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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성곽따라 한 바퀴, 아픈 역사를 품은 산성엔 유적 즐비

by 혜강(惠江) 2012. 2. 27.

 

 남한산성 성곽 따라 한 바퀴

아픈 역사를 품은 산성엔 유적 즐비  

 

 

글·사진 남상학

 

 

 

 

<산행 코스>

 

역사관 출발(700m)→ 남문(900m)→ 수어장대(600m)→ 서문(1,100m)→북문(1,600m)→ 동장대지(1,100m)→ 동문(1,700m)→ 남문(600m)→주차장 (총 거리 : 약 8㎞)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도립공원은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면적은 36.4㎢, 성의 면적은 598.195㎡로 정상부는 평균 해발고도 300~350m의 분지상(盆地狀) 지형을 이루며, 사방이 산지의 경사면으로 둘러싸여 있다. 1971년 3월 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신라 문무왕 12년(A.D 672)에는 이곳에 토성을 쌓고, 햇빛이 비치는 시간이 다른 곳보다 길다고 하여 주장성(晝長城) 또는 일장성(日長城)이라 하였다.  

  특히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산성이었다. 선조(宣祖) 임금에서 순조(純祖)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후 조선 광해군(光海君) 13년(1621년)에는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기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후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재시작하여 인조 4년(1626년)에 준공하였다.

  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되는데, 인조 때 쌓은 것은 원성이고, 이어 숙종 때 외성을 축조했는데,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 남쪽에 신남성이 있다.

  그런데 인조는 자신이 축성한 남한산성에서 몽진(蒙塵), 항전(抗戰)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맞아야 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하였으나,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렇게 유서가 깊은 남한산성 안에는 여러 문화재들이 흩어져 있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거나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으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현재 성곽에 남아 있는 건물은 몇 안 되는데, 동, 서, 남, 북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또한 성내의 경기도 지정 문화재로는 수어장대, 청량당, 숭열전, 현절사, 침괘정, 연무관이 있고, 문화재자료로는 지수당, 장경사가, 그리고 도기념물로는 망월사지, 개원사지 등이 있다. 
   

  먼저 남한산성역사관에 들러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와 여러 정보를 살펴보고 우리는 남문으로 이동하여 시계방향으로 성곽 따라 걷기로 했다. 이 계획은 남한산성 탐방 코스 중 건강을 다지며 유적을 둘러보는 최상의 것이다.  남한산성 둘레는 11.7㎞(본성 9㎞, 외성 2.7㎞)에 달하는데, 외성을 제외하고 걷는다면 실제거리는 이보다 좀 짧은 7㎞ 남짓, 역사관에서 동문까지의 왕복거리를 합산하면 8㎞ 남짓 되는 거리가 된다.

 

남한산성역사관~남문까지 약 0.9㎞



  오늘 남한산성 산행은 성 안쪽에서 성곽을 따라 걷는 것이다. 남한산성 역사관은 산성 로터리에서 동문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 남한산성 역사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자호란 기록화 전시관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수정하고 보완해 남한산성 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먼저 역사관을 둘러보고 남문으로 이동했다.

  남한산성 역사관에서 산성로터리에 이르는 거리는 왼쪽에 치안센터, 오른쪽에 교회, 연무관, 남한산초등학교를 제외하면 거의 음식점들이다. 로터리 위쪽에는 새로 단장한 행궁(行宮)이 있다. 행궁이란 임금이 도성 밖으로 거동할 때 임시 머무는 곳으로, 남한산성 행궁은 외침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후원군이 올 때까지 보장처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행궁 중에서 유일하게 종사(宗社)를 갖추었으며, 숙종, 영조 정조 등이 능행차시 머물렀다고 한다.  인조 4년(1626년)에 지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방치되어 허물어진 것을 1999년부터 복원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시범개방하고 있다.

  산성로터리에서 남한산성 비석군(碑石群)을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면 바로 남문이다. 남한산성 비석군은 성내의 비석 30기를 한곳으로 모아 놓은 곳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 등의 비석들이 있다. 비석들은 남문 바로 앞에도 있다.

