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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임실 옥정호, 새벽마다 늘 새로운 수묵화를 그려내는구나

by 혜강(惠江) 2010. 11. 18.

 

임실 옥정호

새벽마다 늘 새로운 수묵화를 그려내는구나

 

 

임실=글·김우성 기자 / 사진=성 영상미디어 기자

 

 

 

 

*  옥정호의 물안개는 새벽살이다. 새벽에 태어나 해뜰 무렵 소멸한다. 그 짧은 순간 물안개는 여백의 수묵화를 그려낸다.

 

 

 

  1964년 소설가 김승옥이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명산물로 안개를 꼽았지만 2010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인 1965년부터 안개란 명산물은 전북 임실 것이었다. 일교차가 큰 가을이면 섬진강 상류를 막은 호수, 옥정호가 새벽마다 물안개를 피워내는 까닭이다. 물론 무진과 임실의 물안개는 다르다. 무진의 안개가 끈적끈적하고 축축한 공간을 형성한다면, 임실의 물안개는 맑아 욕망이 닿을 수 없는 여백의 수묵화를 그려낸다.

  뿐인가. 봄, 구례와 하동에서 섬진강이 빛난다면 가을의 섬진강은 임실이다. 섬진강의 물을 막은 옥정호에서 김용택 시인의 생가가 있는 진메마을을 지나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찍은 구담마을에 이르기까지, 임실의 섬진강은 속 깊은 풍경을 보여준다.

 

 

 

시시각각 변하는 수묵화, 옥정호



  새벽, 국사봉 오르는 길은 짧되 가팔랐다. 해발고도 475m. 정상에 오르기까지 30분이면 족했지만 급경사를 깎아 만든 계단으로 숨이 금방 차올랐다. 헉헉대며 오른 정상과 전망대엔 이미 몇몇 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직 사위가 캄캄한 새벽, 이들이 여기 오른 이유는 하나다. 옥정호의 물안개. 국사봉은 그 물안개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 중 최고로 손꼽히는 곳이다.

  실제 국사봉의 전망은 수묵화에 가깝다. 아침 동녘으로 해가 뜨면 하늘은 색을 얻고 붉어지나 출렁이는 산의 흐름은 여전히 검다. 가까워서 까만 산등성이가 옅은 농담(濃淡)으로 멀어질 뿐이다. 사이사이, 옥정호에서 발원한 물안개가 하얀 여백으로 풍경을 완성한다. 이때, 물안개의 힘은 구체(具體)를 지우는 데 있다. 호수를 지우고 붕어섬을 지우고 길을 지운다. 간혹 지우지 못한 구체는 그 자체로 화룡점정의 역할을 한다. 늘 안개가 지우는 대상이 다르니, 옥정호의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는 수묵화다.

 

 

임실의 섬진강은 구례와 하동으로, 다시 말해 봄의 섬진강으로 굽이쳐 흐른다.  늦가을, 구담마을 당산터에서 미리 봄을 상상한다. 

 

 

 

  이 수묵화는 해가 온전히 뜰 무렵 사라진다. 모든 물안개는 새벽살이다. 새벽에 태어나 해가 뜨면 서서히 소멸한다. 옥정호의 물안개도 다르지 않다. 그 짧은 생에, 옥정호의 물안개는 섬진강에서 피어나 다시 강으로 돌아간다. 해와 물안개가 공존하는 짧은 시간, 적요롭던 수묵화의 풍경은 순간 찬란하다. 

 

  국사봉에서 본 옥정호는 그 자체로 선경(仙境)이되 이만 보고 간다면 옥정호의 물안개를 절반만 감상하는 일이다. 마땅히 차를 몰아 양요정으로 가야 한다. 국사봉에서 물안개는 군집으로 움직이며 해가 온전히 뜰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옥정호 수면에서 가까운 양요정에선 다르다. 가까이서 물안개는 바람에 실려 태어나고 스러지길 반복했다. 눈으로 확연한 물과 보이지 않는 공기가 물안개의 아비와 어미였으니, 물안개는 보임과 보이지 않음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모든 물안개의 운명이 비슷할 것이나 유독 옥정호의 물안개가 유명세를 타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옥정호에서 물안개는 잦다. 임실은 전북에서 가장 깊은 내륙에 속한다. 땅은 쉽게 식고 쉽게 데워져서 임실의 일교차는 늘 크다. 서울의 일교차가 11.6도였던 지난 13일, 임실은 영하 3.5도와 14.7도 사이를 오갔다. 옥정호의 물은 이 온도 차를 견뎌내지 못한다. 새벽녘 급격히 식은 지상의 공기가 아직 따뜻한 물과 닿을 때, 그 사이 습도 높은 공기가 수증기를 내뱉는다. 

 

  매년 일교차가 큰 가을마다 옥정호가 빚어내는 물안개는 때로 이 지역에 수몰된 마을들을 추억하는 것처럼 보인다. 옥정호는 일본 강점기 때 조성된 저수지다. 1965년 섬진강 댐이 완공되며 수위를 높였고 가옥 300여 호와 경지면적 70%가 수몰됐다. 양요정 옆 망향의 탑은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몰세대주 명단을 기록했고 마을 이름을 하나씩 호명했다. 잿마을, 간좌터, 도마터, 구석물, 화적골, 어리골, 강정, 용소, 미로소, 작은 벼루…. 물안개는 그 이름들을 하나씩 어루만지며 바람에 실려 멀어지고, 끝내 사라진다.

 

 

 

* 김용택 시인은 진메마을에서 나고 자랐고, 늘 임실의 섬진강을 노래했다. 그가 시를 쓰고 섬진강을 굽어봤던 서가, 관란헌.  

