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강제수용소 아우슈비츠
글 · 남상학
아우슈비츠, 인간 잔학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 만약 피해자인 유태인들은 이곳을 방문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가해자를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단순한 다짐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보복의 칼날을 세우지는 않을까?
*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라고 쓰인 문구가 붙어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벌어진 유대인 학살을 다룬 1993년작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20세기 후반 영화로는 드물게 흑백 필름으로 제작됐다. 영화는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잘 알려진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이 주무대다.
나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 아우슈비츠 (Auschwitz)를 가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전용버스로 4시간을 달려 크라쿠프에 도착하였다. 고속도로 양 옆으로 펼쳐진 벌판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고 있는 듯 보였다. 수천 개의 건축물과 예술품들로 가득 차 있는 크라쿠프는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있는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히틀러의 악명이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유례없는 '인간도살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 6월에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히틀러에 의해 세워졌다. 이곳에 수용소를 설치한 이유는 도심과 떨어져 있고 가까운 곳에 철도가 지나고 있어, 수용자의 대량수송에도 효과적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외곽은 엄중하게 전기 울타리 망(網)이 겹겹이 구축되어 있다. 그 안의 수용소는 붉은 벽돌의 단층 건물 28동이 3열 횡대로 열을 지어 서있고, 이곳 수용소에서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저 250만 명에서 최대 40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은 면밀한 수송계획에 따라 각지에서 모여 건강한 사람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나머지는 가스실에서 살해·소각되었다. 1942년 2월 이전에는 주로 반체제 인사들이 학살되었고, 그 이후에는 주로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되었다 한다.
제1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철문 위에는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 라고 쓰인 문구가 붙어 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등장한 간판으로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죽음 이외에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폴란드는 이곳을 회복하자마자 독일어식 발음 ‘아우슈비츠’대신 폴란드 옛 이름인 ‘오슈비엥침(oswiecim)’으로 재빨리 되돌렸다. 비참했던 역사를 더 이상 기억하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놓았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 라는 말처럼, 폴란드인들은 이곳을 민족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 있다. 1947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이 건물 중 나치의 잔학 행위를 전시한 건물은 모두 5개 동 (4, 5 ,6, 7, 11)이다. 이 5개 동에는 수용자가 사용하던 조잡한 식기, 스푼, 안경테, 가방, 칫솔, 구두, 모자, 한통으로 400명을 죽일 수 있는 티크론 가스통, 죄수복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번호가 새겨진 줄무늬 파자마와 같은 죄수복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나치는 가스실에서 죽은 수용자들의 인골로 재떨이나 종이칼을 만들고, 기름으로는 비누, 여성들의 머리카락으로는 카펫을 만들었다고 한다. 1945년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 자루에 담아서 카펫용으로 수송하려던 머리카락 7천 킬로그램을 찾아냈다고 한다.
▲희생자들의 전시물, 부상자들이 착용했던 의족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또한 의학실험이라는 미명 아래 수용자를 갖가지 생체실험에 이용되었는데, 말라빠진 두 다리로 상반신을 지탱하는 고통스러운 모습의 쌍동이, 맨발인 채로 12시간이나 밖에 서있게 하여 동상에 걸린 소녀 등 차마 눈뜨고는 보기 힘든 모습들을 찍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11동은 2만 명을 총살한 벽, 사방 1미터에 4명을 밀어놓은 채로 하룻밤을 보내게 한 방, 환기통이 없는 방에 많은 사람들을 밀어 넣어 질식사시키는 감옥, 도망친 죄수를 대신하여 스스로 순교한 콜베신부를 아사시킨 독방이 있다.
여러 전시관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을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유대인과 정치범이 학대와 굶주림 속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생을 마감했는지 알 수 있다. 수용소 남쪽 끝에는 영화 속에서 유대인들이 가스실로 이동하는 장면을 촬영했던 장소가 있다. 지하에 건설한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은 역사에 대한 분노와 인류 본성에 대한 좌절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하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제1수용소와 그곳에서 4㎞가량 떨어져 있는 제2수용소가 영화에 등장한다. 아우슈비츠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여 추가로 지은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Birkenau). 영화에서 유태인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들어오던 곳. ‘죽음의 문’과 유대인을 수용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엄청나게 넓은 수용소에는 아우슈비츠의 수십 배에 달하는 건물(300여동)의 막사가 있었다고 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굴뚝과 막사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벽돌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어 황량한 풍경이다.
그렇다면 나치는 왜 이토록 잔혹한 일을 저질렀을까? 히틀러가 유태인을 골라 학살한 것은 자신이 싫어한 계모가 유태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민족은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그럴싸한 종교적 명분 또는 자기 민족의 우월성 확보, 아니면 게르만 민족의 결속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그 어떤 이유라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렵고 수긍이 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인간 잔학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곳. 만약 피해자인 유태인들은 이곳을 방문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가해자를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자”는 단순한 다짐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보복의 칼날을 세우지는 않을까? 악순환을 걱정하는 것은 나만의 염려일까? 혹자는 묻는다, 참혹한 기억은 빨리 잊는 것이 낫지 않으냐고. 그러나 이 음산한 풍경은 방문자에게 치열한 각성과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회피하지 않고 역사를 직시하는 시선만이 인류 안에 잠재하는 악마성을 경계할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는 구호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의 진리다. 끊임없이 깨어있고자 하는 노력만이 진정한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교훈이다.
* 영화에서 유태인들을 실어 나르는 기차가 들어오던 제2수용소를 배경으로 선 필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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