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돈내코 길
공짜로 보기엔 미안한 절경, 돈 내고 보라고 '돈내코'인가?
김 화 성 기 자
* 한라산백록담분화구 남벽. 깎아지른 수직벽이 장엄하다. 조각칼로 그은 듯한 거친 칼자국들이 죽죽 위아래로 그어져있다. 빙둘러있는 분화구벽 안쪽이 백록담이다. 한때 용암을 토해냈던 불구덩이가 이젠 물웅덩이가 되어 흰구름을 담는다. 분화구남벽은 겨울엔 눈모자 쓰고, 봄엔 붉은 철쭉으로 목도리를 두른다. 발밑의 늘 푸른 구상나무가 점점이 푸르다. 문득 남벽아래에서 뒤를 돌아보면, 서귀포시내가 가뭇가뭇 발아래 누워있다. 서귀포앞바다 수평선에 뭉게구름이 솜이불처럼 펼쳐있다. 섶섬 문섬 새섬 범섬이 뿅뿅뿅 돋아있다. 제주 한라산=서영수 전문기자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 누구와 비할 바 없어 몸은 항상 흰 구름을 데불고 있구나.
발은 비록 물에 젖어 있으나 위로 위로 오르려는 염원.
너는 일찍이 번뇌와 욕망의 불덩이들을 스스로 말끔히 밖으로 토해내지 않았던가.
그 텅 빈 마음이 천년을 두고 하루같이 하나하나 쌓아올린 오름을 일컬어 한라라 하거니
한라는 차라 리 성스런 국토를 지키는 남쪽바다 끝 해수관음탑(海水觀音塔)."
- 시인 오세영의 ‘한라산’에서
한라산(해발 1950m)의 또 다른 이름은 두무악(頭無岳)이다. ‘머리가 없는 산’이란 뜻이다. 제주사람들은 ‘한라산 꼭대기가 거센 바람에 잘려나가 서귀포 쪽으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산방산(395m)이 그 떨어져나간 봉우리라는 것이다. 그만큼 제주사람들은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다. 용암을 내뿜었던 불구덩이를 그렇게 표현한다.
한라산은 해발 1700m 부근까지는 대체로 완만하다. 그 이후부터 삐죽삐죽한 돌 성곽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크라운 모양의 분화구벽이 빙 둘러 있다. 오세영 시인은 그것을 ‘해수관음탑’이라고 말한다. 구상 시인은 ‘내염(內焰)을 고이 끝낸/시인의/하품’이며 ‘국토신(國土神)의 이궁(離宮)’이라고 노래한다. ‘속불꽃을 사그라뜨린 시인의 느긋한 품세’라니. ‘단군이 한라산에 와서 잠시 머물던 궁전’이라니….
그렇다. 그것은 손잡이 없는 트로피의 안과 밖과 같다. 무쇠 솥단지가 산봉우리의 뾰족한 부분을 깔아뭉개고 앉아있는 것과 닮은꼴이다. 왕관을 쓰고 있는 산이라고나 할까. 백록담 분화구벽 둘레는 1.7km, 면적은 6만3600여 평(0.21km²)이다.
백록담 분화구 남벽은 장엄하다. 깎아지른 수직 벽이다. 그 앞엔 윗방아오름이 있다. 오름 모양이 방아와 비슷하다. 방아오름샘도 눈에 띈다. 해발 1700m가 넘는 곳에서 용출수가 솟아난다.
남벽은 서귀포 돈내코 계곡으로 오른다. 돈내코 코스(9.1km)는 지난해 12월, 15년 만에 문을 열었다. 아직 사람들 왕래가 많지 않다. 돈내코 계곡에서 올라가 웃세오름 쪽으로 빠진다. 분화구 남벽부터 서북벽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휘돌아나간다. 서북벽은 U자형 홈통바위들이 육중하게 뻗어 내린다. 맛있고 튼실한 제주 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돈내코 코스는 정갈하다. 아늑하다. 절벽에 걸린 암자 오르듯이 호젓하다. 검은 돌바닥 길엔 마른 가랑잎이 수북하다. 황갈색 나뭇잎에 붉은 애기단풍잎이 점점이 섞여있다. 황홀하다. 서걱서걱 덜컥덜컥 돌 위의 낙엽 밟는 소리가 싱그럽다. 날카로운 돌바닥 소리가 나뭇잎에 버무려져 곰삭은 소리가 난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울창한 숲은 어둑하다. 햇살이 나무 틈새로 언뜻언뜻 화살처럼 꽂힌다. 몽환적이다.
돈내코 계곡은 서귀포를 등지고 오른다. 오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서귀포시가 가뭇가뭇 발아래 누워있다. 왼쪽부터 섶섬 문섬 새섬 범섬 4개의 무인도가 아득하다.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수평선 구름바다가 고혹적이다. 너울너울 하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그냥 그대로 뛰어내리면 솜이불에 폭삭 안길 것 같다. 가을은 아직 한라산 허리에 걸려 있다. 머뭇머뭇 멈칫멈칫 머물고 있다. 서귀포는 여전히 발그레하다.
