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섬’ 제주 빛에 홀리다
한림항에서 삼나무 숲길까지 ‘빛따라 길따라’ 제주 한바퀴
문화일보 박경일기자
▲ 하늘로 치솟은 거대한 삼나무가 도열해 있는 1112번 지방도로는 어느 때 가봐도 좋지만, 특히 오후 4시쯤 햇살이 비껴들 무렵에 찾아가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 황홀한 풍경을 빚어낸다.
세상의 모든 여행지를 이렇게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다녀온 곳’과 ‘다녀올 곳’. 그런데 한번 다녀오고도 다시 ‘다녀올 곳’의 목록에 올라가는 여행지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지는 모르겠지만 지리산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한 번 다녀왔다 해서 ‘다녀온 곳’으로 정리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뒤에 그곳이 더 그리워지는 곳이 바로 지리산입니다.
제주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리산이 그 웅장한 능선과 첩첩의 산자락 때문에 그렇다면, 제주도는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 발견되는 곳이어서 그렇습니다. 제주야말로 갈 때마다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입니다.
제주의 느낌이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보다 시간을 더 잘게 쪼개서 ‘하루 중에서 특정시간에 가장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곳’을 찾아봤습니다. 시간과 빛에 몰두하면서 제주를 돌아보니, 똑같은 곳이라도 이 두 가지 조건에 따라 풍경과 느낌이 어찌나 달라지는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아직 푸른 새벽의 펄떡거리는 어시장부터,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는 아침 무렵에 가장 아름다운 바다, 그리고 해가 머리 위에 높이 뜰 때야 빛나는 숲,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오후에 비로소 황금빛으로 빛나는 삼나무 숲길, 그리고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는 섬의 풍경까지….
그렇게 만난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1112번 도로 삼나무 숲길이었습니다. 힘차게 솟은 삼나무 숲 사이로 난 도로. 그 도로의 높이와 굴곡이 그려내는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이야 늘 감탄하는 바이지만, 해가 설핏 기울어가면서 황금빛으로 물든 햇살이 도로 위로 쏟아지자 가장 황홀한 광경을 만들어냈습니다. 반짝이는 금빛 햇살을 받으며 그 길 위를 굴러가는 자전거는 어찌나 황홀하던지요.
제주의 새벽 푸른빛 속에서는 조업을 마치고 밤새 항구로 들어온 어선들이 조기그물을 터는 한림항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고, 오전 10시쯤에는 제주시 별도봉에서 내려다본 바다가 최고였습니다. 한낮쯤이라면 사려니 길에서 만난 겨울 숲의 향기가 짙을 것입니다.
오후 나절이라면 시흥리 해안도로변의 사스레나무 군락지에서 바라보는 잉크빛 바다를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제주에서 빛을 따라가면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을 하나 둘 펼쳐 보여드리겠습니다.
은빛 펄떡이는 새벽 한림항
- 금빛 햇살 부서지는 사려니 숲길 -
오전 6시 - 수산물 모여드는 어판장
▲ 만선을 이루고 새벽 한림항에 닿은 조기잡이 어선들이 그물에 걸린 조기를 털어내고 있다. 한림항에는 제주 일대는 물론이고, 멀리 목포, 여수, 삼천포 등지에서 출항한 저인망, 유자망 어선들이 갈치와 민어, 광어 등을 부려놓는다.
뜻밖이지만, 제주의 항구에서 요즘 마라도 너머 먼바다에서 잡아온 조기떼들이 산처럼 부려지고 있다. 제주 서해안의 한림항은 일대 바다의 수산물이 모두 모여드는 곳. 이른 새벽 제주의 어선들은 물론이고 멀리 목포, 삼천포, 여수 일대에서 출항한 어선들이 이곳 한림항에 고기를 부린다. 조기잡이를 나선 어선들은 그물째 이곳 한림항으로 입항해 그물에 매달린 조기를 털어낸다. 아직 어둠이 다 가시지 않은 항구에는 환하게 집어등을 켜고 입항한 어선들에서 내린 그물을 털어내는 풍경이 장관을 이룬다.
