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가 찾아간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지 5곳
박경일 기자
한 해 동안 문화일보가 찾아갔던 여행지들. 제주 절물휴양림의 삼나무 숲, 강원 인제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 경남 고성의 당동만, 충북 단양의 충주호, 강원 인제의 설악산 봉정암. 이곳이 자연 풍광 또는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들로 출렁거렸던 곳들이다.
제주,오름에서 굽어본 고요한 풍경
제주는 한 해 동안 문화일보가 가장 많이 찾았던 여행지였다. 2011년은 제주가 ‘세계 7대 자연경관’에 도전장을 내민 해였던 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누린 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주야 기왕에도 외국인들에게는 물론, 내국인들에게도 가장 매력적인 여행지로 꼽히는 곳이었지만, 올해는 유독 성수기며 비수기 가릴 것 없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올레길 열풍이 휩쓸고 있는 제주에서 문화일보는 제주의 새로운 관광포인트로 오름에 주목했다. 봄에는 야생화가 만발한 절물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을, 가을에는 동거믄오름, 손지오름, 지미오름을 다녀왔다. 오름의 아름다움은 입체적이었다. 오름의 부드러운 선은 매혹적이었고, 오름 아래로 구릉에 들어선 목장은 평화로웠다. 오름에서 먼바다를 굽어보노라면 가슴이 저릿해질 정도였다. 돌이켜보자면 제주는 다녀올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는 땅이었다.
여기다가 제주에 대한 기억을 덧붙이자면 두 명의 휠체어 여성 장애인과 함께 다녀온 여정을 빼놓을 수 없겠다. 전동휠체어에 의지한 휠체어 여행작가 전윤선(여·45)씨와 장애인 여행전문가 하석미(여·36)씨와 동행했던 제주 여행은 왠지 모를 미안함으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비장애인들의 편견과 차별을 이기고 길에 나선 이들의 행로는 가슴 저릿한 감동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여행길에서 횡포와 몰이해와 수시로 마주쳤지만 이들의 여정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을 허무는 것은 작은 배려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더 안타까웠다. 제주에 장애인을 위한 올레길이 생겨나고, 제주 일원의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지도가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설악 봉정암… 오체투지로 오르는 순례의 길
설악산 봉정암을 찾았던 것은 신록의 기운으로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초여름이었다. 그러나 설악의 수려한 산세보다, 깊은 계곡보다, 마음을 움직인 것은 봉정암을 오르는 오체투지와 같은 고행을 감내하는 순례자들이었다. 설악이 품은 눈부신 진짜 아름다움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은 그저 눈으로만 보는 것이고 쉬 잊히는 것이지만, 거친 산길을 오르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 혹은 기도는 오래도록 감동으로 남아 마음 한쪽을 묵직하게 눌렀다.
소청봉 아래 해발 1224m 높이에 들어선 암자 봉정암은 설악산 종주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는 무심히 스쳐 지나는 대피소쯤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도를 품고 가는 ‘어머니’들에게는 고난의 순례길에 다름아니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원색의 등산복 대신 남루한 평상복을 입고, 단단한 등산화 대신 운동화나 고무신을 끌고 네발로 기다시피 산길을 올랐다. 11㎞의 산길은 젊은 등산객들도 숨이 턱에 닿고 허벅지가 팍팍해지는 거친 길. 휙휙 앞서 가는 젊은 등산객들에게 끊임없이 추월을 당하면서 ‘어머니’들은 관절염이 도진 다리를 질질 끌며 그 길에 자신의 고통을 바쳤다.
이들을 암자 위로 끌어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만큼 간절했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단 한 가지, 바로 자식들이었다. 하기야 삶의 끝에 선 허리 굽은 할머니들에게 스스로를 위한 욕망 따위는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거기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거친 산길은 할머니들에게는 스스로를 위한 욕망이나 기원만으로 당도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7시간을 넘게 걸어서 봉정암에 당도한 누추한 차림의 한 할머니가 자식을 위한 간절한 소망으로 사리탑 앞에서 밤새워 쓰러질 듯 3000배를 올리고 있었다. 거기서 750번이 넘게 봉정암을 올랐다는 팔순 노인인 ‘만덕행 보살’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기사에 담았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아들로부터 ‘감사하다’는 e메일을 받았다. ‘만덕행 보살을 한 번만 뵙고 싶다’는 답신을 보냈으나 완곡한 거절의 의사만 전달받았다.
