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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기 및 정보/- 광주. 전남

목포로 떠나는 ‘신파 여행’, 유달산 자락에 숨은 ‘근대 풍경’

by 혜강(惠江) 2010. 4. 7.

 

목포로 떠나는 ‘신파 여행’

 

유달산 자락에 숨은 ‘근대 풍경’… 누추해서 정겹다 

 

박경일 기자

 

 

 

 

▲ 유달산 중턱의 오포대에서 내려다본 서산동 일대의 모습. 해안가의 경사면을 따라 처마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붕 너머로 고깃배가 들어오고 있다. 서산동의 가파르고 좁은 골목을 걷다보면 누추하되 정겨웠던 오래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항구도시 목포에서는 ‘신파’의 정서가 먼저 떠오릅니다. 트로트의 아릿아릿한 비음처럼, 순정과 배신의 드라마 결말처럼, 막걸리집의 젓가락 장단처럼…. 그렇게 목포에는 오래된 근대의 추억과 신파의 정서가 고여 있습니다. 

 
  목포를 목적지로 삼는다면 그 여행의 방법은 다른 도시와 사뭇 달라야 할 겁니다. 목포에서 빼어난 경관이나 다듬어진 관광지들만 찾아다니겠다면 목포를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목포의 명소로 꼽히는 유달산만 해도 그 산세만으로는 다른 이름난 산들에 명함도 내밀지 못합니다. ‘일등바위’가 있다지만 고작 해발 228m의 바위산에서 ‘일등’을 했다고 무어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대신 목포에서 봐야 할 것들은 ‘근대의 추억’입니다. 목포에는 일제 개항무렵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풍경이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하당 일대에 번쩍 번쩍한 신도시가 들어서고 개발의 축이 이쪽으로 다 옮겨가면서, 목포의 옛 도심이 성장을 멈춘 탓이지요. 그래서 목포는 의도한 것은 아니되 마치 오랜 유럽의 도시들처럼 시간이 깊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목포를 여행하려면 차를 두고 걷는 편이 더 낫겠습니다. 근대의 도시를 둘러보는 데는 타박타박 걷는 여정이 어울릴 뿐 더러, 보아야 할 것들은 대부분 목포역에서 걸음으로도 넉넉히 닿습니다. 일본인 대지주 저택의 거대한 정원을 둘러보고, 다다미방을 들인 일식 목조건물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는 거리를 걷다보면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과 현해탄에서 윤심덕과 함께 몸을 던진 극작가 김우진의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따라옵니다.

 

  6·25 전쟁 직후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는 오거리의 오래된 다방에는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찬 남농 허건과 제주로 향하던 화가 이중섭,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시인 김지하가 드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이 생긴 예술가들이 고래고기를 앞에 놓고 불콰하게 취했다던 동천주점이나 덕인주점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목포일대의 예술가들이 모여든다는 ‘오거리주막’에서 막걸리 한잔을 들이켜도 좋겠지요.

 

  목포의 유달산에 오른다면 그 산세의 위용이나 바다의 경치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언덕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달동네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서산동 달동네의 누추한 집들과 유달산 자락의 ‘다순구미’라고 불리는 온금동의 구불구불 비좁은 골목길은 이제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정겨운 풍경입니다. 달동네 집들마다 빨래들이 내걸리고, 그 지붕 위로 아슬아슬 낡은 어선이 지나다니는 모습은, 비록 고향이 항구도시가 아니더라도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내친 김에 그 골목에 들어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옛 추억을 되살려보는 것도 좋겠지요. 이렇게 목포의 매력은 ‘다른 여행지가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것들입니다. 목포에 가야 할 이유는 그래서 더욱 명확합니다.

 

 

호남예술 르네상스 열었던… 가슴 짠한 ‘추억의 아지트’

 

 

목포 유달산·오거리 다방서 만나는 ‘신파’

 

 

▲ 목포를 찾은 여행객들이 빠뜨리지 않고 찾아가는 갓바위. 목포시는 2년 전 바다 쪽으로 내민 바위를 잘 볼 수 있도록 갓바위 앞에 298m 길이의 물에 뜨는 해상보행교를 설치해 놓았다. 이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 갓바위를 정면에서 볼 수 있었다.

 

 

▲ 빼어난 조경의 수목들로 가득한 이훈동 정원.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열어준다. 단 토·일요일에는 공개되지 않는다.

