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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인천. 경기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찾아서

by 혜강(惠江) 2012. 3. 7.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찾아서

 

 

글·사진 남상학

 

 

 



  인천 송도(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Memorial Hall for Incheon Landing Operation)은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있은 지 44년만인 1984년 9월 15일에 6.25전쟁 당시 전세(戰勢)의 역전에 결정적 계기가 된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에 건립하였다.

  이 기념관은 1950념 공산세력의 불법침략으로 함락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UN의 깃발 아래 목숨을 바쳐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우방국가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구히 기리고 그 뜻을 소중히 하기 위하여 이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차원에서 기념 보존함과 동시 참전국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자유민주수호의 실증적 교육장으로 활용함을 목적하고자 전적기념관으로 건립하였다.

 

 

 


  인천시 청량산 기슭에 위치한 이 기념관은 대지 24,347㎡, 건물면적 1,793㎡대단한 규모의 기념관이다. 기념관은 야외전시관을 비롯하여 실내전시관과 영상실, 자유수호의 탑, 전망대, 야외전시장 및 야외공연장, 소공원 등으로 꾸며 놓았다. 또 인공폭포,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라운지, 매점, 소공원, 물레방아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동족상잔의 미친 물결이
   문득 북에서 밀려와
   욕된 침략에 짓밟히던 날
   온 세계의 바른 뜻 일어나 단결하여
   전사에 길이 빛날
   상륙전의 개가를 올린 곳
   여기 인천
   온 겨레 살 길과
   자유를 되찾은 싸움의 옛 터전이며
   그로써 나라를 버틴 역사의 현장이다
   그 매운 정신 횃불처럼
   민족의 가슴을 밝히는 언덕에
   용사들의 뜻을 기리는
   시민의 정성을 모아 기념관을 세우니
   하루 빨리 이 강산 한 덩어리 되도록
   저 산과 바다에
   우리 모두 맹세하며 나가는 바탕 되리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주차장 옆에 M-47전차 한 대가 눈에 띄었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니 육중한 대리석 벽이 근엄하게 버티고 서 있고, 그 위에 참전국가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대리석 벽으로 싸인 통로를 지나 입구에 서면 인천상륙작전 건립 취지문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상륙작전에 이용된 피아(彼我) 무기를 전시한 야외전시관


  돌계단을 올라서면 전시관, 6.25전쟁시 사용한 피·아 무기류, 남·북한 군민복장 비교, 인천상륙작전 디오라마 등이 전시가 되어있는 전시관과 인천상륙작전과 관련된 D.V.D를 상영하는 영상실, 휴게실 등 실내공간을 제외하면 모든 야외공간은 야외전시장을 조성했다.

  이 야외전시장에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위용을 떨쳤던 L.V.T를 비롯한 L.C.M, L.C.V.P 등의 상륙주정, F-86세이버 전투기, M-47전차, 4.2인치 함포, 북한 고사 기관총, 호크유도탄 등 10종 13점의 장비와 해벽을 넘는 미해병대원의 조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대형 무기들이 한국전쟁에서 무고한 인명과 재산을 엄청나게 빼앗아 갔다는 것을 생각하니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에게 분노의 마을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전시관


  야외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서 전시관을 관람했다. 전시관에는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에서부터 휴전까지의 과정이 설명되어 있고 그때 전쟁에서 사용한 각종 무기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6.25의 전황판, 인천상륙작전의 디오라마, 전함과 상륙주정(LSD)의 모형, 전함의 모형, 맥아더 장군의 기념물과 함께 한국전쟁의 원인, 인천상륙작전,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 인천홍보 등을 영상물로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이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므로 인천상륙작전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실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본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에서 개시한 상륙작전이다. 6·25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를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 공산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이 지역에서 타격을 입고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MacArthur,D.S.) 원수가 전쟁 직후 한강에 이르러 전선을 시찰할 때 구상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미지상군을 수원 부근에 신속히 투입하여 북한 공산군의 주력 부대를 그곳에 머물게 하는 한편, 인천 부근에 미 제1기병사단을 상륙시켜 공산군 주력 부대의 배후를 공격하려 하였다.

