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족 및 교회, 학교/- 교회, 신앙

고 김학원(金學元) 권사 추도예배, 천안공원묘원에 울려 퍼진 “이 몸의 소망 무엔가∼”

by 혜강(惠江) 2012. 5. 24.

 

전 국회의원 

고 김학원(金學元) 권사 1주기 추도예배


천안공원묘원에 울려 퍼진
이 몸의 소망 무엔가∼”

 

 

 

고 김학원권사의 1주기 추도예배가 2012년 5월 22일(금) 그의 묘소가 있는 천안공원묘원에서 엄숙히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판사로, 변호사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에 투철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추도예배의 자리에는 차명숙 집사님과 두 아들 상기, 정기 등 유가족을 비롯하여 본인이 적을 두고 섬기던 서울 왕십리 꽃재교회 성도들과 친지, 친구들 약 100여명이 모여 생전의 고인의 넉넉한 인격과 업적을 기리며
추모하였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예배는 꽃재교회 김성복 목사님의 예식사에 이어 찬송가 488장을 부른 후 박경진 장로님의 간절한 기도 있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지금 고(故) 김학원 권사님의 1주기를 맞이하여

추도예배로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김 권사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아내 차명숙 집사님,

그리고 사랑하던 두 아들 상기, 정기 군이 머리를 숙였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이 예배가 경건한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차명숙 집사님과 두 아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아픔 속에서도

지난 1년 동안 믿음으로 역경을 잘 극복하며 살아온 가족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더욱 북돋아 주옵소서.
하나님, 그동안 사랑하는 아들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피나는 노력 끝에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직장인으로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게 하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짧지만 굵게 사신 고인의 그 뜻과 유훈을 깊이 되새기며 가정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간절한 소망으로 믿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지금 이 자리에는 평소 고인을 아끼고 사랑하며, 존경하며,

또 그분을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사오니,

그 분을 아기고 사랑하는 만큼 고인이 못다 이룬 뜻을 힘써 이루어 나가며

이 나라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오늘 1주기 추도예배에서 선포되는 김성복 목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유가족과 우리 모두가 위로와 평강을 얻게 하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특히 이 날 꽃재교회 담임목사인 김성복 목사님은 
고 김학원 권사의 고매한 인품과 성실함과 믿음, 탁월한 지도력과 업적을 기리고, 슬픔을 신앙으로 극복한 유가족들에게 감사의 뜻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다윗왕이 임종을 앞두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유가족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믿음의 훌륭한 가문을 세워나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며,
고인의 무덤 앞에서 우리 모두가 다짐해야 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나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열왕기상 2장1∼3절)

 

 

이어 김학원 권사의 약력소개가 있었습니다.

약력소개는 고인과 아시아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였던 유영혁 장로(강남중앙감리교회)가 해 주셨습니다.  고 김학원 권사는 1946년 5월 15일 충청남도 청양에서 출생하여 1965년 공주사대부고(제7회)를 졸업한 후 서울로 상경하였습니다. 그 후의 약력을 간추려   봅니다.

 

1970년 서울대 법대 졸업1983년 제25회 사법시험 합격
1986년 3월 수원지방법원 판사
1988년 9월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판사
1990년 9월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 판사
1992년 3월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 판사
1994년 1월 법무법인 아시아 대표변호사
1996년 3월 신한국당 공명선거 대책위원회 부위원장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1998년 건국대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2001년 자민련 원내총무
2002년 국회 평창동계올림픽유치특별위원회 위원장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자민련 대표
2006년 8월 한나라당 전국위원회 의장
2007년 10월 한나라당 최고위원2008년 법무법인 아시아 대표변호사  
2008년 12월 제6회 대한택견연맹 회장
2009년 3월 결주김씨 중앙종친회 총재
2011년 04 충청미래정책포럼 상임대표
2011년 5월 22일 별세 

 

약력소개에 이어 수필가이며 혜천대학교 명예교수인 이종국(李鍾國)님께서 추모사를 해 주셨습니다.

이종국 교수는 고인과는 공주사대부고 7회 동기동창으로 평소 고인과는 절친이였습니다. 그는 “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 김학원 의원 1주기에 삼가 추모함”의 글에서 ‘패기와 열정으로 넘쳐나던 청춘시절’을 회고하며 고인을 앞서 보낸, 짙은 아쉬움을 피력했습니다. 그의 추모사를 여기 옮깁니다. 

