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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전라북도

덕유산 무주구천동 계곡. 초록 품에 안겨 푸른 숨을 쉬다

by 혜강(惠江) 2010. 6. 17.

덕유산 무주구천동 계곡

초록 품에 안겨 푸른 숨을 쉬다

 

 

박 경 일 기 자

 

 

 

▲ 초여름의 싱그러운 녹음과 짙은 이끼, 맑은 계곡이 어우러지는 덕유산 무주구천동 계곡. 계곡의 물길에 바짝 붙어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편도 6㎞의 잘 다져진 길은 경사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다. 길 옆으로 쏟아지는 폭포는 구천동 33경 가운데 제28경인 구천폭포다.

 

 

  덕(德)이라 함은 주로 사람의 품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크고 밝으며, 바르고 부드러운 품성, 그것이 덕(德)이지요. 덕유산(德裕山). 산 이름에 ‘덕(德)’을 쓰고 게다가 ‘넉넉할 유(裕)’자까지 더했습니다. 그 이름에서부터 넓고 깊으면서 유장한 맛이 풍깁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의 명성에는 닿지 못하지만, 덕유산은 남한 땅에서 4번째로 높은 산입니다. 주능선만 17.5㎞에 달하고, 해발 1200m가 넘는 봉우리를 스무개 이상 거느리고 있을 정도로 큰 산입니다.

  바야흐로 여름의 초입, 하루하루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 덕유산의 그늘에 들었습니다. 한 해 중 계곡의 숲이 가장 아름다운 때지요. 청아한 새소리와 맑은 계곡의 물소리가 짙은 녹음과 한데 어우러지는 청록색 이끼로 가득한 촉촉한 숲길. 어떻습니까. 상상만으로도 폐부로 빨아들인 들숨이 깊고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으신지요.

  초여름으로 들어선 이즈음에 걷는다면 딱 좋은 숲길. 그곳이 바로 덕유산 자락이 품고 있는 무주구천동 계곡입니다. 구천동 짙푸른 숲에 들어 콰르르 쏟아지는 폭포수와 초록의 그림자가 고요히 담겨 있는 소(沼)를 건너노라면, 일상의 번잡스러움쯤이야 맑게 헹구어낼 수 있을 터입니다.

  이름난 여행지들은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유명세가 더해지는 법. 숨겨져 있던 아름다움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이 들고 나고,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지요. 그러나 덕유산의 구천동은 다릅니다. 무주구천동의 명성은 지금보다 옛날이 훨씬 더 드높았습니다. 때는 일제강점기. 대구공립국민학교 5학년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답니다. 질문은 ‘(무주)구천동을 아느냐’는 것. 뜻밖에도 무주와 제법 떨어진 대구의 학생 중에서 구천동을 모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이런 오래된 유명세 탓인지, 무주구천동은 억울하게도 어쩐지 ‘낡은 여행지’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익숙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들까지도 이름만 들으면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는 것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여행 좀 다녀봤다’ 하는 이들도 구천동에 발을 디뎌보지 않은 경우가 꽤 많습니다. 아직 구천동 계곡에 가보지 못했다면, 가봤다 하더라도 다녀온 때가 6월의 초여름이 아니었다면 올해만큼은 꼭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덕유산 향적봉 정상을 목표로 삼은 본격 등산도 좋겠고, 무주리조트의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까지 올랐다가 향적봉, 중봉을 거쳐 백련사로 내려오는 길을 택해도 좋겠지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길을 걷고 싶다면 편도 6㎞에 달하는 긴 계곡 숲을 따라 백련사까지만 다녀와도 좋겠습니다. 어떤 길을 택하든 초여름 무주구천동 숲길의 깊고 짙은 녹음과 그윽한 정취에 반하게 될 것입니다.

 

 

 

오지의 전설 깃든 ‘33景’ 황홀…무주가 ‘우주’더라

 

 

▲ 덕유산 구천동 계곡을 끼고 난 숲길은 더없이 부드럽다. 이런 길에 서면 초록의 기운으로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아래 사진은 백련사에서 더 들어가 덕유산 정상을 향하는 산길에서 만난 오수자굴.