한림항의 어판장에는 민어도 흔전만전이다. 장치, 갯장어, 가오리, 낙지…. 이루 이름을 다 댈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수산물이 어판장으로 들어와 경매가 이뤄진다. 티끌만한 흠집도 없이 온몸이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갈치나 붉은 기운이 감도는 도미는 어찌나 싱싱한지 그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워낙 들어오는 수산물이 많은 만큼 경매는 번개처럼 이뤄진다. 다른 지역의 수산물 경매장에서는 경매인들이 관광객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암호 등을 써서 거래를 하지만, 이곳에서는 경매사들이 또박또박 가격을 불러 어른 팔뚝보다 굵은 갈치 한 상자가 얼마에 팔리는지, 1m는 족히 넘어보이는 민어가 얼마에 거래되는지 쉽게 알수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경매현장에서 경락받은 펄펄 뛰는 수산물을 웃돈을 주고 그 자리에서 구입할 수도 있는데, 다만 아쉬운 것이 경매 거래단위인 박스째 구입해야 한다는 것. 서너마리만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몇몇 여행객은 그 자리에서 다른 여행자와 의기투합해 박스째 갈치를 구입해 즉석에서 나눠갖기도 했다. 조기를 그물에서 떼다가 모양이 상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조기들을 따로 놓고 경매하는데, 이런 것들은 거의 그저 줍는다고 할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제주 인근의 바다에서 갓 건져낸 이렇듯 싱싱한 해물들을 어디서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오전 10시 - 해안 인근 별도봉 산책로
▲ 스쿠터를 타고 제주여행에 나선 커플이 오후 무렵 바다가 짙은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종달리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다.
제주가 여행자들에게 이국적인 낭만을 불러오는 풍경은 이른바 투명한 ‘에메랄드색’의 바다다. 협재의 바다가 그렇고, 우도의 바다가 그렇다. 제주에서는 맑은 날이면 어느 때고 그런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특별히 시간을 가리지 않아도 이런 풍경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꼭 가려서 찾아가야 만날 수 있는 바다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푸른 잉크를 진하게 풀어놓은 듯한 짙은 청색의 바다 풍경이다. 맑고 투명한 바다도 이국적이지만, 온통 짙은 청색으로 물드는 바다의 모습도 그에 못지않다.
오전 시간대에 이런 짙은 바다색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시내의 별도봉 해안산책로다. 제주 남쪽의 서귀포와 달리 북쪽 제주시 부근은 일찌감치 개발이 돼서 이렇다 할 바다풍경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별도봉 인근은 공원과 산책로로 조성돼 해안 능선을 따라 눈이 시린 짙은 청색의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이쪽의 바다색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가 등 뒤에 있는 오전 10시 무렵. 이 시간에는 바다의 진청색이 가장 짙어진다.
제주 동쪽의 바다에서도 감탄사가 터지는 잉크색 바다를 만날 수 있는데 그곳이 바로 시흥리~종달리를 잇는 해안도로다. 이쪽 바다가 가장 짙고 아름다운 청색으로 빛날 때가 바로 해가 살짝 기울어지는 오후 2시 무렵. 머리 위에 떠있던 해가 서쪽으로 살짝 기울면서 동쪽 끝의 시흥리 쪽 바다는 순광으로 푸르게 빛난다. 그 바다색이 가장 짙은 곳이 바로 해안도로변의 고망난돌쉼터다.
고망난돌쉼터는 검은 현무암 바위들이 울퉁불퉁 솟아있는 자그마한 공원인데, 곳곳에 누워서 자라는 사스레나무들이 펼쳐져 있고,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돌로 만든 벤치며 탁자들이 놓여 있다. 바다에서 어찌 저렇게 선명하고 짙은 청색이 배어나올 수 있을까. 피크닉을 다녀오듯 가볍게 샌드위치나 도시락을 싸들고 청색 바다를 내려다보며 가벼운 식사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낮 12시 - 편백·송악 등 무성한 겨울 숲
제주에서의 도보여행이라면 바다를 따라가는 올레길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중산간의 숲으로 드는 사려니 숲길은 전혀 다른 제주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준다. 해발 500~600M를 오르내리는 이 숲길에서는 겨울로 접어든 온대낙엽수림에 난대림이 섞여있는 풍경을 맛볼 수 있다.
흔히 나뭇잎을 다 떨군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겨울 숲에서는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겨울 숲의 매력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겨울 숲에서는 다른 계절에는 무성한 이파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숲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조밀하게 들어선 나무둥치며 가지들이 시야가 닿는 저 안쪽까지 첩첩이 겹쳐져서 그려내는 모습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폐부 깊숙이 스미는 차갑고 상쾌한 대기 또한 겨울 숲이 주는 선물이다.
‘사려니 숲길’이란 이름은 사려니오름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붙여진 것. 사려니란 산(山)을 뜻하는 제주방언인 ‘솔’에다가 안(內)을 뜻하는 ‘안이’가 붙어 ‘솔아니’로 불려오다가 ‘소래니’에서 ‘소려니’로, 다시 ‘사려니’라고 바뀌어 불리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초 남원 쪽 사람들에게 사려니오름은 멀고 깊은 중산간에 자리잡고 있어 ‘신성한 숲’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1112번도로가 놓이면서 물찻오름을 지나 사려니오름까지 닿는 사려니 숲길이 조성되면서 이제는 쉽게 찾아가볼 수 있게 됐다.
