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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강원 정선 골지천 구미정, 세상을 버리고 선경(仙境)을 얻다

by 혜강(惠江) 2010. 6. 10.

강원 정선 골지천 구미정

세상을 버리고 선경(仙境)을 얻다

 

 

글·사진 : 박경일 기자

 

 

 

▲ 강원 정선군 임계면 사을기 마을에서 단봉산 자락을 넘는 소특재 고개의 암봉 위에 올라 내려다본 골지천과 구미정의 모습. 너른 암반과 맑은 물, 호젓한 정자가 한데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모름지기 조정의 사색당파 싸움에 진력이 나서 관직을 사임하고 물러난 처지라 하더라도 말년에 이런 곳을 찾아들었다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강원 정선군 임계면 봉산3리. 그곳에 골지천의 물소리와 바람이 지나가는 정자 ‘구미정(九美亭)’이 서있습니다. ‘구미(九美)’라면 아홉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일컫는 것이지요. 보통 선비들이 은거를 위해 지은 정자에 편액을 걸자면 옛 고사에서 그럴듯한 명문을 따오거나 따르고자 하는 뜻을 싣게 마련인데, 조선 숙종때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낙향했다는 이자(李慈)는 정자에 그저 담담하고 담백하게도 ‘아홉가지 아름다움’을 이름으로 삼아 내걸었습니다.

 

그 연유는 그 정자의 마루에 앉아보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정자에 올라앉으면 주변의 아름다움을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구미정에서 내다보는 경관은 그만치 빼어납니다. 정자 앞을 흘러내리는 골지천은 태백의 검룡소에서 발원한 한강이 제법 몸집을 불리면서 내려가는 한강의 최상류입니다. 여울을 이루면서 암반 위를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정자 앞의 물 건너 우람한 직벽과 어우러져 선경을 빚어냅니다. 구미정에서 내다보는 아홉가지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맑은 물과 우람한 산자락이 그려내는 것이지요.

 

강원 정선. 읍내의 오일장이며 아우라지쯤으로 대표되는 곳입니다. 여기에다가 동강과 레일바이크, 소금강 정도를 더할 수 있겠지요. 대개 그렇게 이름난 명소를 몇 군데 휘 둘러보고는 ‘다 보았다’고 하지만, 오히려 정선 땅의 절경은 불편하고 멀어서 뭇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있답니다. 골지천을 끼고 있는 바위 직벽 너머의 오지마을인 사을기 마을도 그중 한 곳이지요. 사을기 마을은 호젓하고 깊은 마을의 느낌도 좋지만, 뒤편의 소특재 넘는 길의 암봉 위에 올라서면 마치 비행기를 탄 듯 구미정과 그 앞으로 흘러가는 골지천의 물길을 내려다볼 수 있답니다.

 

여기에다가 임계의 바위 안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돌아가는 골지천 물길을 따라가는 여정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여량면사무소까지 25㎞ 남짓한 그 길에서는 비록 단번에 시선을 확 휘어잡는 절경은 없지만, 이제 막 초여름이 당도한 천변의 마을은 푸근하고도 정겹습니다. 일찌감치 강원도가 그 길의 빼어남을 알아보고 ‘산소길’이라는 이름까지 붙여놓았더군요. 산소길은 ‘걷는 길’이라지만, 굳이 걷지 않고 차로 달린다 해도 강변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길이 외진데다 호젓하기 이를 데 없으니 차의 속도는 한껏 늦춰도 좋습니다. 그 길에서 만나는 것은 대체로 이런 풍경들입니다. 물가의 나무그늘 아래 낚시를 드리우고 혼곤한 낮잠에 빠진 촌로, 파종을 마친 뒤 짬을 내서 천렵에 나선 중년, 이른 더위에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 평화롭고 또 평화로운 풍경들입니다.

 

 

         빗으로 빗은듯한 밭… 1만평 미루나무 숲…

         구미호도 홀릴 비경이로세 !

 

 

정선 골지천서 만난‘九美十八景(9가지 아름다움과 18가지 풍광)’

 

 

▲사진 왼쪽은 구미정 뒤편의 야트막한 구릉에 들어선 마을. 마치 정갈하게 빗질을 한 듯한 밭 한가운데 집이 들어서 있다. 오른쪽 위는 가랭이산 아래 골지천에서 고기를 잡는 모습. 사진 아래는 가드레일이 없어 골지천 물길을 시원하게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도로.