  남문은 남한산성의 4문 중 남쪽에 있는 문으로, 남한산성의 4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하며 중심문에 해당한다.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문(至和門)이라 칭하였고,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거쳐 서문까지 약 1.6㎞

  1636년 병자년 겨울, 인조는 청나라의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떠났다. 인조는 이 남문을 통해 들어가 47일간 버티다가 4대문 중 가장 외지고 작은 서문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남문은 정문임으로 죄인은 드나들 수 없다’는 청군의 통보에 따른 것이다. 지금 남문은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역할을 한다.

  치욕의 역사를 안고 있는 지화문에 올라서니 성남과 서울 수서 쪽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고, 수어장대로 오르는 북쪽 방향의 산성이 산세를 타고 길게 이어져 있다. 여기서부터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경사를 따라 축성된 성곽이라 안정감이 없고 불안해 보인다. 

 

  남문에서 수어장대까지 가는 길은 남한산성 인근에서 제일 높은 청량산(482m) 봉우리를 오르는 길이다. 나무계단에 이어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남문에서 700m 거리의 언덕 위에 오르니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8각정의 영춘정이 눈에 들어온다.  영춘정은 원래는 남문 아래에 있었는데 위쪽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왼편으로 성남 비행장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서울 강남권과 한강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분당과 수서도 지척이다. 날씨에 비해 가시(可視)거리가 짧은 탓에 시야가 흐렸지만 남산도 보이고 북한산도 보였다.


  영춘정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내려오니 성곽 아래 암문이 보인다. 표지석에 제6남문 서암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암문의 폭은 77cm이고 높이는 155cm에 불과해 성인 1명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비밀 통로이기 때문에 크기도 성문보다 작게 하고, 문루나 육축 등 쉽게 식별될 수 있는 시설을 하지 않았다. 암문의 기능은 성내에 필요한 병기, 식량 등 항쟁물자를 운반하고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적의 눈에 띄지 않게 구원요청은 물론 원병을 받고 역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에는 16개의 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다시 언덕을 오르면 우측 언덕 위로 보이는 건물이 서장대인 수어장대(守禦將臺)다.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다. 수어장대는 입구에 360년 된 향나무와 함께 잘 자란 노송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 준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 다섯 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으며,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인조 2년(1624) 단층으로 축조한 것을 영조 27년(1751) 2층 누각을 증축하고 외부 편액을 수어장대, 내부 편액을 무망루(無忘樓)라 이름 하였다. 수어장대의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어장대 우측에는 무망루라는 비각과 이승만대통령이 남한산성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여 식수한 튼실한 나무가 있다. 또 앞마당 한쪽 모퉁이에는 이회(李晦)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한이 깃들어 있는 매바위가 있다. 


  이회는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자로서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주색잡기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을 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장군이 모함을 받아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다 날아간 바위엔 매 발자국이 남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매바위에는 실제로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어떤 일본인 관리가 남한산성을 둘러보다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신기한 일이라 여겨서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어 떼어 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일본 관리가 떼어갔음을 말해주는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억울한 죽음에는 하찮은 미물도 같이 교감한다는 교훈을 일깨워준다.  
  

  수어장대 옆의 청량당(淸凉堂)은 이회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건립한 사당이라고 전해온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 송씨 그리고 벽암대사(碧巖大師)의 초상화가 안치되어 있다. 벽암대사는 남한산성 축성시에 축성에 지극한 공을 세운 승려였다. 그는 구례 화엄사 출신으로 당시 승려를 대표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겸 총절제중군주장(總節制中軍主將)을 맡았는데, 축성과 함께 남한산성이 공성(空城, 빈성)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산성 안에 7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수어장대에서 서문 쪽으로 약 200m 정도 내려가면 길 우측으로 제법 육중한 두 개의 바

위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다. 정조3년(1779) 6월 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이다.

 

   다시 200여m 내려가면 산성 북동쪽에 있는 서문에 당도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고도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서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성인 남자 셋이 나란히 서면 문이 꽉 막힐 정도였고 높이도 2m를 넘길까 말까 했다. 

