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부안 개암사, 백제의 눈물 흩뿌린 자리에 핀 눈꽃

by 혜강(惠江) 2011. 1. 14.

 

부안 개암사

백제의 눈물 흩뿌린 자리… 천년 세월 눈꽃으로 피었네

 

·사진 박경일 기자

 

 

 

▲ 전북 부안 개암사 뒤편에 우뚝 서있는 울금바위. 빠른 걸음으로 20분이면 가닿을 수 있는 울금바위 거대한 암봉 아래는 백제 멸망후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이 머물렀다는 ‘복신굴’이 있다. 백제의 패망, 그리고 옛 왕국을 되살리려던 유민들의 꿈이 거기 있다.

 

 

신년의 서설(瑞雪). 내린 눈이 쌓이고, 그 위로 폭설이 또 내려 덮었습니다. 전북 부안의 너른 들판이 며칠 동안 계속된 폭설로 온통 눈세상이 됐습니다. 지붕마다 한 자가 넘게 눈이 덮였고, 눈으로 길이 다 지워졌는데도 눈발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곰소항에 가지런히 말려 놓은 물메기며 갈치 위에도 눈발이 분분하게 흩날렸고, 곰소만의 갯벌에서 바지락을 잡는 이들의 어깨 위에도 눈발이 내려앉았습니다. 곰소포구에서 출항을 준비하며 장작불을 쬐던 어부는 신발에 묻은 눈을 털어내면서“거 눈 참 지긋지긋하게도 온다”고 푸념처럼 혼잣말을 했습니다.

눈발이 흩날리는 부안의 들판을 지나고 곰소만의 너른 갯벌과 포구도 지나서 개암사로 향합니다. 눈으로 지워진 산길을 조심스레 더듬어 가는 길. 그 길 끝에 개암사의 다 지워진 단청의 대웅보전이 눈을 뒤집어쓴 채 갓 세수한 처자의 얼굴처럼 단아하게 서 있었습니다. 눈을 쓸어낸 싸리비 자국이 선명한 절집 마당은 쌓인 눈이 소리를 빨아들여 고용한데, 간혹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만이 바람을 따라 뎅그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개암(開巖). 찻잔을 앞에 놓고 개암사 주지 스님은 ‘바위(巖)를 열다(開)’란 뜻의 절집 이름을 일러 ‘상서로운 기운’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스님 말을 되뇌다가 개암사 지붕 뒤편에 우뚝 솟은 울금바위에 절로 눈길이 갔습니다. 절 집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 같은 바위의 모습. 개암사에서 눈 쌓인 산길을 짚어 울금바위를 향해 오르는 길은 옛 백제로 떠나는 여정에 다름아니었습니다. 눈세상의 숲길을 걸어 복신굴과 원효굴, 주류성이었던 울금성을 만났습니다. 오래된 시간이 쌓이고, 그 위로 지나간 시간이 또 덮인 역사. 패망한 역사의 마지막 자취는 쓸쓸했습니다.

눈이 많기로 이름난 곳, 부안. 울금바위를 들렀다가 내변산 쪽으로 행로를 잡아 사방을 눈으로 둘러친 직소폭포로 드는 여정을 보탰습니다. 가을의 초입부터 가뭄으로 메말라 끊어졌던 폭포의 물줄기가 폭설이 내리면서 이어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부드러운 눈길을 따라 산중 호수를 거쳐 폭포까지 이르는 길은 마치 선경과도 같아 ‘노고없이 만난 횡재’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부안에서 쓸쓸함으로 말하자면 겨울 모항의 바다와 곰소만의 적막을 빼놓을 수 있을까요. 썰물 때 바다가 멀리 물러나면서 드러난 곰소만의 갯벌은 은박지처럼 차갑게 빛났습니다. 그 갯벌 위에서 아낙네 몇몇이 혹한에도 갯벌을 긁으며 바지락을 잡아내고 있었습니다. 주말에는 어떨는지 모르지만 평일의 곰소항에서는 참바람에 좌판의 생선들이 쩡쩡 얼어붙었습니다. 상인들만 무료하게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사이, 잠시 그쳤던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백제 부흥軍도, 신라 승려 원효도… 그 바위에 굴을 파고 앉았다

 
 
# 단아한 개암사 대웅전 앞에서 뒤쪽의 바위를 올려다보다 
 
 
 
                                                  ▲ 눈 속에 단아하게 서있는 개암사 대웅전 뒤로 우뚝 솟은 울금바위가 올려다보인다.
 