  그는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 중에서 필요한 인원을 뽑아 합동작전기획단을 따로 편성하고, 이 기구로 하여금 그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합동작전기획단은 인천·군산·주문진 세 군데에서 상륙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였다.

  세 가지 대안 중 주요 작전계획을 확정하기 위한 최종 검토과정에서 유엔군 총사령부의 상부기관인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은 큰 모험이라고 하면서 작전하기에 훨씬 안전하고 또 성과가 확실시되는 군산으로 상륙하라고 종용하였다. 유엔군 총사령부의 참모진과 해군 및 해병대 장교들 사이의 중론은 인천상륙만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천은 세 지역 가운데에서 가장 멀고 깊은 곳이어서 작전을 지원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조수·간만·지형 등 자연조건도 불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인천상륙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인천상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 불리한 점 때문에 공산군도 인천 일대에 대한 방어를 소홀히 할 것이며, 따라서 그 허점을 찔러 기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는 지름길이어서 유엔군이 한번 경인지구를 장악하게 되면 북한 공산군의 병참선을 끊어 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므로,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가장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미합동참모본부의 수뇌들은 인천상륙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면서도, 현지 야전 지휘관에게 최대한의 작전 재량권을 부여해 주는 미국 군부의 오랜 전통과, 대일전(對日戰)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원수에 대한 신망으로 인하여, 그의 계획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승인하였다.

  이 작전은 아먼드(Almond,E.M.)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0군단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그 휘하에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 주축을 이루었다. 또한, 백인엽(白仁燁)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17보병연대가 미 제7보병사단에, 국군 해병 4개 대대가 미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전력을 보강하였다.

  상륙 부대의 병력은 총 7만여 명에 달하였다. 주력 부대의 일부는 이미 9월 초부터 부산 근처에 집결해 있었고, 나머지는 9월 11일 제90기동함대와 함께 일본에서 출발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국군해병대는 유엔 해군함대의 지원 포격을 받으며 군산·목포·포항·영덕 등 동서 해안 여러 곳에서 일련의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9월 15일 새벽 2시 함포 지원전대를 포함한 미해군 공격전대가 상륙 부대의 제1진인 미 제5해병연대 3대대와 M26퍼싱전차 1개 소대를 싣고 월미도를 향해 떠나기 시작하였다. 새벽 5시 북한 공산군의 방어진지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7척의 상륙용 주정으로 월미도에 도착한 상륙 부대는 상륙을 시작하였다.

  북한 공산군 해병 제266독립연대 3대대와 제918포병연대 소속 병력 등 400여 명은 처음에는 산발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유엔군의 화력에 압도되어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미제5해병연대 3대대의 월미도 일대 녹색해안(Green Beach) 상륙작전은 오전 중에 성공리에 진행되었다. 이어 인천항이 만조가 된 오후 5시경부터 유엔 해군과 공군의 엄호사격이 다시 시작되면서 미 제5해병연대의 2개 대대가 인천항 북반의 적색해안(Red Beach)에, 미 제1해병연대는 인천항 남쪽의 청색해안(Blue Beach)에 각각 상륙하였다.

