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실론 섬에서 부르는 태양의 노래
강혜란 기자 (중앙일보)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잘못 알았던 것을 깨치는 여행지로 스리랑카만 한 곳은 없으리. 인도 대륙에서 50㎞ 정도 떨어진 이 작은 섬나라는 ‘인도의 눈물’이라는 별명 이상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부처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안개 속 산봉우리,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리는 화강암 요새, “첫눈 빼고 다 있다”는 다채로운 자연 풍광의 나라. 물질적 풍요와 관계 없이 ‘행복지수’에서 방글라데시와 세계 수위를 다투는 이곳에서 그 기쁨을 나눠 가질 수 있다면 갈아타는 비행기 속 새우잠쯤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청춘의 잃어버린 마음이 숨쉬었던 상자”(‘실론 섬 앞에서 부르는 노래’ 중)라고 예찬했지만 그런 애잔한 감상을 갖기에 스리랑카는 ‘뜨거운’ 나라다. 적도 바로 위에 위치한, 한반도 3분의 1 크기의 이 나라는 연평균 기온이 27도에 이르는 열대의 섬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백사장과 야자수는 이 섬의 계절이 여름뿐이라고 착각하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리랑카의 원래 이름이 ‘실론’이었음을 기억하라. ‘실론티’라는 고유명사로 기억되는 대표 산물 홍차는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서 재배된다. 등고선으로 표시된 지도를 보면 해안 평원에서부터 우림 지역과 건조 지역이 펼쳐져 있고, 섬 중앙엔 원추처럼 고산지대가 솟아 있다. 버스로 몇 시간 달리는 사이 한여름에서 늦가을까지 풍광이 차창 밖으로 흘러간다. 온 섬이 적도의 열기로 달아오르는 4월이면 내륙으로 향하는 피서 행렬이 줄 잇는다.
기원전 유래한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꽃핀 스리랑카지만 한국에 각인된 이미지는 ‘칙칙함’에 가깝다. 2004년 말 쓰나미 피해로 수만 명이 숨지는 아픔을 겪은 데다 이따금 터지는 타밀 반군의 폭탄 테러가 불안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실제로 수도 콜롬보에선 주요 관공서를 비롯해 웬만한 건물 사진은 찍을 수 없다. 1500년 이상 된 이 오래된 도시엔 포르투갈(16세기)·네덜란드(17~18세기)·영국(19세기) 식민통치가 남긴 다채로운 양식의 건축물이 수다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를라치면 멀리서 고함소리와 함께 경찰이 달려온다. ‘싸이질’ 좋아하는 한국 여행객들로선 아쉬운 일이다. 삼엄한 검문검색에 한가로운 걸음이 방해받는 일도 다반사다.
하지만 콜롬보만 벗어나면 열대의 자유가 여행객을 반긴다. 천혜의 휴양지로 불리는 골(Galle)을 거친 뒤 삼각형으로 연결되는 세 유적 도시 시기리야·캔디·누와라엘리야를 둘러보는 게 여행의 정석. 전국에 네 곳 조성된 골프장도 각각 개성을 지녔으니 인근에 들렀을 때 그 맛을 만끽하는 것도 잊지 말지어다.
콜롬보 남쪽 115㎞ 거리(차로 2시간)에 위치한 골은 유럽의 해안 같은 느낌이다. 19세기 콜롬보항이 건설되기 전까지 제1의 항구도시로 기능했던 골은 식민지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적이 야자수 해변과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이곳의 랜드마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한 ‘골 포트(Galle Fort)’. 17세기 영국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네덜란드인이 지은 요새로, 병풍처럼 고지대를 감싼 성벽 안쪽에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양식의 건물이 두루 남아 있다. 성벽을 따라 걷노라면 대포를 놓기 위해 조성했던 U자형 포안(砲眼)에 하나씩 들어앉은 양산을 볼 수 있다. 양산 아래 연인들은 적도의 열기를 아랑곳 않고 밀어를 속삭이기에 바쁘다.
성벽이 끝나는 곳에 64피트(약 19m) 높이의 다이빙대가 있다. 한 무리의 청소년이 암초가 돌출된 바다로 뛰어내리는 다이빙쇼를 하고 있다. 한 번 뛰는 걸 보여주는 데 5달러. 보기에도 아찔한 광경인데 18세 산디브는 아무렇지 않게 팔을 벌려 낙하했다. 13세 때 시작해 하루 서너 번씩 해왔단다. 바다를 등지고 뛰어내리는 것도 예사다.
골 포트를 경계로 위아래가 부촌과 일반 시가로 나뉘는데, 2004년 말 쓰나미로 침식당한 곳은 아래다. 크리켓 경기장을 비롯해 전 시가가 침수돼 이곳에서만 약 5000명이 사망·실종했다. 하지만 ‘다크 투어리즘’을 각오한다면 오산이다. 국제원조와 보험 등에 힘입어 현대식 건물로 싹 물갈이됐고, “이젠 제발 쓰나미를 잊고 많이 찾아와 달라”는 게 주민의 바람이다.
