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태백 두문동재 ∼ 분주령
조심조심 혼자 보고픈 봄꽃들의 ‘지각잔치’
박 경 일 기자
▲ 태백의 분주령 일대는 지금 야생화들로 화려한 꽃밭을 이루고 있다. 왼쪽 큰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귀부인의 품격이 느껴지는 얼레지, 노란 빛이 선명한 노랑제비꽃, 그려넣은 듯 무늬가 멋스러운 노랑무늬붓꽃, 맑은 하늘색의 현호색, 귀하디 귀한 대성쓴풀, 활짝 잎을 연 꿩의 바람꽃, 정갈한 풍모의 홀아비바람꽃, 군락을 이뤄 꽃을 피운 한계령풀, 꽃술이 무늬처럼 보이는 개별꽃.
‘시간의 태엽’을 천천히 거꾸로 감는 여정. 이즈음 강원 태백으로 떠나는 여행이 딱 그렇습니다. 유난히 들쑥날쑥했던 봄날씨 탓일까요. 올해 태백의 시간은 두 달쯤 늦게 가는 것 같습니다. 산벚들은 아직도 환한 꽃잎을 달고 있고, 개나리와 진달래도 미처 다 지지 않았더군요. 자작나무들도 이제서야 여린 새잎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태백은 봄이 늦게 당도한다지만, 올해만큼은 늦어도 너무 늦었다 싶었습니다. 함백산이며 대덕산의 5분 능선 위쪽으로는 아직도 벗은 겨울나무들로 가득했으니까요.
올봄은 유독 ‘갈 지(之)’자로 오락가락 왔습니다. 강원도 산간에는 4월 말까지도 눈보라가 퍼부었습니다. 그러다가 불시에 봄의 기운이 번지면서 태백 일대의 벗은 겨울나무 둥치 아래서도 봄꽃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태백의 야생화라면 단연 백두대간의 함백산(1573m)과 대덕산(1307m)을 잇는 분주령(1080m)이 최고입니다. 두문동재(싸리재·1268m) 정상에서 출발해 금대봉을 거쳐 분주령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말 그대로 ‘꽃길’입니다. 해발고도 1000m를 오르내리는 산길이라 겁부터 먹기 쉽겠지만, 두문동재에서 시작하는 산길은 ‘등산’이 아닌 ‘하산’의 부드러운 내리막입니다. 그 길가에 정해진 순서는 다 무시한 채 사태가 나듯 야생화들이 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구간은 산림청의 ‘산불특별대책기간’에는 철저하게 입산이 통제됩니다. 매년 통제기간이 끝나는 5월15일 이후면 한바탕 봄꽃들이 잔치를 벌이고 난 이후가 되기 십상이지요. 하지만 올해는 다릅니다.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양지꽃, 개별꽃, 한계령풀, 대성쓴풀, 족도리난, 홀아비바람꽃…. 예년 같으면 지금쯤 다 지고 말았을 얼레지도 아직까지 성성하게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습니다.
사실 그 꽃밭 길을 다 걷고 나서 고심했습니다. 이미 아는 사람들은 아는 곳이라지만, 기사를 더 보태서 사람들을 더 끌어들이는 것이 옳은 일인지, 해마다 길이 넓어져 가고, 누군가 꽃을 캐간 흔적들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숨겨두는 것이 맞는 것인지 좀처럼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분주령의 꽃밭을 이야기하기로 한 것은 누구든 그 꽃밭에 들면 저 스스로 피어난 우리 땅의 야생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왜 그것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란 믿음 때문입니다. 그 화려한 봄의 꽃잔치에 다녀오시겠다면 되도록 천천히, 부디 발밑을 조심하시고, 조심스럽게 다녀오십시오, 수십명씩 모여서 떠들썩하게 다니는 행락 말고, 소중한 사람 몇몇과 함께 조용하게…그렇게 다녀오시기를….
폭죽 터지듯 핀 꽃길, 그 길에 어디 꽃 뿐이랴
▲ 분주령으로 향하는 산자락에서 만난 우산나물 군락. 마치 누가 일부러 일군 밭처럼 우산나물이 지천에 깔렸다. 우산나물 잎이 이름그대로 우산을 펼친 듯하다. 왼쪽 작은 사진은 능선의 늙은 나무등걸 속에 자리를 잡은 개별꽃 무더기.