해발 1000m가 넘으면 구상나무가 지천이다.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산다는 토종나무. 늘 푸른 작은 키 나무. 살아 백년, 죽어 백년. 산 나무 반, 죽은 나무 반이다.
넋이 나간 고사목
죽어서도 미래를 사는 고집
살아서도 청청했다
죽어서 꼿꼿한 뼈대
마른 주먹엔 무엇을 쥐고 있을까
- 이생진의 ‘한라산고사목’에서
영실 노루샘 일대는 ‘산상의 정원’이다. 해발 1700m에 펼쳐지는 고산습지. 한라산에 사는 뭇 생명들의 목을 축여준다. 물이 꿀처럼 달다. 그 물 앞에선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 사람 새 노루 다람쥐 제주도롱뇽 줄장지뱀 산굴뚝나비 가락지나비…. 봄이면 산철쭉 털진달래 꽃이 붉은 융단을 깐다. 바람이 불면 사철 푸른 조릿대가 으스스 몸을 떤다. 영실 병풍바위 주위에선 뭉게구름 먹장구름이 한순간 우르르 몰려와 몸을 씻은 뒤, 왁자지껄 수다를 떨며 사라진다.
▼야성 사라진 한라산 까마귀, 음식 받아먹는 재롱부려▼
한라산엔 까마귀가 많다. 산자락에서부터 백록담 분화구 위까지 없는 곳이 없다. “까악 까∼악” 귀가 따갑다. “과악 과아∼악” 우는 것도 있다. 큰부리까마귀이다. ‘까악 까∼악’ 따갑게 우는 것은 까마귀이다. 몸이 큰부리까마귀보다 조금 작다. 큰부리까마귀는 부리가 길고 두툼하다. 독수리부리 같다. 머리와 부리가 직각이다. 검은 깃털에 기름이 자르르하다.
한라산 조류는 모두 38종에 이른다. 이중 큰부리까마귀(14.81%)와 까마귀(8.44%)가 23.25%를 차지하고 있다. 조류 4마리 중 한 마리가 까마귀인 셈이다. 그 다음은 직박구리(12.66%), 방울새(10.33%), 곤줄박이(6.72%) 순이다. 까마귀와 큰부리까마귀는 한라산 텃새다. 까마귀는 제주 사람들에게 한이요 슬픔이다. 아니다. 야성의 끈질긴 생명력을 뜻한다. 좋든 싫든 까마귀와 제주 사람들은 ‘영혼의 끈으로 묶인 한 가족’이다. 제주 출신 작가들의 작품엔 어김없이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와 함께 울고 웃는다.
소설가 현기영 현길언 오성찬이 그렇다. 부모가 제주 출신이긴 하지만 일본 땅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 소설가 김석범도 마찬가지다. 그뿐인가. 잠시 제주에서 살다간 화가 이중섭도 제주까마귀의 강렬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남긴 그림 ‘달과 까마귀’가 좋은 예다. 1954년 통영에 살 때 그린 것이지만 자세히 보면 제주큰부리까마귀이다. 이중섭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6·25전쟁을 피해 제주 서귀포에서 살았다.
* 한라산 까마귀들은 야성을 잃고 ‘도시의 비둘기’가 되어가고 있다. 등산객이 던져준 김밥을 다투는 큰부리까마귀
그림 속의 까마귀 다섯 마리는 모두 뼈만 남았다. 삐죽삐죽 앙상하다. 배곯은 아프리카 아이들 가슴뼈 같다. 전깃줄에 앉은 세 마리 까마귀(아내와 두 자녀)와 오른쪽에서 직선으로 날아오는 까마귀(이중섭), 그리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꽂히듯 날아오는 까마귀(장모)가 애처롭다. 입엔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다. 하늘은 암청색이다. 둥글지만 노란 보름달은 왠지 처연하다.
요즘 한라산 까마귀들이 야성을 잃었다. 서울의 비둘기들처럼 사람들 주위에 몰려든다. 대피소, 꼭대기, 전망대 등 사람들이 많은 곳엔 어디든지 까마귀소리가 시끄럽다. 조금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등산객이 던져주는 음식물에 길든 탓이다. 김밥 라면 과자 과일 등 사람들 식성과 같아지고 있다. 더 이상 ‘비탈 산, 거친 들판을 헤매면서/썩은 고기와 죽은 벌레로 배를 채우(구상시인)’지 않는다. 구상(1919∼2004) 시인은 까마귀의 입을 빌려 인간들의 어리석은 삶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제 그 까마귀가 인간을 닮아가고 있다. 인간이나 까마귀나 ‘돈과 밥’을 찾아 영혼을 내팽개치고 있다. 한라산까마귀조차 비둘기가 돼 가고 있다
까옥 까옥 까옥 까옥
거리에서 쫓기며 헤매는 참새 떼 소리나 저희 집 새장 안의 앵무새 소리나 창경원 철망 속의 꾀꼬리 소리 같은 그 철딱서니 없는 노래들만 을 노래로 알고 들으며 사는 저것들이 오늘날 벌리고 있고 또 내일도 벌릴 그 세상살이라는 게 나로선 하두 맹랑해 보여서
까옥 까옥 까옥 까옥’
- 구상의 ‘까마귀 1’에서
제주 지명엔 말 - 소 - 돼지가 숨어 있어
한라산 탐방객 100만 명 돌파… 어리목 코스 이용객 가장 많아
* 돈내코 코스의 허리굽은 적송들. 소나무도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선다.
