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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나라’ 스리랑카, 실론티에 젖고 차향에 취하고

by 혜강(惠江) 2010. 2. 15.

 

휴(休)&숙(宿)

 

 

‘초록의 나라’ 스리랑카, 실론티에 젖고 차향에 취하고

 

 

스리랑카=조성하 여행전문기자

 

 

 

 

 

  《겨울은 무채()의 계절. 희고 검은 무채색에 지배된다. 낙엽 져 을씨년스레 변한 숲이 그렇고, 지난 주처럼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는 눈이 그렇다. 무채는 침잠(). 그런 겨울인 만큼 샘솟는 생명력의 상징 같은 ‘그린’이 그리울 수밖에. 그 생각 중에 스리랑카가 떠올랐다. 여행을 마치고 스리랑카를 떠나는 순간. 내 기억의 보따리를 채운 것은 스리랑카의 초록빛뿐이었다. 길가도, 고산 차밭도.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초록빛 외에 다른 빛깔을 발견하기 어려웠던 이 아름다운 섬. 실론티의 고장, 내전을 끝내고 세상을 향해 손짓하는 인도양의 초록 섬 스리랑카로 여행을 떠난다.》

  오후 11시 50분.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국제무역항 콜롬보의 위상이 느껴졌다. 싱가포르로부터는 비행시간으로 4시간 10분 거리. 하지만 시차는 세 시간이나 된다. 서쪽 멀리 있음을 뜻한다.

  이튿날 아침. 나는 시기리야의 고대 성채를 찾아 떠났다. 시기리야는 ‘사자 산 성채’로 이름난 세계유산. 산만 한 바위 덩어리가 평지의 숲 속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사자머리를 닮았다. 사자는 스리랑카의 상징. 그들 스스로 사자의 후예라고 믿는데 ‘싱할리즈’(고유말과 민족 명칭)의 ‘싱하’가 ‘사자’다. 시기리야는 ‘싱하+기리야(입)’의 합성어다.

  시기리야의 핵심은 바위 상단에 남은 화려한 요새유적. 때는 5세기 말. 후궁 소생 왕자 카샤파는 부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했다. 왕비 소생의 목갈라나 왕자는 인도로 피신하는데 11년 권토중래를 시도한다. 시기리야는 이에 대비해 카샤파 왕이 세운 요새. 하지만 패전 이후 원래의 불교수행 도량으로 돌아간다.

 

실론티에 젖고… 122km 뻗은 차밭에 취하고

 

 

  시기리야는 걸어서 오른다. 1200개 철제계단이 통로다. 최상부의 70m 절벽도 같다. 계단에 오르자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싼다. 도중에는 볼거리도 있다. 바위천장의 벽화(프레스코)인데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그림이다.

  정상의 풍경은 괴이하다. 다 허물어져 바닥과 벽돌석축만 남았다. 여느 유적과 다르지 않지만 지상 200m 바위 정상이라는 사실이 특이하다. 이곳을 왕은 가마 타고 올랐다니 전쟁에 질 만도 하다. 한눈에 조망되는 주변 산악과 평지 정글의 전망.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다음 행선지는 민네리야 국립공원. 거대한 저수지 주변의 초원지대인데 각종 새들이 서식하는 물길 너머로 수십 마리의 코끼리 떼가 보였다. 그리로 관광객을 태운 사파리 차량이 몰렸다. 야생동물 관람지로 이용되는 아프리카의 사바나(해발 1000m 이상 고원의 초원)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이날 숙소는 근처 호반의 아마야 레이크 리조트. 최근 스리랑카에 들어서고 있는 스파 개념 리조트로 시설만은 세계 수준이다.

  이튿날. 나는 중부고원의 고대도시 캔디를 경유해 산악지대로 달렸다. 캔디는 1815년 영국군에 의해 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실론 중부를 통치했던 마지막 고대왕국의 도읍지. 역시 세계유산이다. 그날 목적지는 해발 1900m의 고산도시 누와라 엘리야. 최고급 실론티 생산지로 실론티 역사의 현장이다. 캔디의 해발고도가 473m이니 해발 1893m의 람보다 고개를 넘는 여행길은 고도차 1420m를 거스르는 장대한 오르막이다.

