡가로 이름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작곡가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가요들을 작곡하며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는 물론, 해방 후에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한국전쟁 때에도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  3천여 곡의 애창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박선생은 지난 1961년 한국연예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이후 4-7대 회장을 역임했고 예총부회장과 작가동지회장 등을 거치면서 연예계와 한국대중가요 발전에 남긴 공을 인정받아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지난 82년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기도 했다. 2001년 5월 밀양시는 박선생이 어릴 적 예인의 꿈을 키웠던 내일동 영남루 정문 앞 언덕에 선생의 옛집을 복원하고 가요동산을 조성하면서 그의 흉상과 노래비를 건립해놓았다. 그러나 생가는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100m 아래 내일동 226번지라고 한다.

  박시춘 선생을 소개한 안내판에는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노래(4곡)로 인하여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사로 거명되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라고 적어 놓았다. 하지만 밀양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영남루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밀양시는 2002년부터 박시춘.1913-1996) 선생을 기리기 위한 ‘박시춘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박시춘 선생의 옛집을 끝으로 밀양의 중심인 영남루 일대를 둘러보고 우리는 영남알프스라 불리는 밀양 재약산(해발 1,189m)기슭에 자리하는 표충사로 발길을 재촉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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