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그 때'를 아십니까?
-박물관, 전시관 순례
안정수 취재기자
'인천 여행'하면 떠오르는 것? 바다·회·낙조·차이나타운 등이 있다. 좀 더 깊게 인천을 알고 싶다면 박물관을 둘러보자. 근대시대의 인천을 중심으로 개항, 건축, 음식 등 다양한 문화를 조명한 박물관이 여럿이다. 그리고 한여름 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즐기는 여행이라 더욱 좋다.
18세기, 인천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강제개항 이전에도 외래 문물이 들어오는 첫 문으로, 사회적 변화에 적응, 수용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 하지만 일본의 강압으로 개항되면서 제물포를 중심으로 전통문화가 약화되고, 외래문화가 정착한다. 또한, 제물포와 한성을 잇는 도로·철도를 부설, 항만 확장 등으로 항구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해 산업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인천 개항 후 120년의 흔적
인천개항박물관 (구 일본 제1은행, 시 유형문화재 제7호)
*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뚜렸한 절충주의 양식을 보인다 *
* 왼쪽/오른쪽 : 실내 / 열차 기관사가 메고 다니던 통표휴대기 *
일본 은행 부산지점의 인천출장소로 1883년에 개설, 188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된 일본 제1은행 건물이다. 하는 일은 해관세와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와 사금 매입 대행, 예금과 대출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한국은행 인천지점(1909), 조선은행 인천지점(1911)으로 사용됐으며 2010년 10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구 일본 제18은행, 시 유형문화재 제50호)
* 일식기와로 모임지붕 형태를 하고 있어 이국적 분위기를 풍긴다 *
*실내 전시물 *
19세기 후반, 나가사키 상인은 상해에서 영국 면직물을 수입, 한국에 다시 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이익을 거뒀다. 이 수익으로 1890년에 세워진 것이 일본 제18은행. 이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1936), 한국흥업은행 지점 (1954)으로 사용되다 현재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물포항이 개항한 이듬해 1883년 청나라 영사관이 들어선다. 그 근방이 청나라의 거주지로 설정되면서 많은 중국인이 모였고, 그 장소가 바로 현재의 차이나타운으로 형성됐다. 산둥 지방에서 온 무역상과 노동자가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고 중국요리를 팔던 음식점은 한국인 손님을 받기 위해 짜장면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인천과 차이나타운 그리고 짜장면
짜장면박물관 (구 공화춘, 등록문화재 제246호)
* 짜장면박물관 *
* 짜장면과 화교에 관한 역사를 다양한 체험거리로 전시했다 *
공화춘의 전신은 음식점과 숙박업소의 혼합형으로 세워진 산둥회관이다. 1911년 산둥성 출신의 화교 우희광이 지금의 위치에 이전 개업, 이듬해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해 공화춘으로 개명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인천과 서울의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경인지역 최고급 요리점이었고, 6·25전쟁 이후 짜장면 보급에 일등공신 음식점으로 꼽힌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한국식 짜장면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일등공신으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면서 인천지역사회는 빠르게 안정돼 갔다. 당시에 시작한 광고 중 하나가 이민에 관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외국으로 눈을 돌려 사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1902년 공식이민 첫 배 출발해
한국이민사박물관
* 한국이민사박물관 전경 *
*[왼쪽/오른쪽]하와이 이민자들을 최초로 실어 나른 갤릭 호 모형, 총 6회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했다 / 최초 공식여권 '집조' *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의 개척정신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첫 공식이민의 출발지였던 인천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이 건립됐다. 1902년 이후 총 64회에 걸쳐 건너간 7,415명 이민자의 여정과 생활상, 이민 모집광고, 최초의 공식적인 여권 '집조', 이민자를 싣고 하와이로 떠난 '갤릭호' 모형 등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인천은 항구도시, 산업도시로 빠르게 발달한 반면, 어느 산의 중턱에는 힘들고, 배고픈 사람들이 모여 끈끈한 정으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인천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토지와 인력이 수탈당했다. 농민이 몰락한 것. 동시에 저임금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당시 노동여건은 더더욱 악화돼 갔다. 도시의 인구유입이 가속화됨에 따라 집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작은 촌락을 자연스럽게 형성했다.
50년 전 빈민촌 모둠살이 재현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왼쪽]수도국산 달동네가 사라질 때까지 지게로 연탄을 배달했던 유완선씨도 찾을 수 있다 [오른쪽(위,아래)]옛 달동네 풍경
인천광역시 동구청은 역사의 뒤로 사라지고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수도국산 달동네의 삶을 되살리고자 옛 달동네 터에 박물관을 건립. 수도국산의 옛 모습과 실존 인물을 복원해 전시했다. 솜틀집, 연탄가게, 구멍가게, 이발소, 공동수도, 공동빨래터 등 기억 속에 잊힌 풍광이 살아있는 곳. 역사 속에 실존했던 수도국산 달동네의 삶과 일상을 주제로 한 이 박물관은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松林山)이다. 송림산이 수도국산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수도국에서 우물이 부족한 인천까지 상수도를 이었고, 송림산에 배수지를 설치하면서 '수도국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달동네 주거 공간은 매우 비좁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이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배경이 됐고 노후 부분을 조금씩 개보수하며 새로운 공간이 재탄생했다. 수도국산 달동네에서도 부족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마당을 내부처럼 활용,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가옥이나 방 상부 공간을 이용했다.
* 19세기 인천 제물포 골목 모습 (인천개항박물관) *
인천에는 항구도시의 역사가 있고, 급속한 발전이 있었다. 그리고 국외로 떠난 배에는 이민을 가는 선조가 있었고, 어려워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터전이 있었다. 인천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인천 여행'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여행정보
1.찾아가는길
* 인천개항박물관, 근대건축전시관, 짜장면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 내 위치)
경인고속도로 → 종점 사거리 → 제2경인고속도로 종점 → 사거리(좌회전)
* 한국이민사박물관
경인고속도로종점 → 인천항정문(지하차도) → 수인사거리 → 중부경찰서 → 인천항8부두 → 월미공원
*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제1경인고속도로 가좌 IC (동인천방향) → 재능대학 앞 → 송림오거리 → 박물관
2.맛집
청관: 사천해물요리 032)772-5118
태화원: 짜장면, 032)766-8688
태운각: 해물누룽지탕, 032)851-0083
더 테라스: 스테이크, 032)260-0077
3.숙소
송도 파크호텔: 인천 연수구 송도동, 032)210-7000
송도 브릿지호텔: 인천 연수구 송도동, 032)210-3000
하버파크호텔: 인천 중구 항동3가 032)770-9500
호텔샾(굿스테이) : 인천 연수구 옥련동, 032)834-8346
호텔썬플라워(굿스테이) : 인천 남구 주안1동, 032)429-8228
글, 사진 : 한국관광공사
'국내여행기 및 정보 > - 인천. 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미원(洗美苑), 연꽃·수생식물 세상 (0) | 2012.08.21 |
---|---|
해발 5천년 마니산 오르기 (0) | 2012.07.06 |
경인 아라뱃길, 물 흐르듯 국운(國運)이여 열려라 (0) | 2012.06.12 |
여주 이포보 캠핑장 : 강물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자연스레 하나 되는 곳 (0) | 2012.06.10 |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0) | 2012.06.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