  그 길. 예상대로 기막혔다. 물결치듯 이어진 구릉과 산악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길은 구릉의 마을을 지나, 계곡을 빠져나와 또다시 산과 언덕을 넘나들며 펼쳐졌다. 그리고 보이나니 초록빛의 차밭뿐. 스리랑카 중앙의 고원산악을 온통 차밭으로 바꿔버린 영국인의 집념에 혀가 내둘러진다. 이 산을 덮었던 아름다운 정글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1893m 높이의 람보다 고개. 누와라 엘리야 입구라는 간판이 도로를 장식한다. 내리막에 들어서자 아름다운 녹색 타운이 보인다. 누와라 엘리야다. 해발 1800m 고산에 어떻게 이런 마을이 생겼을까. 의문은 곧 풀렸다. 차밭을 일군 영국인 농장주가 이곳에 와보니 열대기후의 평지 해안과 달리 서늘해서 살기에 그만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별장을 짓고 여우 사냥과 골프를 하며 휴양하기로 했다. ‘리틀 잉글랜드’니 ‘동양의 스위스’라는 별명이 그런 역사를 잘 말해준다.

  그날 묵은 곳은 영국풍의 그랜드호텔. 엘리자베스 여왕시대 건축양식으로 1824년부터 실론 총독을 지낸 에드워드 반스 경의 저택이다. 호텔은 스리랑카에 4개뿐인 챔피언십 골프장 중 최고라는 누와라 엘리야 골프클럽 한중간에 있다.

  이튿날. 스리랑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졌다. 콜롬보로 가는 길목의 평지 아비사웰라까지 이어진 ‘누와라 엘리야 로드’ 자동차 여행길이다. 내가 ‘홍차가도’라고 이름 붙인 이 길은 어떤 길보다도 인상 깊고 아름다웠다. 전남 보성처럼 온통 녹차 밭으로 뒤덮인 초록의 산등성과 계곡, 구릉이 해발 1893m(누와라 엘리야)부터 134m(아비사웰라)까지 산자락을 타고 무려 122km나 펼쳐진 거대한 차밭 산지. 그 차밭 사이로 난 ‘롱 앤드 와인딩 로드’(‘구절양장’의 길을 뜻하는 비틀스의 노래 제목)를 단 한 번의 오르막 없이 천천히 내려가며 감상하는 기분이란 글쎄….

  게다가 차밭 구릉을 장식하듯 걸쳐 있는 폭포의 풍치는 또 어떻고. 그런 폭포는 도중에 심심찮게 나타나는데 그중 최고는 생클레어 폭포(낙차 80m)였다. 이 폭포는 실론의 고산차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평가받는 호톤의 탈라와켈레 마을 서쪽에 있다. 그 앞 생클레어 플랜테이션에는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는 전시관(생클레어 티 캐슬)도 있는데 거기 전망대에서 바라다본 폭포 주변 차밭 풍경. 죽기 전에 한 번은 봐야 할 풍경 중 하나다.

 

 

 ▼  24년 끌어온 내전 끝내고 관광개발 주력 ▼

 

  한때(1972년까지) ‘실론’이라 불렸던 스리랑카. 산스크리트어로 ‘랑카’는 섬, ‘스리’는 ‘휘황찬란한’이다. 인도 동남쪽, 인도양 섬이다.

  실론은 16세기 포르투갈이 붙여준 이름의 영어식 표기. 짚이는 게 있다. 포르투갈과 영국에 의한 식민역사인데 실론티(Tea)가 그 예다. 이 나라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고대역사에도 등장한다. 2세기부터 그곳 상인이 드나든 덕분인데 향신료 때문이다. ‘휘황찬란’은 금이 아니라 육두구 소두구 계피 코코넛 등 향료였다. 16, 17세기 대항해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희망봉을 발견하고 인도양 항로를 개척한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가마. 모두 포르투갈 사람이다. 실론은 당시부터 주요 포스트다. 그러니 첫 정복자는 당연히 포르투갈인. 그러나 150년 후 점령자는 네덜란드로 바뀌고 향료무역이 시작됐다.

