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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강원도

양양 달하치, 심산유곡에 터잡은 '달빛 아래 첫 동네'

by 혜강(惠江) 2010. 6. 12.

 

양양 달하치

심산유곡에 터잡은 '달빛 아래 첫 동네'

 

신성순 여행작가

 

 

 

 * 달하치 계곡의 이름없는 폭포 * 

 

 

  이름에서부터 정이 뚝뚝 묻어나는 달하치. 달과 가장 가까운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달하치(月下峙)라고 했다던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겠지만 '달빛 아래 첫 동네'라는 뜻을 지닌 마을은 이곳뿐이리라. 사방으로 1000미터가 넘는 고산준봉들이 에워싼 가운데 손바닥만한 분지에 자리한 마을이다.

  달하치와 이어지는 통로는 둘이다. 하나는 어성전에서 면옥치리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서 임도를 타고 5km 남짓 가는 길이고, 두 번째 길은 장리에서 배터골로 들어와 계곡을 따라 걷는 길이다.

  첫 번째 길도 평탄대로는 아니어서 하체 긁힐 각오를 한다면 어렵사리 헤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은 차를 끌고 들어올 엄두조차 나지 않는 험로인지라 볼성사나운 차랼을 만나 눈살 찌푸릴 일 없어 한결 호젓하고 운치 있다. 원래는 나무를 잘라 실어 나르던 멧갓길(산판길)이었기에 이 길로도 차가 다녔다. 그러나 벌목이 금지된 뒤로는 차바퀴 흔적을 찾기 힘들어졌다.

   여기저기 길이 동강나고 호박만큼 큰 돌들이 나뒹구는데다 일고여덟 차례나 물을 건너야 하므로 지프형 차량이라고 해도 몰고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다. 배터골 마을에서 달하치에 이르는 35분 남짓한 계곡 길을 걸으며 맛보는 운치도 그만이다.

 


오지에서 맞이하는 싱그러운 아침

  맑은 물이 철철 넘치는 달하치계곡은 청량하기 그지없다. 어두컴컴한 숲 그늘 아래로는 이름조차 갖지 못한 폭포수가 쏟아지며, 폭포 아래 깊은 웅덩이에는 버들치, 쉬리, 기름종개 등이 휘젓고 다닌다. 주변 숲에는 산새들이 온종일 재잘대고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코를 찌른다. 한마디로 자연의 낙원 같은 곳이지만 한여름에도 피서객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젓하기만 하다.

  달하치는 말이 마을이지 단 두 가구만 사는 첩첩산중 오지로 주민도 단 둘, 모두 홀아비(?)들이다. 한 분은 50대 후반, 한 분은 60세가 넘었는데 무척 건강하시다. 홀아비는 이가 서 말, 홀어미는 은이 서 말이라는 옛말이 있지만 이 마을의 홀아비들은 다르다.

  토종골 치고 약초 캐고 산나물 뜯으며 사는데 그 강한 생활력에 감탄할 정도다. 그런데 실은 홀아비가 아니라 가족들을 대처에 두고 산 속에 홀로 사는 자연인들이다. 할 일 없는 겨울에는 가족들을 만나러 마을을 뜨는 일이 많다.

  이 마을에 갈 때 고기를 사가면 환영받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가 없으므로 고기를 맛볼 일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 모닥불에 삼겹살 구우며 인생 얘기 나누노라면 오지의 향기가 얼마나 그윽한지 실감할 수 있다. 그네들이 세상 보는 눈은 우리와 한참 다르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자연 그 자체를 경외의 대상으로 보아야만 마땅한 게 인간이고, 인간이란 그 자연 속에 녹아든 미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식으로 민박을 치지는 않지만 서로 뜻이 맞으면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휘영청 달빛과 쏟아지는 별빛을 벗 삼아 꿈결 같은 잠을 자고 맞이하는 아침이 그토록 싱그러울 수가 없다. 아쉬움을 떨치고 돌아올 때는 이부자리 밑에 지폐 몇 장 놓고 나오는 게 좋을 듯싶다. 직접 주면 받지 않을 터이므로.

 


옛날에는 은광과 주막도 있었던 연화동

 

  오가는 길에 달하치 인근 연화동도 들러보자. 배터골로부터 20분 거리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면 달하치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지 않고 곧바로 10분쯤 가면 연화동에 닿는다. 이곳에는 단 한 가구가 외롭게 산다. 그러나 집주인 허락 없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연화동은 양양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지름길 도중에 위치해 옛날에는 사람 왕래가 잦았고, 100여 년 전에는 근처 벽실령 꼭대기에 은구뎅이라는 은광이 있어 제법 흥청거렸던 마을이다.

  어느 날 벽실령 은광이 무너져 많은 광부들이 숨졌다고 한다. 당시 광부들이 광산에 들어갈 때는 패랭이 모자를 입구에 걸어두었는데, 매몰 사고가 난 후 패랭이를 세어보니 99개여서 아흔아홉 명의 광부가 무너진 갱도에 묻힌 것을 알았다고 전해진다.

  연화동이라는 이름은 은광 근처 주막집에 연화라는 기생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 주막에는 기생들도 많았고 연못까지 있어 오가던 나그네들이 한 잔 걸치며 회포를 풀기에 좋았다는데, 이제는 외딴집 한 채가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니 인생사 덧없음을 실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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