 

 

# 남한강에서 가장 빼어난 정자, 구미정에 올라앉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되 강원 정선군 임계면에는 ‘남한강 수계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다’는 정자가 있다. 이름하여 ‘구미정(九美亭)’이다. 명소가 많기로 이름난 정선의 내로라하는 여행지에 비해 덜 알려진데다, 찾아가는 길도 멀어 한적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런 한적함이 오히려 구미정의 정취에 한몫을 한다.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이자(李慈)가 사색당파의 싸움에 회의를 느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칩거하며 골지천변에 지은 것. 그러나 반들반들 고쳐 지은 정자에서는 시간의 깊이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정자가 첫손으로 꼽히는 것은 정자에서 둘러보는 주변의 풍광 때문이다.

 

  구미정 앞으로는 골지천이 흘러내린다. 골지천은 태백의 금대봉 자락 검룡소와 삼척의 대덕산과 중봉산에서 발원한 맑은 첫물이 흘러내리는 한강의 최상류다. 물은 희게 반짝이는 너른 바위들을 넘어가며 때로는 포말을 일으키며 때로는 고요하게 흘러내려간다. 그 물을 높은 뼝대(바위벼랑)가 감싸고 있다. 물 건너편에 병풍처럼 펼쳐진 직벽의 바위틈에는 소나무들이 가지를 뒤틀고 있다. 

 

정자에 걸터앉아 주위의 풍광을 내다보노라면 마치 한폭의 산수화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시 한수를 읊어도 좋겠고, 맑은 술잔을 앞에 둔다면 더 좋겠다. 초여름날, 정자마루에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혼곤한 낮잠을 즐긴다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겠다.  정자에 들었다면 현판의 뜻 그대로 ‘아홉가지(九) 아름다움(美)’을 찾아보는 게 순서겠다. 첫째 아름다움은 어량(魚粱). 개울에 물고기가 튀어오를 때 물 위에 통발을 놓아 잡는 경치다. 둘째는 전주(田疇). 밭두둑의 전원경치다. 셋째는 반서(般嶼). 넓고 평평한 물가의 바위다.

 

  이렇게 켜켜로 쌓인 절벽과 바위구멍을 찾아가면서 아홉가지 아름다움을 다 찾는다면, 그 다음은 18경 차례다. 물가 주변에는 열여덟가지 경치가 숨어 있다니 숨은그림을 찾듯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도 각별하다. 정자 입구에 정선문화원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 아홉가지 아름다움과 열여덟가지 풍광이 친절하게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으니 하나하나 짚어가며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잘게 잘라서 들여다보면, 전체적인 풍광에 취해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아름다움까지도 속속들이 느껴볼 수 있다.

 


# 사을기 마을의 암봉에 올라서 구미정을 내려다보다
 
 
구미정
 
 

  구미정에서는 안에서 밖을 보아도, 밖에서 안을 보아도 멋스럽다. 정자에서 암봉을 올려다보는 경치와 암봉에서 정자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정자와 물길을 굽어보는 명소가 강 건너편의 직벽 위에 올라앉은 사을기 마을에 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구미정 앞에서 물을 건너 마을로 이어지는 출렁다리가 놓여 있었지만, 수해로 다 떠내려가버리고 대신 하류 쪽에 마을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였다. 다리가 놓이고 마을 길에 포장이 되긴 했지만, 봉긋한 분지에 들어선 마을은 여전히 아늑한 오지마을의 정취를 풍긴다. 

 

  구미정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급 조망대가 마을 앞쪽 숲길에 숨어 있다. 마을 주민들이 ‘홈병대’라고 부르는 곳인데, 숲속 길로 잠깐 내려서면 길이 끊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천길 낭떠러지다. 여기서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물길과 구미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탄성이 터질 정도다.

 

  사을기 마을을 찾은 이들은 홈병대만 돌아보고 내려가지만, 사실 더 빼어난 경치는 마을 뒷산인 단봉산 소특재를 넘어가는 산길의 암봉을 올라야 마주할 수 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소특재 너머 첩첩산중에도 제법 번듯한 마을이 있었다지만, 마을이 없어진 지금은 산길마저 흐릿해졌다. 그 길을 따라 넉넉잡아 20분쯤이면 암봉 위에 서게 된다. 암봉을 딛고 올라서면 멀리 첩첩이 이어진 산들과 발아래를 굽이쳐가는 골지천의 물길, 그리고 그 물길 곁에 앉아 있는 구미정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서 물길과 정자를 내려다보노라면 새삼스러운 것이, 천변에 세워진 정자 하나가 풍경에 적절한 탄력을 준다는 것이다. 이 그림 같은 풍경에서 구미정을 지워버린다면, 아마도 감흥은 절반쯤으로 줄어들리라.