 

 

 

# 덕유산 깊은 자락, 초여름 무주구천동의 재발견

 

 



  덕유산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 등 2개 도(道)와 4개 군(郡)에 걸쳐 펼쳐져 있다. 그럼에도 덕유산이라면 전북 무주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구천동 계곡이 무주 땅에 속해 있기 때문이리라. 구천동 계곡을 일컬을 때면 그 앞에는 어김없이 ‘무주’가 붙는다. 무주의 구천동 말고 다른 ‘구천동’이 있어 유독 지명을 덧붙여 구별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렇다. 그건 아마도 무주라는 지명이 험준하고 깊은 오지의 느낌을 더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구천동’이란 이름보다 ‘무주구천동’이란 이름에서 더 깊은 계곡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때문일 터다.

  무주구천동은 깊고 깊은 오지의 대명사가 돼서 오래 전부터 이름을 날리던 명소 중의 명소였다. 그러나 때론 익숙하다는 것이 오래되고 낡았다는 느낌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오래된 유명세가 억울하게도 진면목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구천동 계곡은 별다른 위락시설이 없었던 때에 여름 물놀이의 명소였다.

  하지만 구천동 계곡의 진면목은 한여름 피서철의 물놀이가 아니라, 녹음이 우거진 푸른 이끼의 계곡 길을 걸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구천동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13개의 대(臺)와 10개의 소(沼)에다가 수많은 폭포와 계곡이 더해 이뤄진다. 70리(28㎞)나 된다는 구천동은 둘로 나뉜다. 구천동 33경의 제1경 나제통문부터 14경 수경대까지 37번 국도를 따라가며 이어지는 구간을 ‘외구천동’이라 하고, 삼공리 주차장에서 15경 월하탄에서 백련사를 지나 33경인 향적봉 정상까지 이어지는 숲길을 ‘내구천동’으로 부른다.

  37번 국도변에 나앉아 있는 외구천동은 그저 차로 휙휙 지나치게 되지만, 그렇다 해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다. 그닥 깊은 맛이 느껴지지 않는데다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없고 몇 곳을 제외하고는 차를 댈 곳도 마땅찮다. 구천동의 맛은 단연 내구천동이다.

  구천동관광단지 삼공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오르는 길은 들머리부터 범상치 않다. 갖가지 나무들이 짙푸른 숲그늘을 드리우고, 계곡에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월하탄, 인월담, 비파담 등의 절경이 펼쳐지고, 그 절경 하나하나마다 수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굳이 33경의 풍광을 짚지 않더라도 어떠랴. 유순한 길을 한 굽이 한 굽이 돌 때마다 빼어난 풍광은 그 길을 걷는 내내 발걸음을 붙잡는다.

 

 

# 덕유산과 구천동을 둘러보는 여러 가지 방법

 

 



  구천동의 매력이라면 덕유산을 끼고 여러 가지 구간을 선택해 동선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구천동만 보겠다면 삼공리 주차장에서 잘 다져진 비포장길과 시멘트포장도로가 번갈아 나오는 제법 넓고 탄탄한 길을 따라 백련사까지만 다녀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주차장부터 백련사까지는 편도 6㎞ 남짓. 제법 코스가 길지만 오르내림이 적어서 아이들의 손을 잡고도 숨 한 번 차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길이라 청량한 두어 시간의 숲길 걷기가 오히려 아쉽게 느껴진다.

  백련사는 덕유산의 유일한 절집이다. 한때 덕유산 자락에는 14곳의 절집이 들어서 있었고, 절집에 기거하던 승려가 9000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승려들이 수도를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쌀뜨물이 구천동 10경 만조탄까지 흘러내려왔단다. 구천동이란 계곡의 이름도 9000명 승려들이 살고 있는 둔소(屯所)라 해서 ‘구천둔’으로 불렸던 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렇게 바뀌었던 것이란다. 그러나 절집은 자취만 남기고 오래 전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300여년 전 덕유산에 올랐던 명재 윤증도 “남암은 덤불에 묻혀 인적이 없고, 북암은 중이 없고 부처만 남았더라”고 썼다.

  백련사 주위에는 아름드리 홍단풍들이 도열해 있다. 홍단풍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붉게 물들어 있다가 여름이 오면 초록으로 변하고, 가을에는 다시 붉게 물든다.

  백련사에서 내친 김에 오수자굴까지 다녀오는 것도 권할 만하다. 사실 그 길을 밟아보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아쉬울 터다. 백련사까지의 길이 제법 탄탄한 길이었다면 백련사에서 오수자굴까지는 조붓한 계곡숲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숲길은 온통 녹음의 그늘 속이다.

