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충청북도

박달재에 얽힌 남녀의 사랑이야기

by 혜강(惠江) 2011. 5. 13.

                                     

제천 박달재

박달재에 얽힌 남녀의 사랑이야기

 

- 영남도령 박달이와 금봉낭자의 슬픈 사랑 -

 

 

·사진 남상학

 

 

 

 

 

  충주를 지나 38번국도를 따라 제천으로 향하다 보면 울고 넘는 박달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해발 380m의 다릿재가 나온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로 잘 알려진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천등산이 바로 이 산이다. 본래 박달재는 제천 봉양의 시랑산 아래에 있는 고개이며 천등산 기슭을 넘는 고개는 다릿재이다.


  이곳 다릿재에서 박달재까지의 아흔아홉 30리 굽이굽이 고갯길은 예로부터 험준하여 몇날 며칠일 넘어야 했다고 한다.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갈라놓은 험한 산을 박달재라 한다. 이 박달재에는 영남도령인 박달이와 금봉낭자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조선조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 들어가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고,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의젓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 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은 역시 잠을 못 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아 박달은 스스로의 눈을 몇 번이고 의심하였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 졌고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게 되었다. 밤마다 두 사람은 만났고, 박달은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금봉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박달은 고갯길을 오르며 한양으로 떠났다. 금봉은 박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 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던 박달은 결국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나보내고는 날마다 성황당에서 박달의 장원급제를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금봉은 그래도 서낭에게 빌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와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목 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뒤를 쫓아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을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는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이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제천 문화관광 제공) 

 

  선비 박달과 처녀 금봉이의 애틋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박달재는 전설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외적과 싸워 이긴 전승지로서 알려져 있다. 고려 23대왕인 고종 3년(1216)에 10만의 거란군이 고려에 쳐들어 왔을 때 박달재에서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군을 물리친 전승지이며, 1258년 (고종45년) 제천, 충주, 청풍의 합동 삼별초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승지이기도 하다.

  이런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박달재가 현재는 1997년 박달재 밑으로 1960m의 터널이 개통되어 그대로 통과해버리니 박달재의 옛 영화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박달재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여유롭게 옛 정취를 느낄 겸 꼬불꼬불한 산길을 돌아 휴게소를 찾는다.

 

 

 

 

  박달재휴게소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스피카에서 ‘천등산박달재’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휴게소에 흘러넘치는 애절한 노랫가락은 박달 도령이 금봉 아가씨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발길이 뜸해진 언덕으로 길손을 부르는 소리처럼 휴게소는 한가하기 그지없다. 휴게소에 차를 멈추고 내려서서 길손인 나는 잠시 노랫말에 귀를 기우려 본다.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 넘는 눈물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보나 산울림만 외롭구나. 

 

 

 

 


  길을 사이에 두고 고개에는 김취려 장군의 동상을 비롯하여 박달재임을 알리는 비석과 표석, 그리고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조형물, 성황당 등을 재현하여 공원을 조성한 것은 옛 정취를 찾는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휴게소 주변에는 남녀의 성을 주제로 한 목각(조각)들이 즐비하다. 여기에 여성 신체를 비하한 조각도 많아서 이것을 보노라면 조금은 민망한, 그래서 여성들은 애써 외면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종교계는 시(市)는 서로 설전을 벌이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종교계에서는 미신을 조장하는 성황당과 선정성이 농후한 이들 조각은 청소년에게 해를 주고 시민의 수준을 격하시킨다 등을 이유로 철거를 요구하는 반면, 시는 성황당은 토속신앙을 상징하는 시설이 며 조각품들이 개인 소유인데다 일종의 문화이기 때문에 철거는 어렵다는 입장이란다. 이것이 민속신앙이며 문화인지 그 시비를 가리는 것은 잠시 멈추고라도 이것들은 현실적으로 박달재의 명물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천등산은 ‘천등산 박달재’라는 한시대의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같이했던 유행가에서 보듯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랑을 매개로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묻어있는 고개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고개 정상의 휴게소의 또 하나 명물인 도토리묵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 박달이와 금봉의 애절한 사랑을 표현한 상징물 *

 

 

* 김취려(金就礪) 장군의 전승 기념 기마상 * 

 

 

* 선정성이 농후한 달재의 조각들 *

 

 

* 박달재휴게소에서는 도토리묵을 전문으로 하고 있다.*

 

 

 

<끝>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