  개암사 대웅전 뒤편에는 울금바위가 있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개암사의 일주문을 지나 솔숲 오솔길에 들어서 절집을 향하자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울금바위다. 오솔길이 끝나면 곧 대웅전에 이르는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계단을 오르기 전 고개를 들면 계단 끝으로 산정에 우뚝 솟아 있는 울금바위부터 눈에 든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시야를 높이면 먼저 눈 쌓인 개암사 대웅전의 팔작지붕 처마선이, 이어 다포기둥을 버티고 선 들보가, 이어 오래된 시간이 묻어나는 기둥이 차례로 보이기 시작한다.

  개암사가 창건된 것이 백제 우왕때인 634년. 대웅전을 마지막으로 다시 고쳐 지은 것은 그로부터 1000년쯤 뒤 조선 인조때인 1636년이다. 절집이 지닌 내력은 1400년이 넘는다지만, 정작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사연의 시간이라 체감은 덜하다. 그보다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대웅전 건물이 400년의 시간을 지켜왔다는 것이 더 감회가 깊다. 단청이 다 지워진 절집의 기둥이며 문턱을 쓰다듬으면 ‘장하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개암사 뒤편에 우뚝 솟은 울금바위는 그 아래 절집이 ‘개암(開巖)’이란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됐다. 기원전 282년 삼한시대.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공세를 피해 이곳 울금바위 아래로 와서 왕궁을 지었다. 울금바위 동쪽의 왕궁을 묘암(卯巖)이라 했고, 서쪽을 개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아마도 울금바위의 비범한 모습에서 딴 이름일 터다.

  그러곤 왕궁의 흔적이 다 스러지고 다시 90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변한의 땅은 백제의 땅이 됐고 울금바위 아래 왕궁이 있던 곳에는 절집이 세워졌다. 그게 지금의 개암사다. 절집은 1400여년을 이어왔지만 백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개암사가 지어진 지 26년 만인 660년 7월 백제는 패망했다.


# 개암사에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울금바위로 오르는 길

 
  개암사에서 나한전 옆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울금바위까지는 700m 남짓. 밑에서 올려다보는 위세보다 길은 순한 편이다. 뽀드득거리는 눈밭을 밟으며 오른다. 눈길 옆으로 자라난 조릿대들이 성성한 초록빛이다. 외지인들이 자주 찾는 길이 아니라 눈 내린 숲길에는 몇 사람의 발자국뿐이다. 천천히 다리 쉼을 하며 오르자면 30분 남짓. 부지런히 오를 경우 20분쯤이면 무성한 조릿대 숲을 지나 산정에 우뚝 솟은 울금바위의 뿌리 쪽에 가닿는다.

  아다시피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이었다. 그해 여름,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대군이 인천 덕적도에 상륙했다. 때맞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 병력도 백제 동쪽의 국경을 넘었다. 모두 18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마지막 싸움이었던 황산벌 전투는 치열했으되 허망했다. 사비성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백제는 패망했다.

  수도 사비성은 함락됐지만 한순간에 백제가 사라져 버린 건 아니었다. 당시 백제의 인구는 620만명. 그 땅에 세워진 성만 200여개에 달했다. 변방의 백제 사람들도 사비성 함락 소식을 전해 들었겠지만, 소식 한 줄만으로 나라가 무너진 사실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터였다. 나라의 패망으로 실의에 빠진 유민들은 소정방이 의자왕과 왕자, 1만2000여명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끌고 갔다는 소식을 들으며 분노했으리라. 

  나라가 패망한 슬픔을 딛고 백제부흥군이 일어섰다. 결과로만 보자면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잃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실낱같았던 백제의 부흥을 믿었던 이들의 꿈과 희망이 거기 있었다. 부안의 주류성에서, 충남 예산의 임존성에서 낫과 쇠스랑만으로 성을 지키던 오합지졸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던 나당연합군의 수만 대군을 물리쳤던 힘도 여기서 나온 것일 터다.

  그 백제부흥군의 자취가 울금바위에 남아 있다. 울금바위에 당도하면 바위 아래 큰 굴이 눈길을 붙잡는다. 자연 동굴은 아니고 오목하게 들어간 바위 아래를 쪼아내 만들었다.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이 기거한 굴이라 해서 ‘복신굴’이란 이름이 붙었다.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으로, 승려 도침과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과 손잡고 부흥군을 이끌었다.