제주 말씨는 알아듣기 어렵다. 단어 자체가 뭍과 엄청 다르기 때문이다. 바당(바다), 노리(노루), 호루(하루), 영쿨(넝쿨)은 눈치로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빙애기(병아리), 똥소리기(솔개), 갈보름(서풍), 이망생이(이마), 와들락와들락(와당탕와당탕), 비룽비룽(구멍 숭숭), 갈래죽(삽), 호꼼(조금)에 이르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한라산 탐방객이 사상 첫 100만 명을 넘어섰다(11월 9일 현재). 일본 중국 등 외국 관광객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라산 오르는 데는 5개 코스가 있다. 이 중 탐방객이 가장 많이 이용한 코스는 어리목코스(33.4%). 그 다음은 성판악코스(30.2%), 영실코스(24.8%), 관음사코스(6.1%), 돈내코코스(5.7%) 순이다.
어리목의 ‘어리’는 어름소(빙潭)의 ‘어름(얼음)’이 변해서 된말. ‘목’은 ‘통로’를 뜻한다. 성판악(城坂岳)은 한자어 뜻 그대로 ‘성널오름’이다. ‘성 쌓는 돌 모양의 오름’이란 의미다. 오름은 새끼화산의 제주어. 한라산 주위에 368개가 종발, 옹기처럼 엎드려 있다.
영실(靈室)은 ‘산신령이 사는 방’이다. 이곳엔 500장군바위가 있다. 이 기암들은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할망 여신의 오백 아들로 전해진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을 베개 삼고, 왼발은 북쪽 제주앞바다의 관탈섬에, 오른발은 동쪽 성산일출봉에 걸치고 잠잤다는 거인이다. 몸집이 어마어마해서 할망이 털어낸 흙이 오늘날의 오름이 됐다고 한다.
돈내코는 ‘멧돼지들이 물을 먹었던 내(川)의 들머리’라는 뜻. ‘돈 내고’라는 의미가 아니다. 돈은 ‘돗(돼지)’의 한자어이고 ‘내’는 하천, ‘코’는 ‘입구’이다. 돈내코 계곡을 흐르는 냇물이 효돈천(孝敦川)이다. 효돈천은 서귀포 앞바다 쇠소깍에서 바닷물과 몸을 섞는다. 올레길 6코스(쇠소깍∼외돌개) 출발점이기도 하다. ‘쇠’는 효돈 마을을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이다. ‘소’는 ‘웅덩이’이고 ‘깍’은 ‘끝’을 뜻하는 ‘각’의 된소리. ‘쇠마을 끝 웅덩이’라고나 할까.
돈내코 코스 해발 1100m 지점엔 살채기도란 곳이 있다. ‘말과 소의 출입을 막아놓은 입구’라는 뜻이다. 옛날 마소를 방목해서 기를 때 그 위로는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다. ‘살채기’는 나무를 엮어 만든 목책이다. ‘도’는 ‘입구’라는 의미. 한마디로 ‘말과 소의 사립문’이라고나 할까. 1300m 지점의 둔비바위는 두부바위다. 제주사람들은 두부를 ‘둔비’라고 한다.
윗세오름은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뜻이다. 가장 위쪽 큰 오름이 붉은 오름(1740m), 가운데 오름이 누운 오름(1711m), 가장 아래가 족은 오름(1699m)이다.
♣겨울철 한라산 트레킹 주의할 점
▼한라산은 입산과 하산이 엄격히 통제된다. 겨울철(11, 12, 1, 2월)엔 돈내코 코스 오전 10시, 어리목 영실 12시까지만 입산이 허용된다. 윗세오름에선 13시, 남벽 분기점은 14시까지가 데드라인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더는 오를 수 없다.
▼겨울산은 금세 어두워진다. 산에 오래 머물다간 큰 코 다친다. 윗세오름에선 15시가 되면 하산해야 한다. 남벽 분기점에선 1시간 빠른 14시가 되면 내려와야 한다. 될 수 있으면 이른 아침에 올라갔다가 해가 있을 때 내려오는 게 좋다. 5개 코스 모두 오전 6시부터 입산이 가능하다.
▼김밥, 물, 과일, 사탕 등은 반드시 챙겨야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니 바람막이 옷 필수. 돌길이 많아 신발 깔창이 두꺼운 게 좋다. 발목 끈을 단단히 묶어야 관절을 다치지 않는다. 윗세오름대피소에서 컵라면 판매.
♣먹을거리
▼횟집 제주범섬수산(064-744-7997), 제주갈치와 고등어(064-749-1212), 흑돼지전문 고기굽는사람들(064-744-4468), 몸국 새올레국수(064-745-6226), 미풍해장국(064-749-6776)
<출처> 2010. 11. 26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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