 

  암봉에 올라서면 시야의 폭이 워낙 넓어 경치를 한눈에 다 담지 못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골지천 상류의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이 눈에 들고 왼쪽으로 돌리면 골지천 물굽이가 휘어감아 돌아가는 뒷모습이 햇살에 반짝거린다.

 

 

# 미락숲에서 조용한 강변 마을을 지나서 여량까지 가는 길

 

   1만여평에 달하는 초지가 깔려 있는 숲은 그 안에 드는 것만으로도 숨이 편안해질 정도로 우람하고 짙다. 잘 정비돼 있지는 않지만 숲 그늘에서 캠핑을 즐기겠다면 이곳 만한 곳이 없겠다. 굳이 야영을 하지 않더라도 숲 사이에 돗자리 한 장만 깔고 앉는다 해도 청신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미락숲을 돌아나와 암내교에서 시작해 골지천을 따라가는 강변길은 강원도가 ‘산소길 1코스’로 명명한 명품 길이다. 낙천리의 ‘바위안’을 지난 길은 가랭이교를 건너면서 골지천을 오른쪽으로 또 왼쪽으로 끼고 내려간다. 너른 천변에는 간간이 주민들이 이른 물놀이를 하거나, 반두를 들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구미정이 나오고 길은 물길에 바짝 붙어 내려간다.

 

  노일마을, 두메아리마을, 새치마을, 곰바리마을…. 천변을 끼고 있는 마을들의 이름이 정겹다. 물길은 마을과 마을을 지나면서 급해지기도 느려지기도 하면서 곳곳에 소(沼)를 만들기도 하고, 여울을 만들기도 한다. 강변에서 우뚝 솟은 반론산의 위용을 올려다보는 맛도 각별하다만들기런 풍경을 찬찬히 보자면 강변을 따라서 한적하게 걷는 것이 좋겠지만, 워낙 이쪽은 오가는 차들이 없어 속도를 늦춰가며 느릿느릿 달리는 것도 나무랄 데 없다. 이렇게 바위안에서 출발한 골지천은 25㎞를 흘러내려 여량에 가서 닿는다. 

 

  여량에서 골지천은 도암호와 물안골,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려온 송천과 만나서 조양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내친 김에 42번 국도를 따라서 조양강 물길을 끼고 정선읍까지 달려도 좋겠고, 정선에서 다시 귤암마을 쪽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조양강과 남동천이 만나서 동강을 이루는 곳까지 내려가도 좋겠다. 그 길을 한달음으로 다 잇는다면 한강이 발원해서 골지천으로, 조양강으로, 동강으로 몸집을 불리고 이름을 바꾸면서 흘러내리는 강과 초여름의 강변 풍경을 다 볼 수 있다.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하진부나들목으로 나가서 59번 국도를 따라 정선방면으로 향한다. 줄곧 오대천을 끼고 달리는 59번 도로를 따라 나전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 뒤 바로 좌회전해 42번 국도로 접어들어 여량방면으로 향한다. 여량면소재지를 지나 42번 국도를 따라 동해방면으로 가다가 송원동에서 우회전하면 임계초교 송원분교 쪽 포장도로가 나온다. 국도변에 구미정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구미정에서 골지천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여량면소재지에 닿는다. 25㎞에 달하는 이 길이 이른바 ‘강원산소길’의 제1구간이다.

 

묵을 곳 

  임계면소재지에는 이렇다할 숙소가 없다. 사을기 마을 안쪽에 방성애산장(033-563-6665)이 추천할 만하다. 15년 전에 이곳에 정착한 부부가 투박하게 제 손으로 지어낸 집이다. 고즈넉한 산촌민박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구미정 인근에는 하늘나리펜션(033-562-1953)이 있다. 임계에서 백봉령 쪽으로 향하다 우회전해 들어가는 직원리와 도전리에도 제법 시설이 좋은 펜션들이 몇곳 있다. 임계에서는 쇠고기가 유명하다. 고기 맛이야 다 등급에 따라가지만, 무엇보다 산지에서 직접 도축한 고기를 내놓으니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출처> 2010. 6. 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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