 

 

◆숲과 마을의 강, 임실 섬진강

 

 

  섬진강은 옥정호를 지나 진메마을에 닿는다. 진메에서 크게 휘어지며 천담마을과 구담마을 앞을 흐른다. 대체로 섬진강은 늘 모래의 강으로 인식됐다. 그 강은 봄의 강이자 하동과 구례의 강이다. 하동과 구례를 굽이치는 봄의 섬진강은 매화와 벚꽃, 고운 모래로 눈부시다.

 

  그러나 임실에서 섬진강은 숲과 마을의 강이다. 가을, 임실의 섬진강은 모래 대신 거친 바위를 감싸 안으며 흐른다. 그 바위 사이, 제멋대로 자란 나무는 바람의 방향 따라 굽어지며 붉거나 노란 잎을 떨어낸다. 해서 임실의 섬진강은 숲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숲과 강을 마주 보는 건너편엔, 낮게 앉은 마을이 띄엄띄엄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 자리한다. 진메와 천담, 구담이다. 1990년대 초, 진메에서 지금은 문을 닫은 덕치초등학교 천담분교를 걸어 출퇴근했던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 15'에서 노래했다.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섬진강이 무엇을 품었든, 하동과 구례에서도, 임실에서도 섬진강의 이미지는 하나로 수렴한다. 바로 모성(母性)이다. 걷기가 시작되는 진메마을 입구에서 그 이미지는 '사랑비'로 또렷하다. 이 강변 마을에서 유년을 보낸 일곱 자식이 부모 '월곡양반'과 '월곡댁'을 기리며 이렇게 썼다.

 

   월곡양반, 월곡댁

   손발톱 속에 낀 흙

   마당에 뿌려져

   일곱 자식 밟고 살았네.

 

 

  어찌 이 네 행으로 부모 향한 마음을 다 말할 수 있을까. 일곱 자식은 비석 옆에 '어머니, 아버지 가난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라 썼다. 많은 고백이 늘 뒤늦게 이뤄지듯, 이 사랑비 역시 망향의 탑처럼 늦은 고백이다. 비석 뒤 또 다른 비석은 "어머니 돌아가신 지 21년, 아버지 돌아가신 지 18년 되던 2006년 5월 8일" 사랑비를 세웠다 기록한다. 

 

  그 사랑비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비포장길이다.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에 닿기까지 길은 섬진강 따라 깊어진다. 깊어지되 늘 볕이 들어 외진 곳을 향한다는 느낌 없이 다만 여유롭고 따스하다. 건너편 강변에는 방목 중인 흑염소가 풀을 뜯고 강에 선 울퉁불퉁 바위 사이론 물오리 떼가 열 맞춰 나아간다. 이 풍경을 품은 섬진강은 넓어 그저 파동으로 앞으로 나아가다 때로 마주치는 협곡에서만 큰 물소리로 제 나아가는 방향을 알린다.

 

   천담 지나 구담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을 닮거나 강과 바싹 붙으며 이어진다. 이 아름다운 길의 끝은 구담마을 당산터다. 여기서 지금껏 걸어온 섬진강과, 앞으로 굽이치며 나아가는 섬진강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물길은 가을의 섬진강이 구례와 하동으로, 다시 말해 봄의 섬진강으로 나아가는 길이니, 이 늦가을에 미리 봄을 상상하는 길이다. 

 


 

여행수첩

 

 ◎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군산·전주 방면으로 나와 반월교차로에서 우회전, 조촌교차로에서 시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약 7㎞ 직진하다 전주종합경기장을 끼고 우회전, 순창 방면으로 25㎞ 직진한다. 운암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옥정호반 드라이브 코스'다. '아름다운 한국의 길 100선'에 뽑힌 길이다. 길 따라 직진하면 옥정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국사봉 전망대가 있다.


추천코스 ①운암삼거리에서 국사봉 전망대 지나 조금만 직진하면 오른편에 요산공원 표지판이 나온다. 우회전해 직진하면 양요정과 망향의 탑이 있다. 다시 돌아 나와 운암삼거리에서 우회전, 27번 국도를 타고 직진한다. 계속 광주·순창 방면으로 가다 덕치초등학교 지나 일중교를 건넌다. 처음 보이는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1.6㎞쯤 가면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진메마을이다. 진메마을에서 천담마을 지나 구담마을까지가 걷기 좋은 길이다. 약 6.6㎞, 2시간 10분. 내친걸음, 715번 지방도 타고 순창 방면으로 직진하면 바로 장구목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 따라 우회전해 직진하면 장구목이다. 계곡 바위가 꼭 공룡이 밟고 지나간 자국처럼 울퉁불퉁하다. 

 

②자녀와 함께 왔다면 임실읍 금성리 임실치즈마을에서 체험활동을 하는 것도 좋겠다. 치즈 만들기·경운기 타기·치즈 돈가스 중식 등에 피자 체험·산양유 비누 체험 등을 선택할 수 있다. 1인 1만6000원에 선택체험은 3000∼8000원.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4시간. 예약 필수. (063)643-3700

 

 

 

◎ 옥정호에서 진메마을 가는 길에 강진면사무소 앞 성원식당을 들르자. 옥정호와 천담에서 난 다슬기 수제비<사진>를 소박한 반찬 6∼8가지·공깃밥과 함께 내놓는다. 가격도 6000원으로 저렴한 편. (063)643-1063

 

 

◎ 임실엔 묵을 곳이 별로 없다. 임실읍 운암면 마암리에 모여 있는 리버사이드·하얀집파크텔·허니문모텔이 옥정호에서 가깝다. 1박 3만원. 운암교 삼거리 바로 앞에 있다.


숙박 등 주요 연락처 문의: 임실 문화관광과 (063)640-2639

 

 

<출처> 2010. 11. 18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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