  19세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최단거리 바닷길이 열렸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운하다. 콜롬보(스리랑카 무역항)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인도를 점령한 영국이 그냥 넘길 리 없다. 눈엣가시 같은 더치(네덜란드인)를 몰아내고 1815년에는 캔디의 실론 고대왕국마저 무너뜨린다.

  스리랑카의 가치는 대단했다. 포르투갈이 자바 섬을 네덜란드에, 네덜란드가 인도를 영국에 넘길지라도 빼앗기지 않으려 했을 정도다. 유럽의 관심사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향신료. 네덜란드는 코코넛 플랜테이션까지 벌였다. 영국은 커피 플랜테이션에 매진했다. 그러다 전염병 창궐로 몰락하자 차 재배로 옮겨 탔다.

  차는 스리랑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자연 파괴와 내전의 고통이다. 차는 고산지대 것을 최고로 친다. 인도의 다르질링, 중국의 대홍포 등이 그 예다. 영국인이 그걸 모를 리 없다. 인도 아삼에서 차나무를 가져와서는 실론 고산지대에서 대규모 경작을 시작했다. 그로 인해 중부내륙 고산의 어마어마한 정글 숲이 사라졌다. 해발 2200m까지 숲을 갈아엎고는 차나무를 심었다. 최고급 하이그로운(High-grown) 실론티의 주 생산지 누와라 엘리야가 그 현장이다.

  차 생산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잎을 일일이 손으로 따야 해서다. 싱할리즈(스리랑카 원주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점령지 인도에서 손을 빌렸다. 타밀어를 쓰는 남부 인도인이었다. 이들이 대거 스리랑카로 이주하는 바람에 영어 사용 인도타밀족이 싱할리즈를 쓰는 원주민과 뒤섞였고 게서 내전의 씨앗은 잉태됐다.

  1948년. 2차대전은 실론에도 독립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로 드러났다. 인도타밀족이 싱할리즈를 제치고 사회각계의 주도권을 잡은 것. 싱할리즈가 일어섰다. 인도타밀족을 몰아내기 위해. 그 중심에 야당지도자 반다라 나이케가 있었다.

  1956년 선거에서 나이케는 압승했고 총리 취임 직후 싱할리즈 언어정책을 폈다. 영어 사용 인도타밀족 엘리트에 대한 고사전략이었다. 견디다 못한 인도타밀족이 드디어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이때가 1975년.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24년간 계속됐다. 그 길고 긴 내전이 지난해 5월 종식됐다.

  지난해 11월 찾은 스리랑카는 평온했다. 내전의 흔적이 아직은 남았지만. 동네마다, 지역마다 검문소에 차단기를 설치하고 무장 군인과 경찰이 지키는 모습뿐이었다. 사고 소식은 없다. 전쟁과 폭력의 시대가 가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왔다. 그 스리랑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차 고무 코코넛 같은 농산물 대신 관광 같은 서비스로 경제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다. 바야흐로 스리랑카에도 여행의 시대가 도래했다.


|여행정보 |

◇항공 인천∼콜롬보 직항로 없음. 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서 싱가포르 항공편으로 당일 연결. 4시간 10분 소요.

◇기후 열대몬순, 연중 절반 이상(188일) 비 내림(0.1mm 이상).

▽콜롬보 지역=여행 적기는 1, 2월(기온 22도)

△강수량(1월): 88mm(8일간)

△상대습도(1월): 75%(연중 최저)

▽누와라 엘리야 지역

△기온: 최저(2, 3월) 8도, 최고(3, 4월) 22도. 한밤중에는 3도까지 급강하.

△강수량: 최저(2월) 76mm(9일간), 최다(6월) 266mm(24일간)

◇축제시즌 4월 엘리야 지역. 4월 1일이 신년 정초. 마칭밴드, 자동차경주, 경마대회, 골프토너먼트 등. ◇특산품 홍차. 누와라 엘리야 지역에서 최고급 홍차 생산. 산지에서 사야 더 싸다.

◇홈페이지 www.srilanka.travel

 

 

<출처> 2010. 1. 15 / 동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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