신비의 고대 유적 시기리야와 담불라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명함을 들이밀며 ‘8번째 불가사의’를 자처하는 관광지가 더러 있지만 시기리야는 그중에서도 첫째다. 960쪽에 걸쳐 5대양 6대주의 대자연을 소개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마로니에 북스)에서도 시기리야는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소개돼 있다.
해발 370m 높이에 우뚝 솟은 화강암 덩어리 ‘시기리야 요새’는 저 멀리 평원에서도 시야를 압도한다. 5세기 말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왕이 형제들의 반역에 대비해 조성했다는 바위성이다. 사자의 입으로 들어가는 형세로, 입구 양쪽에 거대한 사자 발톱이 수호상처럼 버티고 있다. 발톱 하나 둘레가 한 아름만 한 엄청난 규모다. 미로처럼 이어지는 비탈 벽엔 1000여 년 전에 그려진 페레스코 벽화가 생생히 남아 있다. 불국사 에밀레종의 비천상을 연상시키는 고운 여인상들은 천연 염료로만 채색됐다는데, 세월의 흔적을 못 이겨 조금씩 지워져 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바위 성 꼭대기엔 축구장만 한 크기의 왕궁 터가 남아 있다. 사방을 둘러보니 발 아래 정글이 끝간 데 없다. 야생의 보고(寶庫)다. 스리랑카엔 4000마리의 코끼리와 표범, 야생 사슴, 악어, 곰, 버펄로 등이 서식하고 있다. 고유 희귀종 26종을 포함해 460종 이상의 조류가 관측되며 200종 이상의 나비를 만나볼 수 있는 나라다. 개나 고양이처럼 흔한 원숭이들의 울음 탓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멀지 않은 또 다른 유적지 담불라에 들르는 것을 잊지 말자. 기원전 1세기 암벽 동굴에 세워진 사원으로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5개의 동굴 방에 시대를 달리하며 조성된 15m 크기의 와신 부처상과 150여 개의 불상, 천장과 벽의 탱화가 높았던 문화 수준을 깨닫게 한다. 특히 와상과 주요 입상은 다른 데서 가져온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암벽을 깎아내 만든 것이라 하니 수천 년 전 불심이 경이롭기 그지없다.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던 캔디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유명한 고원 휴양지다. 1815년 영국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왕조는 막을 내렸지만 고유의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한 캔디는 이후 현대적으로 발전하면서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는 평판을 듣는다.해발 500m 높이의 캔디의 대표 명소는 부처의 치아를 모시고 있는 불치사(달라다 말리가와)다.
금빛 지붕이 인상적인 불치사는 17세기에 지어졌지만 이곳에 안치된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 때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전 세계 불교 신자들이 몰려오는 성지이건만, 불치 실물은 공개되지 않는다. 일곱 겹으로 된 금제 상자만 하루 세 번 공개되는데, 그나마도 긴 줄을 서야 일별할 수 있다. 거대한 코끼리 상아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사원은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준다.
또 다른 고원 휴양지 누와라엘리야는 해발 1889m 높이에 있으며, 영국 통치 시절부터 전해지는 유럽풍 별장이 즐비한 곳이다. 평균 기온이 13~15도에 머무르는 서늘한 곳이라 캔디와 더불어 스리랑카의 손꼽히는 홍차 산지이기도 하다. ‘빛의 도시’라는 뜻의 누와라엘리야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골프 코스가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총 길이 5550m의 이 18홀 코스에는 카트가 다니지 않는다. 총리 사저와 맞닿은 평원엔 인간의 발걸음만 허용하는 천연 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소박한 사치를 누리는 곳
- 스리랑카 ‘고급 리조트’ 4선
한국과 직항 노선이 없어 싱가포르나 홍콩을 경유해야 하는 스리랑카는 장거리 비행만 각오한다면 비용 대비 만족도가 최상인 곳이다. 수천 년 역사와 다채로운 지리 풍광이 빚은 조경미를 동남아급 숙박비로 누릴 수 있다. 400여 년에 이르는 식민통치 동안 유럽 문물에 노출되면서 상류사회의 휴양 문화가 뿌리 깊이 스며든 것도 스리랑카 리조트의 은근한 매력이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건축 양식에 영국 통치기(British period)가 끼친 영향은 지대한데, 제트윙 그룹 소속 세인트 앤드류스 인 누와라엘리야는 그런 격조와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9세기 후반 지어진 튜더 양식의 대저택을 개조한 호텔은 수백 년 된 가구와 앤티크 피아노, 벽난로 등 집기를 그대로 비치해 마치 영국 귀족의 별장에서 하룻밤 묵는 것 같은 우아함을 선사한다.
<출처> 중앙SUNDAY 매거진 제51호 / 2008.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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