 

추모사

영생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소서
김학원 의원 1주기에 삼가 추모함


   여기 푸른 안식의 동산에서 우리 친구 김학원 의원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이 부군과 아버지를 뵙고 있습니다. 학형이 오랫동안 섬겼던 왕십리 꽃재교회의 김성복 목사님과 교우들, 친적․친지, 선후배와 벗들 그리고 5월 신록의 기운까지도 학형을 만나려고 여기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 친구, 왜 그리도 재촉하여 떠났으며, 무엇이 그렇게도 다급하여 세상일을 서둘러 접었는가?  어째서 그토록 매정하게 뿌리쳤는지 애오라지 궁금할 뿐이네. 이렇게 통한하면서도 하늘의 뜻을 감히 어찌 우리 어림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섭리인 것을!
  
  그런데 그대 소식을 여기서 선연히 듣고 있네. 거기 구원의 나라에서 안식하고 있다고 빙긋이 웃고 있구려. 그곳은 툭 틘 나라, 평화의 나라, 두려움도, 연민에 겨워할 일도, 질시와 쟁투도 없는 영원한 천국이 아니런가. 거기 안식의 나라, 천상의 그곳으로부터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가슴을 적셔 주시네. 그대를 사무치는 사랑으로 끌어않은 주님께서 또 말씀하시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하시며, 다시금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살피시네.
  
  그대, 우리 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되었구려. 그동안 나라 안은 여러 일들로 어려움들이 적지 않았다네. 우리는 김 의원이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며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네. 이 땅 곳곳을 살피며 민초와 함께 하던 그 큰 발자취들을 잊지 못하네. 우리는 그런 그대를 통하여 위안과 희망을 느끼며, 더 큰 지평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고 있었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리의 주시함이 부질없는 욕심일런가? 그저 세상 법대로 金學元 의원이 있어야 할 곳에 늘 있어 주어야만 된다고 믿었던 생각이 과분했던가? 줄곧 무거운 등짐을 감당해야만 했던 그대에게 또 짐을 지우라고 재촉했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이었음을 고백하네. 이 척박한 세상에서 김학원 학형이 걸머진 등짐이 심히 무겁다는 사실을 감지하면서도, 우리는 산 넘고 또 산 넘어 가시밭길 가는 그대의 묵묵한 고행길을 바라보기만 하며, 단지 든든하다는 위안만으로 덕택에 자족하고 있었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그저 친구가 몽매에도 그리워서, 그런 소회를 감히 이 안식터 앞에서 뒤늦게나마 고백하는 바이네.

  이제, 세상일을 내려놓은 그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천상의 나라에서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고 있음을 보고 있네. 덕망으로 감싸며,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향해 분투 정진하던 실천수행이야말로 형형한 등불로 살아있음을 보고 있네. 그러한 끼침이 여전한 경종으로 세상의 곳곳에 깊이 각인되고 있음을 우리는 선연히 보고 있네.
  
  지금, 김 의원의 음성이 또렷이 들려오는 이 동산에서 한 가지 떠오르는 추억이 있구려. 패기와 열정으로 넘쳐나던 청춘시절, 우리 공주사대부고 7회 동창친구들이 종로 5가에서 월례회동을 할 때의 일이었네. 당시 우리 친구 김학원 학형이 산중에서 불철주야 면학정진하고 있을 때, 매월 7일만 되면 우리 벗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며, 하산을 감행하곤 했던 그대가 아니었나. 그러나 어땠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공주사대부고 동기동창회의 이름으로 김학원 동문을 산방으로 내모는 매정한 권고결의를 주저하지 않았었네. 그런 박정한 친구들을 바라보며 설핏 빙그레 웃던 그대. 그러면서, “한 달에 한 번 만날 뿐인데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라고 말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던 그대의 뒷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네.

  오죽이나 벗들이 보고 싶었으면 그랬겠나. 매달 초이레가 되면 산을 내려와 호산나에 모여 있는 그리운 면면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고백하곤 했던 그대가 아니었나. 우리는 그렇게 간곡한 그대의 뜨끈한 동우애를 애써 물리친 매정한 벗들이었네. 어서 합격증이나 들고 오라고 말일세. 세월이 흘렀어도 그 시절 그 풋풋한 이야기는 참으로 순수시대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구려. 그 후, 우리의 비범한 친구 그대는 마침내 나라의 큰 시험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우리 앞에 다가왔던 자랑스러운 친구였네. 그대는 뒷날의 김학원 판사였고 국가를 바로세우고자 원했던 국회의원(國會議員)이 아니었던가.    
  