 

 

 

* 서문에서 연주봉옹성, 북장대 터를 지나 북문까지 약 1.1㎞


  서문에 올라서서 잠시 생각해 본다. 청 태종은 인조에게 이 작은 문을 통과해 삼전도까지 두 발로 걸어오라 명했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갈 때 이 문을 지났다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울컥해진다. 서문 밖으로 나가 전망대에 서서 옛 삼전도, 지금의 석촌호수 쪽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인조가 걸었던 길을 눈으로 따라가 봤다. 거리가 꽤 멀었다.

  서문에서 오르막길을 200m쯤 올라가면 매탄지가 나온다. 매탄지는 병자년 강추위를 경험한 뒤 유사시를 대비해 숯을 묻어둔 곳으로 남항산성에만 94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병자년의 겨울추위가 얼마다 혹독하고 잔인했으면 이토록 많은 양을 대비하였을까?    


  여기서 조금 지나면 남한산성 제5암문이다. 그런데 이 암문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역할을 하는 것이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었는데, 연주봉 옹성은 둘레가 315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연주봉옹성은 남한산성 서북쪽 서문과 북문 사이 요충지인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과 팔당댐과 하남시 검단산이 조망되고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보인다.  

 

 이 옹성의 둘레는 315m로 전투 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도록 옹성과 본성성벽이 만나는 위치에 암문이 설치했다. 이 옹성에도 포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확인되지는 않는다. 암문을 통하여 성내로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옹성의 끝부분에는 원형의 석축구조물이 있다. 보수작업에 의하여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지만 고풍스러운 멋은 없어 보인다. 

 

  여기서 약 400여m 정도 이동하면 북장대터가 나온다. 장대는 전투시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처소를 말한다. 장대는 성내의 지형 중 가장 높고, 지휘와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하였다. 성이 넓어 한곳의 장대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경우 각 방면에다 장대를 마련하였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각 방면에 각각 하나씩 4개의 장대와 봉암성에 외동장대를 설치하여 5개의 장대가 있었다. 그 중 북장대는 남한산성의 북쪽지역을 지휘, 관측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동장대를 제외한 4장대는 17세기 말엽까지는 단층 누각건물의 형태로 남아있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5장대 모두 붕괴되어 터만 남아있게 되었는데, 그중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북장대터를 지나 북문까지 이르는 길 주변은 소나무 숲이다. 이 숲이 좋아 남한산성을 찾아오는 탐방객들은 남문-서문-북문 코스를 즐겨찾는다. 청량감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길에서 심호흡을 하며 북문으로 내려왔다.   

 

 

* 북문에서 동장대 터를 지나 동문까지 2.7㎞


  북문은 남한산성 북쪽 해발 367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는데 그 중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북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사를 맞아 힘껏 싸웠으나 적의 계략에 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고도 하는데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그 이름을 전승문(戰勝門)이라고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남문에서 서문까지는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있었지만 수어장대에서부터는 내리막이고, 서문에서 북문까지는 성곽길이지만 비교적 평탄하고 걷기에 알맞은 길이다. 그러나 북문에서 시계방향으로 동문 쪽으로 가는 길은 초반부터 오르막이다. 심호흡을 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면서 몇 차례 발길을 멈추고 쉬어야 했다. 따라서 성벽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숲도 소나무 일색에서 소나무와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뒤섞인 혼합림으로 슬그머니 달라진다. 그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적막강산처럼 인적이 뜸하다. 덕택에 새소리, 바람소리가 한결 가깝게 들려온다. 녹음 짙은 숲을 쓰다듬듯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유난히 맑고 시원스럽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지루하게 한참을 걸어가다 제1 군포터(軍鋪址)를 만났다. 군포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 내에는 125개소의 군포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군포터라는 것이 알려진 것은 주춧돌과 와편, 그리고 조총탄환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발길을 재촉하면 옥정사터가 나온다. 남한산성의 축성과 관련된 사찰은 10개가 있는데, 이중 옥정사 등 8개의 사찰은 본성 내에, 동림사는 봉암성 내에, 영원사는 한봉성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옥정사와 망월사는 남한산성 축성 이전에 있었던 사찰인데 그후 일제에 의하여 파괴되어 지금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어 제2군포대지가 있다.