동토의 충주호… 겨울 북유럽의 호수를 만나다
올 초 겨울의 추위는 혹독했다. 다시 찾아온 겨울의 한파로 그때의 기억을 다 잊었을 테지만, 지난해의 추위는 참으로 매서웠다. 서해는 얼어붙어 유빙들이 떠돌고 남쪽 바다의 물고기들마저 얼어 죽었다. 남쪽의 동백들마저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한 채 얼어 죽었을 정도였으니 한반도가 ‘냉동고’로 비유된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 추웠던 겨울은 우리 땅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북구의 풍경을 보여줬다. 충북 단양을 휘감아 흐르는 남한강과 그 아래 충주호가 꽁꽁 얼어붙었고, 밤새 얼어붙었던 충주호에 유람선이 떴다. 그 풍경을 보러 충북 단양 장회나루 뒤편에 우뚝 솟은 제비봉에 올랐다. 칼바람 몰아치는 혹한의 이른 아침. 제비봉의 능선에 올라서 굽어본 충주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두껍게 언 얼음을 우지직 부수며 대형 유람선이 물길을 냈다. 깨진 얼음 사이로 물길이 푸르게 드러났다. 드르륵 드르륵 깨진 얼음이 뱃전을 긁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깨진 얼음 조각은 금세 다시 얼어붙었고, 그 얼어붙은 강물 위로 S자의 곡선을 그리며 떠가는 유람선들의 모습은 북유럽의 피오르 해안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경험으로 보자면 낯선 것들과 만날 때, 여행의 감흥은 더 커지게 마련. 그렇다면 쩡쩡 얼어붙는 한겨울에 유빙으로 가득한 북유럽의 호수 풍경을 보여주는 충주호는 겨울 여행의 감흥을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제비봉은 정상까지 서너 시간이 걸리는 만만찮은 산이지만, 이런 풍경은 10분 남짓만 올라서서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다. 물론 제대로 보겠다면 고도를 더 높여 8부 능선의 나무덱까지 올라야 하지만, 잠깐 올라서 등 뒤로 펼쳐지는 얼어붙은 호수의 풍경을 보게 된다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생각에 숨을 고르고 저절로 산길을 오르게 되리라. 제비봉에 오른 날, 잠깐 다녀올 생각으로 끼니도 거른 채 물조차 챙겨가지 않았지만 칼바람에 눈발까지 분분히 날리는 혹한 속에서도 숨이 턱에 닿은 채 거의 정상까지 오를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이번 겨울도 추위가 매섭다. 이번 겨울에도 충주호는 다시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인제 자작나무 숲… 풍경이 마음을 움직이다
겨울의 초입에 당도한 자작나무 숲 앞에서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강원 인제군 남면 원대리의 산중은 잎을 다 떨구고 시리게 서 있는 자작나무들로 온통 순백의 세상이었다. 태백의 삼수령에서, 인제의 수산리에서도 산자락의 비탈에 들어선 거대한 자작나무 숲을 만난 적이 있지만, 이렇듯 그 안으로 들어 나무가 뿜어내는 박하향을 맡을 수 있는 자작나무 숲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촘촘히 심어진 자작나무는 어두운 숲을 순백으로 밝혔다. 숲은 잘 정비돼 있었다. 켜 낸 자작나무로 산책로를 만들어 두었고, 숲 한가운데 자작나무로 소박한 그네까지 매달아 두었다. 화다닥. 흰 털을 가진 산토끼 한 마리가 자작나무 숲 사이로 생고무처럼 튀어 달렸다.
그 숲에 들어서 가장 먼저 느껴진 감정은 ‘난감함’이었다. 이렇듯 감각적인 풍경을 어찌 글로 담아낼 수 있을지. 금세라도 숲의 정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이국적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더 난감해진 것은 그 풍경에다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였다. 숲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그 숲의 느낌을 도무지 한 장의 사진에 담아낼 수 없었다. 반나절을 머물면서 셔터를 눌렀지만,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1박2일의 취재일정에 그 숲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던 것도 자작나무 숲의 정취를 사진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던 욕심, 혹은 아쉬움 때문이었다.
여행이란 게 단지 ‘풍경을 구경하는 일’은 아닌 것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풍경 하나가 여행을 풍성하고, 의미 있게 해준다. 그저 아무 생각을 다 비우고 자작나무 숲이 만든 순백의 숲 속으로 발을 들이면 흰색의 색감이 이리도 강렬할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그 숲에서는 마음이 저절로 맑아진다. 내가 뿜는 들숨과 날숨까지도 다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러니 그 숲을 걷다 보면 작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마음이 고요해진다. 풍경이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풍경이 마음을 다스리는 곳. 그곳이 수도권에서 2시간 거리의 강원도 인제의 산자락에 있다.
고성 당동만… 가을을 굽어보는 최고의 전망대
경남 고성의 당동만은 여행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고성이야 공룡발자국으로 유명한 여행지. 그러나 그곳에 가을을 굽어보는 최고의 전망대가 있다. 문암산에서 거류산으로 건너가는 능선. 그곳에 서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짙은 청색의 남쪽바다가 내륙 깊숙이 밀고 들어온 당동만을 내려다볼 수 있다. 깊숙한 만으로는 다랑논들이 산자락에서 바다 쪽으로 흘러내렸다. 풍요로운 들녘과 진청색 바다로 만나는 눈부신 가을이 거기 있었다.
문암산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는 당동만의 주연은 누가 뭐래도 바다였다. 조연은 내만을 끼고 있는 반농반어의 마을사람들이 그려낸 다랑논이다. 당동만에서는 멀리 물러남으로써 바다는 더 바다다워진다. 색은 짙어지고, 풍광은 더 아름다워진다.
사실 어디든 ‘사람 사는 모습’은 누추하게 마련이지만 당동만에 기대고 사는 화당리 사람들이, 바다로 흘러내리는 다랑논으로 그려낸 삶의 흔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한 뼘이라도 농토를 더 늘리기 위해 비탈진 사면을 고르고, 일일이 돌을 쌓는 고된 노동으로 지은 다랑논이 보여주는 유연한 곡선, 그리고 논물을 보러 허리를 굽힌 농부 뒤로 진청색 바다가 펼쳐지고 그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5t 남짓의 작은 어선이 지나는 풍경이라니….
문암산과 거류산 자락의 바위에 앉으면 이런 풍경을 질리도록 볼 수 있다. 이것 하나 보자고 멀고 먼 남해안까지 갔대도, 숨을 고르며 산자락을 타고 올랐대도 절대로 실망하지 않을 것이니 이만하면 최고의 가을 전망대라 할 수 있겠다. 다랑논마다 잘 익은 벼들이 출렁거리는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때는 아직 단풍이 채 물들기 전이었다. 지난가을의 정취를 이곳에서 가장 먼저 만났다.
<출처> 2011. 12. 28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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