# 울금바위 뒤편의 주류성에서 무너진 꿈을 보다

 

 울금바위까지 이어진 길은 바위를 돌아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을 택하면 능선을 타고 다시 개암사쪽으로 내려서게 되고, 오른쪽을 택하면 바위 뒤편의 능선을 넘어 무너진 성터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길을 따르면 울금바위를 성곽으로 삼은 성은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인적이 드물어 발목까지 쌓인 눈에 푹푹 빠졌다. 성터에 뒹구는 돌들도 모두 눈 속에 파묻혀 흡사 눈으로 쌓은 성처럼 보였다. 능선 너머로 온통 쌓인 눈으로 흰 도화지처럼 변한 부안의 들판이 펼쳐졌다.

  무너진 성터는 주류성의 자취다. 주류성을 지키던 부흥군은 날로 세력을 확장했다. 사비성은 무너졌지만 백제와 신라의 진짜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662년에는 주류성 인근에서 신라군을 격퇴했다. 내친김에 사비성까지 공격에 나섰다. 그들이 꿈꿨던 백제왕국의 부활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무너졌다. 그것도 적이 아닌 안에서부터. 백제부흥군의 주요 근거지였던 예산의 임존성에서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장수 흑치상지가 당나라에 투항, 칼 끝을 거꾸로 잡고 부흥군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말았다. 주류성에서도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과 도침, 부여풍이 서로 죽고 죽이면서 무너졌다. 복신이 도침을 살해했고, 왕권을 위협하는 복신을 부여풍이 제거했다.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포위해 분란에 싸인 부흥군을 공격했다.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맞섰지만, 결국 당나라 군사의 화공으로 전멸했고 주류성도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 부흥의 꿈이 사그라지고 만 그때가 663년 9월이었다.


# 신라 사람 원효는 왜 패망한 백제 땅에 왔을까 

  울금바위 중턱에는 원효굴이 있다. 원효가 676년 개암사를 중창한 뒤 울금바위에 굴을 파고 은거했다고 전한다. 신라 사람 원효는 왜 백제의 땅인 이곳까지 왔을까. 주지실에서 찻잔을 기울이던 개암사 주지 스님은 “백제 유민을 다독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했다. 나라를 잃은 뒤 다치고 소외받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 땅을 진정한 하나로 만들고자 함이었을 것이란 설명이다.

  거기서 원효가 주창했던 ‘화쟁(和諍)’을 본다. 원효가 말하는 화쟁이란 글자 그대로 ‘모든 관점상의 쟁점을 모순적 대립이나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상응하는 관계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실의와 분노로 가득한 백제 땅으로 와서 높은 산과 깊은 계곡처럼 서로 다르지만 한데 어우러지는 세상을 구현코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울금바위 중턱의 원효굴에는 난간이 만들어져 있지만, 아슬아슬 벼랑에 있어 여간해서는 사람들이 발을 들이지 않는다. 특히 이즈음처럼 눈이 쌓여 있으면 먼발치서 올려다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부안을 찾았다면 변산반도의 해안을 따라 난 30번 국도를 따라가는 여정이 제격이다. 그 길에 채석강과 격포, 내소사, 그리고 곰소만의 진득한 갯벌이 다 있다. 특히 곰소만 일대의 갯벌은 다른 계절보다 겨울의 쓸쓸한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멀리 물러간 갯벌 위로 바지락을 잡는 아낙들이 갯일을 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해를 받아 갯벌은 은박지처럼 반짝거렸다. 무채색의 풍경은 오래된 흑백사진과도 같았다. 

  멈췄던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평선을 이룬 갯벌 위로 눈발이 분분히 흩날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들른 곰소항에서 좌판에 생선을 올려놓고 팔던 아낙네가 투덜거렸다. “올해 눈은 참 징허게도 많이 오네.” 그렇게 눈이 내린 위로 또 눈이 내려 덮이고, 그 위로 다시 폭설이 내리고 있다. 개암사 뒤편의 울금바위에 켜켜이 쌓여 있는 시간처럼….

