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중산간 기행
비밀의 숲을 지나 '제주의 바위'를 만나다
제주=글·김우성 기자
이맘때 제주 한라산은 독특한 풍경을 내보인다. 하얀 백록담이 파릇한 난대림을 내려다본다. 가까이선 해풍에 실려 온 습설이 눈꽃을 피워내거나 구상·굴거리나무에 달라붙으며 거대한 눈 덩어리를 키운다.
그 풍경은 한라산 허리에 걸친 중산간(中山間) 지역에서 또렷하다. 중산간을 북에서 남으로 에둘러 갈 때 시간은 계절 단위로 역행한다. 한순간 겨울 한복판에 섰다가 다음 순간 봄으로 이행한다.
중산간에 걸친 오름 중 두 곳을 추천한다. 작년 11월 처음 개방한 사라오름은 온통 설원이었고, 사려니오름은 연둣빛 이파리에 부서지는 햇빛으로 찬란했다. 돌문화공원도 빼먹지 말 것. 공원은 겨울과 봄 사이, 쉼표 같은 여정이다.
◆겨울의 한복판, 사라오름
그렇게 찬란한 하양의 스펙트럼은 처음이었다. 설원은 무채색이되 단조롭지 않았다. 빛을 튕겨내며 반짝이는 눈, 녹으며 하얀색을 잃어가는 눈, 차곡차곡 쌓여 끝내 다른 색을 모두 지워낸 눈이 함께였다. 그 눈 위에선 그림자도 다 같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여린 가지가 그린 그림자는 회색으로 옅되, 어떤 그림자는 겹치고 겹쳐 까맸다. 이 길 위에서 누군가 말했다. "내 생애 제일 많은 눈을 본 것 같다." 이때 많음이란 눈의 다양함을 포함한다.
사라오름을 오르는 길이었다. 사라오름은 높다. 해발고도 1325m. 그 위에서 다른 오름들을 내려본다. 예부터 명당자리로 꼽혀 오름이 품은 화구호 안에 묘를 썼다고 전한다. 사라오름으로 오르는 길은 작년 11월 열렸다.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첫 개방이다.
길은 성판악 휴게소에서 시작한다. 긴 잎을 축 늘어뜨린 굴거리나무와 앙상한 활엽수 아래 눈이 높게 쌓였다. 사람이 다진 길이 아닌 곳을 짚었다간 무릎까지 빠지기 예사다.
이 길의 두 번째 풍경은 삼나무 숲이다. 위로 솟구치며 호위무사처럼 길 양쪽으로 섰다. 눈이 켜켜이 달라붙어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았다.
속밭대피소를 지나 1.7㎞쯤 걸으면 사라오름 입구다. 완만했던 길이 급격히 솟구친다. 아이젠 없인 쉬이 오를 수 없다. 그 급격한 경사만큼 풍경의 변화도 완연하다. 눈 덮인 화구호 너머, 섬 제주의 북쪽 풍경이 끝없다. 한라산 완만한 사면 위로 작은 오름들이 통통 튀고 사면의 끝에선 잘게 부서지는 바다가 출렁인다.
▲ 사려니 숲길의 삼나무 전시림은 깊다. 7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낸 삼나무 1850그루가 평균 28m 높이로 도열했다.
◆비밀의 난대림, 사려니숲길
발을 들여놓는 순간 혼란스러웠다. 시선을 낮추면 온통 설원인데, 위에선 진초록 이파리가 출렁였다. 동백·산뽕·사스레피·합다리·구실잣밤·때죽나무 같은 활엽수가 자아낸 풍경이었다. 겨울 속에 겨울을 잊은 봄이 자라나고 있었다.
사려니는 제주 말로 '숲 안'이라는 뜻이다. 이 숲길은 제주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서귀포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이어진다. 해발 500~600m의 중산간을 남북으로 지르며 15㎞를 뻗었다. 옛적 말테우리(말몰이꾼)와 사농바치(사냥꾼)가 이 길을 달렸다. 화전민과 숯을 굽던 이들, 표고버섯을 따던 이들이 이 길을 걸었다.
지금은 숲길을 온전히 걸을 수 없다. 숲길 허리 부근이 출입 통제 중이다. 그래서 이 길을 걷는 방법은 두 가지다. 북쪽 입구에서 출발해 붉은오름 혹은 성판악으로 빠지거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방법이다. 항시 개방된 길이다. 최근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주원(현빈)과 오스카(윤상현)가 여기서 길라임(하지원)을 두고 자전거 하이킹 내기를 펼쳤다. 그만큼 유명하고 사람으로 늘 북적인다.