함백산 자락에서 금대봉을 지나 대덕산을 잇는 분주령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봄이면 화사한 야생화로 가득 차는 ‘꽃길’이다. 그 길의 출발지점은 두문동재(일명 싸리재)의 정상. 지금은 정선과 태백을 잇는 38번 국도가 두문동재 아래 터널로 지나지만, 터널이 뚫리기 전의 두문동재는 굽이굽이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는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터널이 뚫리면 옛길은 사라지게 마련이지만, 두문동재를 넘는 옛길은 여전히 성성하다.
두문동재 정상의 산불감시초소에서 차량차단기를 넘어서서 금대봉 쪽으로 향하자마자 야생화들이 마중을 나온다. 먼저 눈에 드는 것은 산괴불주머니. 노랗게 무리지어 군데군데 군락을 이루고 있다. 몇 걸음 채 딛지도 않았는데 풀숲으로는 야생화들이 눈에 띈다. 순백의 꽃잎에 수술이 까만 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 개별꽃이 다음 순서다. 그 사이사이로 양지꽃이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고, 태백제비꽃, 노란제비꽃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다들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서 이렇듯 찬란한 봄날을 맞고 있다.
봄꽃을 따라가는 여정에서 눈길을 빼앗는 것은 단연 얼레지다. 보랏빛 색감이며 요염한 자태가 단연 압권이다. 대견하게도 아직까지 지지 않은 얼레지들이 마치 귀부인 같은 풍모를 뽐내며 피어 있다. 사계절 통틀어 화려하기로 치자면 얼레지만한 게 또 있을까.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는 한쪽의 잎을 내는데 무려 3∼4년. 두 쪽의 잎을 내놓고서야 꽃을 틔우니, 씨앗이 떨어진 지 7∼8년 만에 꽃을 피우는 셈이다. 한송이의 꽃을 틔우기 위해 흙속에서 보낸 시간만으로 치자면 귀하디귀한 꽃이지만, 눈을 돌리는 곳마다 화사한 자태를 뽐내며 피어 있다.
두문동재에서 임도를 따라 금대봉까지는 금방이다. 약한 오르막을 20분 정도 오르면 봉곳한 금대봉 정상이다.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를 품고 있는 봉우리다. 고개를 돌려 멀리 시선을 두면 이어진 연봉들이 주르륵 펼쳐진다. 두위봉과 백운산이 일으켜 세운 힘찬 지맥도 한눈에 들어온다.
금대봉 정상에 서면길은 매봉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과 대덕산으로 향하는 분주령길로 갈라진다. 야생화 탐방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오른쪽 분주령길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금대봉에서 산행안내판을 꼼꼼히 짚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도 같다. 그곳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어쩌면 행운이다. 물론 ‘의도적’으로 길을 잃는 것은,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금지구역을 출입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안될 말이다. 자세히 위치를 밝힐 수는 없지만 2년 전 봄날, 금대봉을 빗겨 산 비탈면으로 난 오솔길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최고의 야생화 군락과 맞닥뜨렸다. 어찌나 꽃밭이 끝없이 화려하게 펼쳐졌던지 그 앞에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평생 봤던 야생화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은대도 이곳 군락지에 비하면 어림없을 것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봄 햇살에 반짝이며 함초롬히 피어난 한 포기의 야생화가 때론 더 아름다운 법. 꽃을 보러 나선 마음에 ‘더 많은 꽃 보겠다’는 욕심을 묻힐 수는 없는 일이다.
임도에서 능선에 오르자 귀하디귀하다는 한계령풀의 노란 꽃망울을 만났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그러나 금대봉 인근에서는 하나의 꽃대에 여러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지천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는 한계령풀이 ‘멸종위기’라는 게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예년의 경우에는 피는 시기가 달라 서로 만나지 못하는 얼레지와 함께 피어 있으니….
그러고 보니 지나쳐온 꽃들도 모두 두서가 없이 한데 피었다. 봄 야생화들은 종류마다 조금씩 피는 시기가 달라 한 꽃이 지면 다른 꽃이, 그 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꽃들이 배턴을 이어받으며 피어나는데, 올해는 어찌 된 게 현호색과 피나물이 한데 어우러졌고, 얼레지와 한계령풀이 함께 싱싱한 꽃대를 올렸다. 아마도 4월 말까지 눈이 퍼부었다가 불시에 날이 풀리면서 계곡마다 숲마다 야생화들이 수런거리며 한꺼번에 폭죽을 쏘아 올리듯 꽃을 피워낸 탓이리라.