  제2군포대지를 지나고 제4암문(북암문)이다. 이 암문을 지나 가파른 길을 넘어간다. 숨을 몰아쉬며 돌계단을 오르니 다시 내리막길이다.  다시 암문이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제3암문(봉암성 암문)이다. 암문은 보통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비밀통로여서 그 크기도 작은 편이지만, 이 암문은 원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서 다른 암문에 비하여 매우 큰 편이다. 이 암문은 문 윗부분이 무지개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홍예문이며 폭과 높이 등 규모가 매우 크다.

  봉암성 암문에서 이어지는 벌봉(봉암)은 해발 512m로 남한산성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청나라 군사가 이 벌봉에 올라 성 내부를 들여다보고 화포를 쐈다. 병자호란 때 벌봉 일대가 남한산성의 약점으로 드러나자 숙종은 1686년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아 본성과 이으라고 지시했다. 이에 부윤 윤지선(尹趾善)이 쌓았는데, 둘레가 962보(3천180㎡)로 7리(2.7㎞)가 되며 여장이 294개, 암문이 4개, 군포가 15군데였다. 또한 한봉성(漢峯城)은 영조15년(1739)에 개축했는데 둘레가 895보, 여장이 272타라고 했다. 여장(女墻)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을 가리킨다.

  봉암성은 남한산성 북동쪽 능선의 꼭짓점이라 할 수 있는 동장대터 부근에서 시작됐다. 보수와 개축을 기다리는 봉암성은 바람에 깎이고 여기저기가 무너져 앉은 봉암성의 시간은 1686년에 멈춰 있는 듯했다.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자는 취지로 봉암성에는 더 이상의 손상을 막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만 취해졌다.

 

  동장터에서 벌봉(봉암성)은 바라보기만 하고 본성의 성곽을 따라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길은 소나무는 찾아보기 어렵고, 단풍나무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활엽수림으로 바뀐다. 길도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 중간에 다시 군포지가 나오고, 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암문)이다. 이 암문으로 이어지는 장경사신지 옹성은 둘레가 127보(419㎡)에 여장이 40개였다.  과 장경사가 자리 잡고 있다.제2암문(장경사신지옹성암문)이다. 이 옹성 역시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해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본성의 성벽 아래에는 옹성으로 통하는 암문이 설치돼 있어서 적들의 눈을 피해 은밀히 드나들 수 있다.

  암문을 지나 바로 만나는 장경사는 산사다운 고즈넉함과 호젓함이 돋보이는 절집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할 당시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새로 세운 여러 절집 가운데 하나다. 축성공사에 동원된 승군들은 공사가 끝난 뒤에도 성곽 방어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계속 주둔했다고 한다.

  당시 장경사 뿐만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망월사, 옥정사와 새로 지은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동림사, 천주사, 남단사 등 9개 사찰을 승군들의 거처로 활용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사찰은 장경사뿐이다. 남한산성의 제일 명당터를 차지한 덕택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전쟁을 비롯한 전란 속에서도 거의 피해를 보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장경사에서 동문으로 내려오는 성곽길은 산허리를 에두르는 멋을 지니고 있다. 그 중간에 성곽 바로 앞에 송암정 터가 있다. 송암정은 솔바위 정자라는 뜻이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중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이 때 그 무리 중 감명을 받은 기생 하나가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는데, 그 후 달 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 한다. 이 바위에 있는 고사목(소나무)는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 벼슬을 내려 대부송으로 불리는 소나무다. 

  이곳을 지나면 동문이다. 서문을 우익문(右翼門)이라고 하듯이 동문을 좌익문(左翼門)이라고도 한다. 동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산성로(342번 지방도)가 지난다. 고요한 숲길을 걸어오다가 갑작스레 만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낯설게 느껴졌다. 휴식 겸 식사를 하려고 동문 옆 의자에 앉아 간식으로 시장기를 해결하고 다시 일어섰다.    