숲길에는 때죽나무와 서어나무, 졸참나무, 삼나무들이 무성하게 서 있다. 육지의 나무들이 그저 위로만 가지를 뻗는다면, 이곳 제주 숲에 들어선 나무들은 휘고, 옆으로 가지를 뻗으면서 서로 얽히고설켜서 자란다. 숲길은 겨울임에도 안으로 들수록 색깔이 더 짙어진다. 나무를 감고 올라간 줄사철나무와 송악, 숲길 옆에서 자라는 꽝꽝나무는 겨울이 깊어질수록 초록색이 더 짙어진다. 군데군데 무리를 지어 자라는 삼나무와 편백의 푸르름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다가 새비나무와 작살나무가 매단 고운 보라색 열매들이 액센트를 더해준다. 표고 차이가 거의 없이 평탄하게 이어진 사려니 숲길을 천천히 산책하노라면, 먹이를 찾아 내려온 노루쯤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오후 4시30분 - 예술작품 같은 1112번 도로
이른바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 바다 풍경임을 부인하긴 어렵지만, 제주내륙 중산간 지역의 숲의 아름다움도 그 못지않다. 아니 어떤 때는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제주의 바다보다 몇배쯤 더 그윽하고 아름다운 풍경의 숲길을 만나기도 한다. 그중 최고가 바로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에서 제주시 봉개동까지 이어진 1112번 지방도로다.
총 길이 27.3㎞, 왕복 2차로의 이 길은 좌우에 하늘을 찌를 듯 도열한 삼나무와 조형미 넘치는 유려한 곡선의 길이 만나 최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 길이 단순히 ‘이동로를 만들기 위한 토목공사’로 이뤄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 애초부터 그 길을 걷거나 달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가가 빚어낸 것처럼 느껴진다. 길의 위 아래 오르내림과 좌우 구부러짐의 유연함이 뛰어난 미감을 지닌 예술가의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처럼 여겨질 정도다.
이 도로가 하루 중 가장 황홀한 아름다움으로 출렁이는 때는 해가 비스듬히 비껴드는 늦은 오후 무렵이다. 해가 짧아진 이즈음의 시간으로 재본다면 오후 4시30분쯤이 딱 알맞겠다. 이 시간에 1112번 도로에 들면 삼나무 숲이 기울어가는 해를 받아 온통 황금빛으로 빛난다. 아스팔트 도로에도 빛이 스며들어 금색으로 반짝거린다. 길과 숲이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차는 시간이다.
도로는 자동차를 위해 놓인 것이지만, 차를 타고 휭 하니 달려가는 것만큼 바보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 길에 오르면 길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도로에 따로 인도가 마련돼 있지 않아 위험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저 길가에 차를 대놓고 길의 끝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중문의 바다 한눈에… 이국 휴양지 연상케
묵을 곳
제주에는 특급호텔부터 펜션까지 종류별로 숙소가 많다. 가족 단위 제주여행이라면 가장 추천할 만한 곳은 단연 롯데호텔 제주(사진)다. 중문의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는 호텔의 위치도 그렇고, 정원도 이국적인 휴양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운치 있게 꾸며져 여행의 분위기를 만끽하게 해준다. 정원의 야경이 빼어나 밤시간대에 가볼 만한 곳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바다전망 객실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라군스타일의 야외풀과 풍차, 바다가 어우러지는 정원의 야경은 환상적이다. 호텔 개관 이래 정원에서 매일 저녁 펼쳐지는 화산분수쇼도 명물이다.
올겨울 롯데호텔 제주는 ‘액티브한 여행’을 앞세우고 있다. 올레길 트레킹을 비롯해 선상낚시체험, 한라산 등반, 요트체험 등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태키지상품을 마련해 놓았다. 1월말까지 올레길 걷기와 감귤따기, 한라산 등반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자연탐방패키지(28만~37만원·이하 2인 기준)부터 아이스링크 이용 등을 포함한 조이플라이프 패키지(26만~35만원) 등을 마련했다.
또 신혼여행객을 위해 휴가도우미와 함께 올레길 체험을 즐기고 요트를 탑승할 수 있는 로맨틱허니문 요트패키지와 고급객실을 이용하고 수입렌터카를 제공하는 럭셔리 허니믄패키지도 판매하고 있다. 1577 -0360, 064-731-1000. www.lottehoteljeju.com
<출처> 2009-12-02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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