  이런 일, 저런 일 다 내려놓은 친구여. 데모스테네스의 장엄한 웅변도, 건너야 할 누비콘도, 뺏고 빼앗기는 마지노 전선도, 비텐베르크의 변론도, 한낱 부질없는 세상사들일 뿐이구려. 이제 거기, 부활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친구여. 그대의 구원한 삶을 축원하고 있네.  친구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다 함께 다시 만나는 날, 못다 한 이야기는 그때로 미뤄 놓기로 하세.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과, 가문과 나라의 동량으로 자란 두 자식 잘 있으니 걱정 놓으시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받들어 되새기며, 추모하는 마음을 적어 삼가 김학원 학형의 영전에 고하오니, 이 아늑한 길지에서 평안히 안식하소서.

                                                            2012년 5월 22일
         
공주사대부고 제7회 이 종 국  삼가 헌배


고인은 보기 드물게 행동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소탈한 성격과 남다른 친화력을 갖춰 주위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바른 가치관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철한 신념의 사람으로 주변으로부터 소신파라 불렸습니다.  그는 “바른 가치관과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꿈꿨던 거인 정치인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람됨은 바른 법조인 출신이라는 점과 실천적 신앙인으로 바로 살고자 했던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고인은 정치인으로서 표를 의식하거나 자기 관리를 위하여 교회에 출석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지역구를 오가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일이면 교회출석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교회 수양관에서 개최한 전교인여름수련회에 평신도 수련회원으로 참석하는가 하면 작고하기 직전에는 주차요원으로 활동하는 등 봉사활동에도 솔선수범을 보였던 순수하고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아쉽게 그는 갔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인 것을 믿는 우리는 남은 자로서 고인이 꿈꾸었던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고 김학원 권사님의 추모예배는
김성복 목사님의 축도로 끝났습니다.  나는 고인 무덤 앞에서 시 한 편  고인에게 바치고 돌아섰습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아 외롭지 않으리
꿈꾸어 온 꽃자리에
영원히 살아 그대 외롭지 않으리

양지 바른 언덕
한 무더기 바람으로 한 떨기 꽃으로
한 무리 날아가는 새들로 벗 삼고

울음의 강 건너
죽음의 강 건너 생명나무 우거진 숲속에
은은히 화답하는 찬미소리 들으며
한 평생 믿음으로 살아
그 넓은 품에 안기는 영광이거니

더 이상의 가슴 졸임도 없는
더 이상의 두려움도 없는
목 늘여 기다리는 애태움도 없는
피 눈물 한 방울도 없는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고
그래서 어제가 내일인 영원 속에 사는 자여

지금 그대 미소 짓는 얼굴
우리 가슴에 살아
영원히 외롭지 않으리
˚

 

 

글.구성 : 남상학 장로(꽃재교회) 

 

 

------------------------------------------------------------------------------

 

※ 2011.05.23 / 중앙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충남 청양 출신인 고인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판사로 재직하다 정치와 인연을 맺는다. 1994년 민자당 서울 성동을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15대 총선에서 당시 야당 중진이던 국민회의 조세형 부총재를 꺾고 당선됐다. 98년에는 김종필 전 총재(JP)의 권유로 자민련에 입당했고 자민련에서 대표까지 지냈다. JP로부터는 지역구(충남 부여)를 물려받을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2006년 2월에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합당에 합의한다. 그 다음해 벌어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선 강창희 전 의원과 함께 박 전 대표를 도와 충청권을 대표하는 친박 핵심 인사로 자리매김했다. 고인은 친박 성향의 모임으로 지난달 14일 출범한 ‘충청미래정책포럼’의 상임공동대표를 맡는 등 최근까지 활동이 왕성했다.


 고인은 원칙을 중시하고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있는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다. 고인과 가까운 구상찬 한나라당 의원은 “항상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선·후배들을 챙기는 스타일로 높은 분에게는 직언도 잘 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고인과 사법시험(25회) 동기인 유기준 한나라당 의원은 “대기업에 다니다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을 함께 다녔는데 항상 웃는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며 “인생 선배이자 정치 선배로서 자상하게 조언을 많이 해줬다”고 회고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차명숙씨와 상기(학생), 정기(학생)씨 2남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