다른 하나는 남쪽에서 삼나무 전시림과 사려니오름을 도는 순환코스다. 이 길을 걸으려면 이틀 전 난대림산림연구소에 신청해야 한다. 간단한 절차지만 신청하는 사람이 적다. 그만큼 한적하다. 사려니의 본뜻, '숲 안'이란 의미도 여기서 확연하다.
마땅히 추천 코스도 여기다. 입구에 들어서서 조금만 걸으면 사람 대신 노루 발자국이 설원에 흥건하다. 햇빛은 멀리 이파리에 부서지며 반짝이거나 가까이 눈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봄과 겨울의 혼재가 주는 흥분이 가라앉을 무렵이면 삼나무 전시림에 닿는다. 이 숲은 깊다. 7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낸 삼나무 1850그루가 평균 28m 높이로 도열했다. 삼나무가 품은 습기는 겨울의 차가운 공기와 만나 경쾌하다.
숲길의 마지막은 사려니오름이 장식한다. 대체로 평탄한 숲길에서 오름을 오르는 길만 유독 가파르다. 그러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따스한 기운에 까만 흙을 드러낸 땅과 남북으로 펼쳐진 전망이 모든 노고를 보상한다.
다 걷고 나서 깨달았다. 사려니 숲엔 봄과 겨울만 있는 게 아니다. 사계절을 모두 품고 있다. 삼나무 숲 초록 이끼는 여름을, 간혹 붉게 물든 활엽수는 가을을 대변한다.
◆겨울과 봄 사이, 돌문화공원
돌문화공원은 미완성이다. 1999년 첫 삽을 떴으니 어느덧 13년째다. 공원이 완성되는 건 2020년, 아직도 9년이 남았다. 이 대역사(大役事)의 주인공은 백운철씨와 제주도다. 제주도가 327만㎡ 규모의 부지와 1852억원을 대고 백씨는 평생 모은 기암괴석과 오래된 석물 2만점을 내놓았다. 그리고 원칙을 세웠다. 나무를 베지 말 것. 정 안 되면 옮겨 심을 것. 건물도 나지막하게 지을 것. 다시 말해 자연을 최대한 살릴 것.
제주에 있는 수많은 테마파크 중에서도 돌문화공원은 규모와 정성 면에서 압도적이다. 1단계 사업만 마쳤을 뿐인데, 공원 내를 서둘러 둘러봐도 족히 3시간은 걸린다. 어딜 가나 백씨가 모은 돌과 나무와 민예품이 있다. 공원 도처에 선 옛날 초가와 당집은 실제 고가(古家)를 옮겨놨고, 옛사람이 쓰던 구들과 바둑돌·돌절구 등이 곳곳에서 방문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특히 발걸음이 오래도록 멈칫하는 곳은 돌 갤러리다. 수만 년을 버텨온 제주 바위의 생이 거기 웅크리고 있다. 대부분 화산에서 태어난 바위들이다. 순간의 열기를 모태로 삼았으되, 오랜 풍화의 시간을 만나 그 생의 모습은 제각기 다르다.
여 행 수 첩
①사라오름: 성판악 휴게소에서 오른다. 제주공항에서 가려면 시청 방향으로 가다 서광로에 합류→광양사거리에서 1131번 지방도로 우회전→18㎞쯤 직진하면 성판악 휴게소다. 여기서 사라오름까지는 왕복 4~5시간 소요. 아이젠 필수.
②돌문화공원: 온 길을 돌아 나와 교래입구에서 우회전→교래사거리에서 좌회전해 1.5㎞쯤 가면 돌문화공원이다.
③사려니숲길: 1118번 지방도 타고 남쪽으로 직진→수망교차로에서 516도로 방면으로 우회전→한남교차로에서 우회전해 1.3㎞쯤 가면 남원읍 쓰레기위생매립장이다. 이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이정표 따라 1㎞쯤 걸으면 사려니숲길 입구다. 탐방로 약 6.5㎞, 도보 3시간쯤 소요. 탐방 이틀 전까지 난대산림연구소 홈페이지(jejuforest.kfri.go.kr)에 신청해야 한다.
제주시나 서귀포시에 저렴한 펜션과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서귀포에선 '미르빌 펜션(064-792-2918)'·'송정 게스트하우스(064-763-5775)'가, 제주시에서는 '휴먼 게스트하우스(070-7808-0135)', '예하 게스트하우스(064-713-5505)'가 가격 대비 품질이 좋다.
한라산국립공원 성판악지소 (064)725-9950
난대산림연구소 (064)732-8222
제주돌문화공원 (064)710-7731, 어른 3500원·청소년 2500원.
<출처>2011. 2. 10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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