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임자도 해변승마
바다를 따라 태양과 함께 달리자
박경일 기자
▲ 임자도 대광해수욕장의 너른 백사장에서 낙조 무렵의 붉게 물든 바다를 배경으로 말을 타는 모습. 사실 해변에서 말을 탈 정도로 승마를 익히려면 적잖은 훈련이 필요하다. 말 위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어떨까. 그저 해변에서 이런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백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해안 백사장이 긴 해수욕장을 일컬어 ‘명사십리’라고들 하지만, 이곳 백사장의 길이는 ‘십리’(4㎞)의 무려 세배인 12㎞에 달합니다.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쉬지 않고 걷는다 해도 2시간30분이 걸린다는 백사장을 가진 곳. 사리 무렵의 썰물 때면 바다가 밀려 나가면서 드러나는 백사장의 폭이 400m를 넘는 곳. 바로 전남 신안군 임자도의 대광해수욕장입니다.
대광해수욕장의 어마어마한 크기는 보지 않는다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이 가물가물한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이 1.5㎞니, 대광해수욕장은 해운대해수욕장 8개를 붙여 놓은 정도의 크기입니다. 어찌나 넓은지 여름 휴가철에 아무리 피서객들이 몰려들어도 그저 ‘한쪽 구석’에서만 놀다가는 정도입니다. 이런 섬에 누가 얼마나 찾아든다고 이리도 큰 백사장을 준비하고 있을까 싶습니다.
아직 바다가 이른 이즈음에 대광해수욕장을 찾으면 그 너른 백사장을 혼자서 독차지할 수 있답니다. 발자국이 남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고운 모래사장에는 밀려 나간 썰물의 물결이 그려 놓은 그림들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지요.
대광해수욕장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낙조 무렵입니다. 해 질 무렵 반짝이는 바다와 모래톱은 숨 막히는 붉은빛으로 물들어 황홀할 지경입니다.
대광해수욕장에서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탄력 있는 근육을 가진 훤칠한 말이 백사장을 차고 달리는 모습입니다. 최근 해수욕장 벼락바위 북쪽에 임자도경마공원이 들어서면서 낭만적인 해변승마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말을 타고 저물 무렵의 바다를 바라보며 달린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말을 탈 줄 모른다 해도 낙조로 붉게 물든 해안을 달리는 말의 모습만 봐도 충분히 낭만적입니다.
그렇다고 임자도가 너른 해수욕장이나 해변승마만 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임자도에는 승천한 용의 전설을 품고 있는 동굴인 용난굴이 있고, 아늑한 해변을 가진 어머리해수욕장과 꼭꼭 숨어 있는 은동해수욕장이 있습니다. 흐릿하지만 조선 후기 문인화가 조희룡의 유배의 자취도 남아 있습니다. 또 필길리에서 해안 임도를 타고 하우리까지 이르는 빼어난 해변 트레킹코스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즈음 임자도는 먹을거리들로 넘쳐납니다. 살이 꽉 찬 꽃게는 물론이고, 산란기를 앞두고 살이 탱탱하게 오른 병어는 6월 초 임자도 연안을 회유할 때 최고의 맛을 낸답니다. 위판장이 뭍으로 옮아가면서 지금은 쇠락해 쓸쓸한 포구가 되고 말았지만, 여전히 전국 새우젓의 60%를 생산한다는 전장포도 빼놓지 말아야 하겠지요.
인간은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고, 파도는 바위를 찢어 굴을 만들고
전남 신안군 임자도 해변의 낭만
▲어머리해수욕장 끝의 바위 동굴인 용난굴. 용이 빠져나갔다는 굴의 안쪽으로 들어서 바다를 내다보면 독특한 느낌이 든다. 임자도로 유배됐던 문인화가 조희룡은 이 굴에 깃든 전설을 바탕으로 매화 둥치가 용처럼 휘감긴 ‘용매도’를 그리기도 했다.
▲임자도 곳곳에 남아 있는 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드는 모습.
# 임자도에서 만난 의외의 풍경들
한반도의 서·남해안 어디고 섬들이 몽실몽실 떠 있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점암선착장을 출발해 임자도로 향하는 농협 여객선 위에 오르면 오종종하게 떠 있는 섬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은 수평선을 다 가로막았다. 그중 가장 큰 섬인 임자도에는 제법 고도를 높인 연봉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양쪽의 능선 끝을 바다에 담그고 있다. 섬으로 막힌 바다는 고요하다.
임자도 진리선착장. 전남 신안군 지도읍 감정리 점암선착장에서 차를 싣고 섬으로 넘어오자 내비게이터 화면에서 길들이 죄다 사라져 버렸지만 난데없이 선착장 앞에는 국도 24호선의 시작을 알리는 도로원표가 서 있다. 연륙교 건설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면서 민원을 제기해 국도의 시작점을 섬 안쪽으로 끌고 들어온 것이다. 국도의 시작점을 섬으로 가져오면 곧 연륙교가 놓아질 것으로 기대했던 섬사람이야 나무랄 일이 아니겠지만, 바다로 막힌 길에 버젓이 국도의 시작점이란 도로원표를 세워준 정치인들이나 행정관료들의 무원칙한 태도가 딱하기만 하다.