  물소리에다 휘파람새 소리를 따라 산길을 걸으면 마치 초록의 기운으로 샤워를 하는 기분이 든다. 오수자굴은 계조라는 사람이 살면서 경문을 가르치던 곳이었다는데 오수좌굴이라고도 불린다. 오수좌(吳首座)라면 오씨 성을 가진 스님을 뜻하는 것이겠고, 오수자(吳?W子)라면 더벅머리 총각을 뜻하는 것이겠다.

  이렇게 오수자굴을 지나서 조릿대 무성한 산길을 올라 중봉을 거쳐 마지막 33경인 덕유산 정상 향적봉까지 덕유산을 한달음에 둘러볼 수 있다. 오르는 길은 험하지는 않지만 오수자굴에서 중봉까지는 제법 장딴지가 팍팍해지는 가파른 본격 등반길이다. 덕유산 정상을 밟으면서도 비교적 수월한 코스도 있으니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서 향적봉~중봉~오수자굴~백련사 쪽으로 잇는 방법이다.

 


# 1300년전 신라와 백제의 경계의 흔적 … 나제통문

 

 



  무주구천동 33경의 제1경은 ‘나제통문’이다. 사실 구천동 33경에서 순서는 의미가 없다. 빼어남에 순위를 매긴 것이 아니라, 구천동을 찾아가자면 만나게 되는 순서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나제통문이 제1경이 된 것도 덕유산 구천동 자락의 가장 끝에서 입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제통문은 옛 백제와 신라가 국경을 이루던 곳에 뚫린 암굴이다. 나제통문을 찾은 이들은 의심없이 이 암굴을 통해 백제며 신라사람들이 오갔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위산인 석모산을 뚫은 굴은 한참 뒤인 일제강점기인 1910년쯤에 만들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 무주 인근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비롯한 수탈물자를 실어내기 위해 기차역이 있던 김천까지 신작로를 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다리를 놓고 굴을 뚫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니미굴’ 혹은 ‘설천굴’이라 불렀는데 훗날 무주 일대가 관광지로 개발돼 1969년 무주구천동 33경을 정하면서 역사적 유래를 찾아 ‘나제통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만들어진 연원이 어찌됐든 나제통문이 뚫린 자리는 정확하게 삼국 성립 이후부터 백제멸망시까지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대였다. 양국의 영토분쟁 때마다 이 일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을 것이고, 나제통문 서쪽을 흘러내리는 원당천 계곡은 양국 병사가 흘린 붉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나제통문 아래 물길이 고인 소(沼)에 ‘파리소’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전투 중 산더미처럼 쌓인 시신의 핏물이 고이면서 파리가 들끓어서였다고 전해진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철폐된 지 1300여년. 그러나 나제통문을 사이에 두고 아직까지도 동쪽과 서쪽의 풍습과 말이 확연히 다르다. 행정구역으로 보자면 나제통문의 이쪽과 저쪽이 모두 전북 무주 땅이지만, 신기하게도 석굴을 중심으로 동쪽의 옛 신라 지역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서쪽 옛 백제 땅은 충청도나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있다.

  두길리 벌한 마을과 무풍의 철목리가 경계를 이루는 산자락의 능선에는 각진 모양으로 우뚝 솟은 암봉이 서있다. 신라때의 화랑 남행석과 술랑 등이 산수에 반해 찾아들었다는 사선암이다. 사선암의 널찍한 바위에는 오래된 바둑판이 새겨져 있는데 당시 신라 화랑들이 모여 놀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가는 길

  대전 남부순환고속도로 산내분기점에서 구천동관광단지까지는 75㎞ 남짓 거리다.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경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에서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산내분기점에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무주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로 적상면을 지나 사산교차로에서 49번 군도를 따라 좌회전, 치목터널을 지나 배방교차로에서 우회전해 37번 국도를 따라가다 삼공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구천동이다.

 

묵을 곳

  구천동에서는 무주리조트(063-322-9000)가 단연 첫손으로 꼽힌다. 리조트와 구천동계곡의 들머리인 삼공주차장까지 셔틀버스가 밤늦도록 운행된다. 리조트의 곤돌라로 덕유산 설천봉까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다. 무주리조트 주변에 겨울시즌에 스키렌털을 겸하는 모텔들이 즐비하다. 4만~5만원선. 구천동 입구에는 산채음식을 내놓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선화가든(063-322-1021)은 덕유산에서 직접 뜯은 나물들을 손질해 내놓는다. 무주는 금강변에서 잡은 물고기로 끓여내는 어죽도 유명하다.

 

 

<출처> 2010. 6. 16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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