 
 

 

가는 길


  개암사를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야 하는데, 줄곧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는 방법도 있고,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 ~ 논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공주 ~ 서천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동서천갈림목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갈아타는 방법도 있다.  앞의 방법이 길찾기에 간명하다면, 뒤의 방법은 시간과 거리를 절약할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부안나들목으로 나가 부안읍내를 거쳐 23번 국도를 타고 상서면사무소를 지나 봉은삼거리에서 개암사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묵을 곳 & 먹을거리

  부안에서 최고의 숙소는 단연 대명리조트 변산이다. 빼어난 전망이며 수준급의 시설, 관광지와 연계되는 편리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곳이다. 특히 바다쪽 객실의 전망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훌륭하다. 리조트 내에는 뜨끈하게 물놀이 겸 사우나를 즐길 수 있는 아쿠아월드도 갖추고 있다. 리조트에서는 내소사와 새만금 등 부안의 명소를 다녀오는 버스투어도 운영하고 있다.

  민박이나 펜션을 찾는다면 내변산쪽을 찾는 게 좋다. 내변산을 넘는 736번 지방도를 따라 군데군데 민박집들이 있다. 격포나 모항 등 해수욕장에도 민박이 흔하다.

  격포항 일대는 횟집들이 많다.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은 격포 버스터미널 부근의 군산식당(063-583-3234). 백합을 찜과 탕, 죽으로 내놓는 백합정식(한상 2~3인 기준 6만원)이 가장 추천할 만하다. 1만원짜리 한정식도 제법 푸짐하다. 묵은 김치와 간장게장 등 밑반찬이 충실하다. 관광객이 뜸한 평일에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붐빌 만큼 인정받는 곳이다.

 

 

“손님 즐거우면 나도 즐거워… ‘情으로 빚은 술’ 대접

 

내소사 앞 ‘정든민박’ 강성태씨

 

 

  부안에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제법 이름난 민박이 있다. 내소사 입구의 ‘정든민박’. 한 독자가 보내온 제보 내용이 이랬다. 아들과 함께 이 민박에 묵으며 주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단다. 어쩌다 여치 얘기가 나왔는데, 아들이 여치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모르더란다. 그러자 주인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더니 한참 후에 헐떡거리며 나타나 어디서 잡았는지 여치를 가져다가 아이 손에 올려줬다는 것이다. 혹시 이런 친절도 장삿속일까 싶었는데, 뜻밖에 ‘정든민박’의 주인 강성태(74·사진)씨는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였다. 

  “다 나 좋아서 하는 일이지요. 시켜서는 못하는 일이에요. 찾아온 사람들에게 뭐 하나라도 더 보여줬으면 좋겠고, 그래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고…. 그냥 그런 마음으로 하는 거지요.”

  강씨는 전주에서 제지회사를 다니다가 은퇴한 뒤 14년 전 고향 집으로 돌아와 소일 삼아 민박 일을 시작했다. 옛집의 안채와 광채를 민박집으로 꾸몄다. 낡은 옛집의 담벽을 황토로 바르고, 틈날 때마다 나무를 잘라 안팎을 운치있게 치장했다. 그래 봐야 옛집은 허름했다. 화장실도 공동으로 써야 하고, 욕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겨울에 샤워는 꿈도 못 꾼다.

  이곳을 다녀간 이들이 하나같이 이곳 민박을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내가 뭐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들 얘기해 주니 고맙지 뭐.” 

  강씨가 주섬주섬 방명록을 꺼내왔다. 방명록 가득히 묵었던 손님들의 이름과 신상, 나눴던 얘기들이 적혀 있었다. 이름 옆에는 붉은 글씨로 OK란 사인을 적었다. OK가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강씨는 “다녀간 손님에게 안부전화를 하는데, 통화가 된 것을 표시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살펴보니 거의 모든 이름 옆에 OK란 사인이 적혀 있었다. 안부전화 외에도 강씨가 지키고 있는 원칙이 또 하나 있다. 민박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술 한 잔씩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른바 ‘정든주’다. 뭐로 빚느냐고 했더니 웃음과 함께 ‘정으로 빚는다’는 말이 돌아왔다.

  강씨는 대화 내내 기사를 보고 온 이들이 실망할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그러고는 ‘허름한 옛집을 그대로 쓰는 것이라 도회지 사람들이 쓰기에는 많이 불편하다’는 말을 꼭 써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출처> 20111. 1. 12 / 문화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