 

# 오거리에서 만나는 근대의 추억과 예술의 향기



목포에는 오거리가 있다. 굳이 ‘목원동’이라는 동명(洞名)을 밝히지 않아도 목포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아는 곳. 목포에서 근대의 풍경을 둘러보겠다면 오거리를 빼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일제시대 오거리는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만나는 공간이었다. 은행과 극장, 잡화점과 시장, 유곽이 촘촘하게 들어섰던 오거리는 그야말로 목포의 중심이었다. 식민지배 체제에 무기력하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목포 사람들은 식민의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대신 근대성에 안주하면서 오거리의 유흥과 환락에 탐닉하고 신파극에 열광했다.



신파의 정서로 가득했던 오거리는 6·25 직후 시인, 화가, 문인, 묵객들이 모여들면서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어 나갔다. 그들의 근거지는 오거리의 다방들이었다. 목포에서 호남예술의 르네상스를 불러왔다는 이른바 ‘목포 오거리 다방문화’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찬방에서 그림에 열중하며 다리가 썩는 줄도 몰랐다던 남농 허건은 의족을 차고 오거리의 다방에 나와 앉아 후배들에게 자신의 아픔을 거리낌 없이 얘기했고, 제주 피란길에 오른 화가 이중섭도 오거리 다방에서 찻잔을 앞에 놓고 지친 발걸음을 쉬었다. 극작가 차범석은 차게 식은 커피잔을 앞에 두고 후배들에게 문학의 길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1970년대에는 유신의 칼날에 쫓기던 김지하가 다방의자에 기대 숨죽여 시를 쓰기도 했다.



당시의 다방은 그림을 선보이는 전시장이기도 했고, 미술품이 거래되는 시장이기도 했다. 문인들이 여는 시화전이며 시낭송회의 무대이기도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담’들은 제법 안목도 높아 산수화 몇점을 걸어놓기도 했고, 미술품 거래에 거간을 서기도 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하루종일 자리를 지키면서 엽차만 홀짝거리는 가난한 손님도 박대하지 않았고, 예술가들을 극진히 모실 줄도 알았다.

 


# 오거리의 주막에서 맛보는 막걸리 한잔

 

지금도 목포 오거리에는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보다 옛 다방들이 더 많다. 초원다방, 형다방, 로얄다방, 물다방, 샘다방, 빵빵다방…. 이들 다방은 모두 근래에 생긴 것들이지만, 주인이 일곱번 바뀌긴 했으되 올해로 55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다방도 있으니 그곳이 바로 오거리의 ‘묵다방’이다. 벽마다 그림을 걸어놓아 제법 옛 다방의 정취가 풍긴다. 목포근대역사관 건너편에는 적산가옥을 리모델링한 커피숍 ‘행복이 가득한 집’이 있다. 자그마한 정원을 가진 일본식 저택에 들어선 카페는 젊은이들이 반할 정도로 독특한 정취가 느껴진다.

 

옛 오거리에는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막걸리잔을 기울였던 덕인주점과 동천주점도 있었다. 고래고기와 숭어새끼 구이와 간재미 따위의 안주를 놓고 불콰하게 취해 막걸리 잔을 돌리던 곳이었다. 지금도 옛 덕인주점의 건너편 자리에 같은 이름의 간판을 내걸고 고래고기며 홍어를 파는 술집이 문을 열었지만, 명맥을 잇는 곳도 아니고 옛 정취를 느끼기에도 부족하다.

 

오거리의 옛 분위기를 맛보고 싶다면 새로 문을 연 ‘오거리 주막’을 찾아가보자. 목포의 서예가 장근환(50)씨가 새로 문을 연 곳인데, 옛 오거리의 추억을 간직한 목포의 예술인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오거리는 어수선한 상가들로 가득하지만, 다시 예전처럼 문화의 공간으로 변모해 가려는 움직임도 느껴진다. 골목 곳곳에 화랑들이 들어서고, 다양한 문화공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상은 오거리의 상권이 무너져가면서 일어난 일이다. 목포시의 개발의 축이 하당 신도시 쪽으로 급격하게 옮겨가면서 오거리 일대는 상권이 급속도로 쇠퇴했고, 임대로가 폭락하면서 화랑들이나 문화단체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상권의 쇠퇴가 문화의 복원으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 분재처럼 가꿔진 운치있는 정원을 거니는 맛