분주령으로 향하는 능선길에 서면 왼쪽으로는 정선 땅이고 오른편으로는 태백 땅이다. 부드러운 내리막의 능선을 걷노라면 왼쪽에서는 훈기가 느껴지는 공기가, 오른쪽에서는 서늘한 공기가 느껴진다. 확연히 양쪽 공기의 온도가 다르다. 그 능선을 따라 노랑제비꽃이며 태백제비꽃은 물론이거니와 잎 아래쪽에 비밀스레 꽃을 피우는 족도리풀까지 피어 있다.
그 길에 어디 꽃뿐일까. 우산나물을 비롯해 봄나물들이 곳곳에 지천으로 솟아나고 있고, 나뭇가지 끝에도 여린 새순이 이제 막 돋고 있는 참이다. 접은 우산모양의 우산나물 군락은 마치 누군가 씨를 뿌려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나뭇가지의 발그레한 여린 새순도 꽃만큼 아름답다. 여기다가 산길을 걷는 내내 뾰로롱 거리는 새소리까지 따라온다. 꽃으로 눈이 즐겁고, 새소리로 귀도 즐겁다. 깊은 산중의 공기도 달다.
능선에서 내려서 분주령에 당도하면 대덕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과 검룡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 중에서 택해야 한다. 여기서 힘이 남았다면 대덕산을 들렀다 내려오는 것이 낫겠고, 이 정도로 족하다 싶어 검룡소로 내려선대도 아쉬울 것은 없겠다. 두문동재 정상에서 출발했다면 검룡소까지 내려서는 코스는 대략 6.6km 남짓. 산행만으로는 3시간이면 넉넉하고, 야생화에 취해서 한껏 걸음을 늦추면 4시간이 소요된다. 돌아 나오는 길에서 한강발원지인 검룡소까지는 600m 남짓. 검룡소 주차장에 다다를 즈음. 풀숲의 군데 군데에 작은 꽃이 피어 있다. 새끼손톱 절반만 한 크기의 꽃을 엎드리다시피 해 들여다보니 대성쓴풀이었다. 야생화 도감에서만 보던 것이라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는데, 이리도 작은 꽃이었다니…. 또 하나 제 이름을 불러줄 봄꽃이 더해졌다.
가는 길
# 분주령 가는 길 = 금대봉에서 대덕산을 잇는 분주령은 자연생태계가 워낙 탁월하게 보전돼 있어 여러 가지 규제에 묶여 있다. 자연환경보전법상 생태경관보전지역이자 산림청이 정한 산림유전자보호구간이다. 여기다가 태백시국유림관리소도 지난 2007년 5월 7일부터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지정해 한때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들의 항의가 잦아 제한적으로 길을 열었고, 지난 6일에는 자연휴식년제 기간이 만료됐다. 사전에 태백시청 환경보호과(033-550-2061)에 신청하면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탐방로 외의 구간은 출입이 통제된다. 야생화 탐방은 태백의 숲해설가 김부래씨(011-9919-3267)에게 문의하면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묵을 곳·먹을 것
#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태백 일대로 여정을 정했다면 함백산 자락의 오투리조트를 추천할 만하다. 함백산의 불쑥 솟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어 일출을 마주할 수 있다. 태백시내에도 호텔과 모텔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황지를 끼고 있는 메르디앙호텔(033-553-1266)이 깔끔하다. 태백의 먹을거리로는 단연 한우. 태성실비식당식육점(033-552-5287)과 경성실비식당(033-552-9356)은 잘 알려진 맛집. 고등어, 갈치조림과 두부조림을 내놓는 초막손칼국수(033-553-7388)도 추천할 만하다. 야생화 탐방을 목적으로 태백을 갔다면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 바로 산채음식을 내놓는 태백도립공원 인근의 무쇠보리(033-553-2941)다. 태백에서 난 나물로 만들었다는 곤드레나물밥이 별미다.
<출처> 2009. 5. 1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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