  또한, 월미도 맞은편의 황색해안(Yellow Beach)에서는 인천 시가지에 대한 정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공산군은 서울위수 제18사단과 인천경비 여단, 그리고 제31여단 예하의 1개 대대 등을 인천 일대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내륙으로 진입, 9월 16일 밤에는 예정된 교두보를 확보하고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서울을 쉽게 되찾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된 북한 공산군 주력 부대의 병참선을 일시에 끊어 버림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를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천상륙작전 시 피해상황을 보면, 아군의 손실은 인천으로부터 서울에 이르는 동안 가장 결렬한 전투를 치렀던 미 제1해병사단이 전사 4백 15명, 부상 2천 29명, 실종 6명으로 가장 많은 손실을 보았으며, 그 다음으로 한국해병대가 전사 97명, 부상 3백여 명, 그리고 실종 16명이었다. 미 제7사단중의 제32연대도 전사 66명, 부상 272명, 그리고 실종이 47명이었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의 총손실은 대체로 약 4천여 명 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북한군의 직접적으로 입은 손실은 사살이 1만 4천여 명, 포로 7천여 명, 전차 손실 50여 대에 달하였다. 한편 이 작전과 관련하여 북한군이 38도선 이남에서 입은 총손실은 전사상 20여만 명, 포로 13만 5천여 명 등 총 33만 5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 작전 이후 북한군은 공격능력이 소멸되고 저항능력마저 거의 상실되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은 야심적인 작전계획의 수립과 신속한 준비과정, 그리고 과감한 작전 수행 등으로 요약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세계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장애요인을 극복하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말미암아 전사의 한 장을 장식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제반 악조건을 기습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작전수행상 악조건이 때로는 기습달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역이용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입증하였다는데 의미가 크다.

   인천상륙작전에 반대의 입장이었던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작전의 성공보고를 받은 후 맥아더 장군에게 축전을 보내어 "귀관이 수립한 공세이전 계획, 시기의 선택, 그리고 그 실행은 참으로 훌륭하였다"고 극찬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은 전쟁원칙이 적절히 반영된 결과였다.

 

 

 

 

격전의 현장을 지키며 우뚝 선 자유수호의 탑


  
  전시관에서 부듯한 마음으로 전시관과 영상실 사이 계단으로 올라섰다. 그곳에는  자유수호의 탑이 격전의 현장을 바라보며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탑의 대리석 기단 가운데에는 시인 한상억 씨의 시를 새겼고, 기단 위에는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용감한 장병 세 사람의 상(像) 뒤로 높은 탑을 세웠다. 그리 고 탑 뒤에는 용감무쌍한 용사들의 전투장면을 부조로 둘렀다.

 

  “피에 주린 북괴의 공산남침으로 삼천리 금수감산이 욕된 발길에 더럽혀지던 날 우리의 용감한 국군과 자유를 사랑하는 유엔군이 뭉쳐서 일어나 9.15상륙작전의 승전고를 울린 곳 여기가 인천!  민족의 소생을 가름한 결전의 터전이며, 멸공의 의지를 신념화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 날의 뜨거운 정신이 횃불처럼 밝혀진 언덕에 정의와 자유를 지킨 용사들의 얼을 기려 이 위대한 구국의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중략) 기념관을 짓고 이 비를 세우니 갈라진 나라 한 덩어리 될 때까지 밝게 타오르는 성화의 뜻 겨레의 가슴에 새겨져 저 바다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취지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민족의 소생을 가름한 결전의 터전” “멸공의 의지를 신념화한 역사의 현장”이란 문구였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은 풍전등화와 같았던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U.N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에 의해 계획된 작전으로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협소한 수로,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제반 악조건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수도 서울을 수복하고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글을 읽다보면 이곳 기념관은 인천시민들의 정성으로 건립된 것이다. 이들은 “온 겨레 살 길과 자유를 되찾은 싸움의 옛 터전, 나라를 버틴 역사의 현장에 “ 그 매운 정신 횃불처럼 민족의 가슴을 밝히는 언덕에 용사들의 뜻을 기려”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소원은 ”하루빨리 이 강산 한 덩어리 되도록” 천지에 맹세하며 나가자는 것이다. 이런 바람과 각오는 어지 인천 시민뿐이겠는가. 자유슈호의 탑에 올라서면 인천 앞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서해안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이 현판은 한국동란 중 인천상륙작전에 참전, 자유와 평화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미해병 제1사단 찬전용사들의 무훈과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미해병 제1사단협회에서 기증한 것임.