 

 

 

* 동문에서 남장대 터를 지나 남문까지 1.7㎞ 

   
  동문을 지나 차량들이 달리는 길을 건넜다. 물길이 지나는 수구문이다. 산성 내에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하였다. 성내에는 크게 네 개의 개울이 있었다. 계곡에서 각각 흘러내린 물이 지수당 부근에서 합류되어 동벽에 구축된 수구문을 통하여 성밖으로 흐른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이 개울물로 물레방아 8개를 돌릴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였다고 한다. 이어 암문이 나타난다.

  다시 산길을 오른다.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로 만나는 깔딱 고개다. 남문에서 수어장대까지, 그리고 북문에서 동장대 터로 오르는 오르막길에 이어 세 번째다. 건너편에서 내려오면서 여유롭게 쳐다보던 그 성곽길이 이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며 오르는 길이 되었다.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길처럼 울창한 소나무 숲도 없고 팍팍한 길이라 이 rk길을 찾는 이들도 많지 않다. 

  이 구간은 비밀통로인 암문들이 유독 많은 구간이다. 성곽 밖으로 또 다른 성곽을 쌓은 옹성도 연이어 나타났다. 유독 남쪽에 옹성이 많은 이유는 북쪽이나 동쪽, 서쪽에 비해 남쪽의 경사가 가장 완만하여 방어에 취약하여 검복리 방면에서 계곡의 완경사면을 따라 올라와 해발 537.7m인 검단산 정상을 확보하거나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옹성은 3개인데 1옹성은 둘레가 344보(1천137㎡)에 여장이 109개이고 2옹성은 둘레가 276보(912㎡)에 여장이 87개이며, 3옹성은 둘레가 98보(323㎡)에 여장이 31개였다. 제2남옹성 앞에는 남장대 터가 있다. 남장대는 정조 12년(1788)에 대의 상층에 누를 세우고 타운루(唾雲樓)라 편액(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을 올렸다.

 

  제3남옹성, 제2남옹성, 제1남옹성을 지나 아래로 저만큼 남문인 지화문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또 남문 밖 거대한 느티나무도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뒤로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이어지는 성벽이 뱀의 몸통처럼 가물거린다.   

 

  남문 위에 당도하여 인증 삿을 날리고 동행인과의 하이파이브로 성곽도보 완주를 마무리했다. 대부분 남한산성에 오는 사람들은 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을 지나 다시 산성로터리로 돌아오거나 그 역순으로 산행을 즐긴다. 이 길은 3.8㎞ 길이로 다 돌아보는 데 1시간20분쯤 걸렸다. 이 길은 대부분은 널찍한 포장도로를 걸게 되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곽 옆을 따라 오르내리기를 8㎞, 4시간 동안 각종 나무들을 벗 삼고 흙을 밟으며 걷는 길이 너무 좋았다. 나는 성곽에 기대어 유치환의 시 <남한산성>을 되뇌어본다.

넌 제왕(帝王)에 길드린 교룡(蛟龍)
화석(化石) 되는 마음에 이끼가 끼여
승천(昇天)하는 꿈을 길러준 열수(洌水)
목이 째지라 울어예가도
저녁 놀빛을 걷어 올리고 
어데 비바람 있슴직도 안해라


  구불구불 산 능선을 타고 기어오르는 성곽을 교룡으로 날아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성곽은 그랬다. 세월이 구비구비 흘러도 사연을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침묵하고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산성로터리 주차장 옆에 있는 <산성손두부>(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14, 031-749-4763)에서 완주를 자축하며 늦은 점심을 했다. 동행한 옆자리의 오용환 교장은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나더니 ‘얼얼 알딸딸’하다며 이 기분을 누가 알겠느냐고 기뻐한다. ‘얼얼’은 나른함이 겹쳤다는 표현이고, ‘알딸딸’은 온뭄이 취기에 휩싸인다는 뜻이라고 했다. 술을 할 줄 모르는 나는 ‘얼얼’한 기분으로 만족해야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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