목포에는 그윽하면서도 요염한 일본 풍의 정원이 있다. 유달산 남쪽 기슭 유달동의 ‘이훈동 정원’이다. 1만㎡(3000여평)에 달하는 정원에 들어서면 그 큰 규모와 정원 가득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운치있게 다듬어낸 조경에 깜짝 놀라게 된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는 가장 큰 규모. 정원은 입구정원과 안뜰정원, 임천정원, 후원 등으로 나뉘어 있고, 113종의 나무들이 석탑 등 석조조형물들과 어우러져 있다. ‘그 정원만 보고온다 해도 목포에 간 보람이 있다’고 했던 지인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였다.

정원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인 대지주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조성한 것. 전남의 쌀과 면화의 실권을 장악했던 그는 미곡거래소와 면화공장, 제빙공장, 은행 등을 보유하고 있었던 거부였다. 정원은 해방후 해남출신 국회의원에게 불하됐다가 1950년대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이 구입해 가꿔왔다. 본래 일본풍의 정원에는 꽃이 없는데, 훗날 정원을 다듬으면서 살구나무와 동백나무, 벚나무 등을 곳곳에 심었다.

자그마한 연못을 끼고 있는 임천 정원에서 집 뒤쪽을 올려다 보면 유달산 자락의 대학루가 우뚝 솟아 있다. 노적봉에서 유달산을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첫번째 누각이다. 대학루에 오르면 발아래로 삼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목포시는 일찌감치 간척돼 육지가 돼버린 삼학도에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최근 다시 물길을 내고 섬으로 되돌렸다지만, 물길을 내는 것만으로 삼학도가 다시 섬이 될 수 있을까. 삼학도의 정취를 기대했다면 접어두는 편이 낫겠다.

 


# 유달산서 내려다보는 달동네 풍경 … 그리고 근대 인물들

목포를 찾았다면 유달산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곳. 바위로 이뤄진 유달산에 오르면 어디서나 시야가 탁 트인다. 유달산에 올라 내려다봐야 할 것도 다도해의 바다나 높이가 주는 감동이 아니라, 산동네의 비탈진 사면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누추한 달동네와 그 달동네의 처마와 처마를 잇닿은 지붕 너머로 지나는 낡은 어선들이다. 여기다가 유달산 중턱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에서 구성진 비음 섞인 트로트 가락이라도 울려퍼진다면 금상첨화겠다. 달동네의 누추한 집들과 미로처럼 연결된 골목들은 중년이상의 사람들에게 너나없이 어려웠던 시절의 도시풍경과 유년을 저절로 떠오르게 한다.

 

유달산에서 내려서 서산동과 유달산 자락의 온금동 일대의 미로 같은 골목을 돌아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면 누추하고 가난한 삶에서 배어나는 진득하면서도 뭉클한 느낌을 받게 된다. 온금동의 달동네는 한때 뱃일을 하는 뱃사람들이 몰려 살던 곳이지만, 지금은 젊은이들은 다 떠나갔고, 노인들만 밭은 기침을 내뱉으며 구불구불한 골목의 계단길을 오르내린다.

목포에서는 풍성한 근대의 이야기들도 있다. 북교성당에서는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김우진의 집터가 있고, 금으로 된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본인들에게 제 것도 아닌 유달산을 세 번이나 팔아먹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남긴 정병조의 옛집도 남아있다.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의 종점이 목포이니 찾아가기 간명하다. 근대의 풍경을 만나보겠다면 번거롭게 차를 가져가는 것보다는 기차를 타고 가는 편이 낫다. 용산발 목포행 KTX 열차편이 하루 9~10차례 운행된다. 오거리 등은 목포역에서 멀지 않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택시를 탄다고 해도 목포 시내에서 요금이 5000원이상 나오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묵을 곳 & 먹을 것


목포의 숙소는 신안비치호텔과 상그리아비치호텔 등이 대표적이다. 하당신도시 일대에는 새로 지은 모텔들이 즐비하다. 시설이 좋긴 하나 주변이 유흥가라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는 적합치 않다. 목포의 먹을거리는 홍탁삼합이 첫손으로 꼽히는데 금메달식당(061-272-2697)과 인동주마을(061-284-4068) 등이 유명하다.

 

 

 

<출처> 2010-04-07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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