 

 

 

 

교육장으로 활용되는 영상실 


  250석을 갖춘 영상실은 9.15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영상물 상영과 인천시내 학생들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영상물(인천상륙작전과 평화의 비젼)은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상영하고 있으며, 단체관람시 사전예약에 의해 상영이 가능하다. 상영시간은 15분. 또한 매주 일요일 오후 2시에는 건전영화를 무료로 상영한다.


  전시관, 자유수호의 탑, 영상실을 둘러보고 다시 야외광장을 거쳐 내려오면서 나는 상륙작전이 있었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나는 당시 인천에서 44㎞ 거리에 위치한 대이작도(大伊作島)에서 살고 있었다. 쾌청한 날이면 어렴풋이 인천이 보이기도 했다. 쾌속선으로 불과 1시간 거리였으니까. 6.25전쟁이 한창일 때 11살 어린 섬 아이였던 나는 해상이 봉쇄된 상태에서 피난을 갈 수가 없었고, 섬에 고립되어 있었다. 피아간의 전투기들이 하늘을 날며 위협할 때에는 혹시라도 집이 폭격을 당할까 염려하여 가족과 함께 산속으로 숨어들어 몸을 숨겼다. 숨겨봤자 소나무 숲에 몸을 가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산등이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어느 날,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에 나는 너무도 놀랐다. 멀리 인천 쪽에서 연거푸 조명탄이 터져 인천시가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뚜렷하게 보였고, 바다에 뜬 함정에서 인천을 향하여 연신 쏘아대는 포탄과 그것이 터져 불바다를 이루는 장면을 목격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인천상륙작전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동네아이들과 심심풀이로 땅뺏기를 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큰 병정놀이를 구경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한편으로 공포감이 엄습하면서 이제 세상이 끝장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이제 다시 나는 그 현장에 서서 그날을 되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적의 침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쳤는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인생의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다. 지금 나는 그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곳에 서서 질문을 던진다. “누구 때문인가?” “전범(戰犯)은 누구인가?”

  그런데 6.25전쟁을 아직도 남쪽에서 일으킨 것으로 믿는 자들이 있고, 북쪽에서 일으킨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말로 미화시켜 호도하려는 종북주의자(縱北主義者)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두렷하고 확실한 기록들이 도처에서 발굴, 공개되고 있는 데도 그들은 눈 아예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북한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를 위해 귀중한 목숨을 희생한 영웅들 앞에 송구한 마음을 가늘 수 없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고, 조국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추모심을 가져보는 것이다. 더구나 자유수호를 위해 낯선 남의 땅에 와서 고귀한 생명을 바친 젊은이들에게는 한없는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전시관 입구에 적혀 있는 시인 모윤숙 여사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제목의 시가 더욱 가슴을 적신다. 

 

  바람이여! 저 이름 모를 새들이여!
  그대들이 지나는 어느 길 위에서나 
  고생하는 내 나라의 동포를 만나거든
  부디 일러 다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저 가볍게 날으는 봄나라 새여
  혹시 네가 날으는 어느 창가에서 
  내 사랑하는 소녀를 만나거든
  나를 그리워 울지 말고 거룩한 조국을 위해 
  울어 달라고 일러다고.
  조국이여! 동포여! 내 사랑하는 소녀여!
  나는 그대들의 행복을 위해 간다.
  내가 못 이룬 소원, 물리칮 못한 원수,
  나를 위해 내 청춘을 위해 물리쳐 다오.
      (중략)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운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른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솟아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말을.

 

   -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일부


 

* 찾아가는 길

지하철을 타고 동인천에서 내려 송도 가는 시내버스를 탄 후 송도유원지 로타리에서 내려 산쪽을 향해 큰 길로 걸어가면 보인다. 지하철 인천 1호선을 타면 동막역에서 내린 후 6-1, 8, 16번 등 시내버스를 타고 송도유원지에서 내려 산쪽을 향해 길 양 옆의 모텔들 숲을 지나 올라가면 된다. 로터리에서 바다 쪽이 아닌 산 쪽으로 큰길을 보면 산중턱에 장엄한 전시장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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