임자도로 들면 의외의 풍경이 펼쳐진다. 섬에 당도하면 바닷가 포구마을의 풍광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섬 안은 뜻밖에도 온통 모내기로 바쁜 너른 논들이다. 임자도의 논은 수백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섬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 낸 것들. 땅 한 뙈기 변변치 않은 섬마을에서 장포만에 둑을 쌓고 농토를 만들어 낸 데 이어 화산과 구산에도 둑을 쌓았다. 수백년 동안 개미처럼 일했던 섬사람들은 순전히 지게와 망태기만으로 구산도, 대기리도 등 인근 여섯개의 섬을 하나로 합쳐 농토를 만드는 대간척사업을 이뤄 냈다.
임자도 주민들은 지금도 이렇게 만들어진 농토에 기대어 살고 있다. 임자도의 마을은 모두 24개. 이 중 고기를 잡는 마을은 3개뿐이고, 나머지는 죄다 벼농사나 대파, 양파농사를 짓고 있다.
# 낙조 무렵 드넓은 모래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풍경
임자도의 대표적인 여행 목적지는 대광해수욕장이다. 한여름 휴가시즌이 아니어도 그렇다. 임자도에 들기 한참 전인 무안군 해제반도에 들어서면서부터 ‘임자도’란 표지판 대신 ‘대광해수욕장’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올 정도다. 대광해수욕장은 일단 대한민국 최대라는 해변의 크기에서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해안선의 길이는 무려 12㎞. 숫자로만 보면 별 감흥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백사장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가 서울시청에서 서초구 우면동 예술의 전당까지 거리보다 더 멀다’. 백사장의 폭도 300m에 달하는데,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때는 400m가 넘는다. 그야말로 사막을 방불케 하는 광활한 모래밭이다. 이즈음 대광해수욕장을 찾아간다면 그 드넓은 백사장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 섬을 찾아드는 외지인도 별로 없거니와 썰물 무렵 산마이(일자그물)에 걸린 숭어나 멸치 따위를 거두러 오는 몇몇 인근 어민들을 제외하고 백사장은 텅 비어 있다.
대광해수욕장의 벼락바위 북쪽에서는 해변을 달리는 말을 만날 수 있다. 지난 4월 이곳에 임자도해변승마공원이란 승마장이 들어섰다. 제법 큰 규모의 펜션식 숙소와 실내마장을 갖춘 승마장이다. 이곳에서는 13마리의 말을 보유하고 승마교육과 해변승마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물론 이곳에서 해변승마를 즐기려면 수준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2박3일쯤의 단기교육을 받고 해안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교관과 함께 보행 정도만 가능할 뿐이고 혼자 백사장을 달리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나 꼭 말 위에 오르지 않은들 어떨까. 낙조 무렵 해안을 달리는 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
# 은동해안의 달빛, 그리고 조희룡의 흔적들
임자도에는 대광해수욕장 말고도 섬 남쪽에 어머리해수욕장과 은동해수욕장이 있다. 섬사람들은 ‘쬐깐하다(작다)’고 했지만, 그건 대광해수욕장과 비교했을 때 얘기고, 다른 데 있었더라면 번듯한 규모의 해수욕장 취급을 받았을 곳이다.
어머리해수욕장의 모래톱 끝에는 용난굴이 있다. 해안 바위를 찢어낸 듯한 제법 깊은 동굴인데 중국에서 청자를 가득 싣고 오던 배가 임자도 앞바다에 침몰한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중국 선원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자 그 눈물이 바위에 떨어져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밀물에는 동굴이 물에 잠기니 썰물 때 찾아가야 한다.
어머리해수욕장에서 산허리를 잘라 이은 임도를 넘어가면 은동해수욕장이다. 코앞에 자그마한 옥섬을 거느린 은동해수욕장은 아늑하기 이를 데 없다. 손톱만 한 집게와 엽낭게들이 동글동글한 모래 구슬을 백사장 가득 빚어 놓았다. 조선 후기 예송논쟁에 휘말려 임자도로 유배를 왔던 문인화가 조희룡이 꼽은 ‘임자도 삼절’ 중의 하나가 바로 ‘은동에 뜨는 달’이다.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안온한 맛이 느껴지는 은동해변에 달이 뜨는 전경이 얼마나 아름다울지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하다.
환갑이 넘어 임자도로 유배온 조희룡은 3년여 동안 어머리해수욕장 인근 이흑암리의 움막집에 기거하며 괴석도와 매화도, 묵죽도 등을 그려냈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용난굴의 전설을 전해 듣고는 매화 둥치가 승천하는 용처럼 힘차게 뒤틀려 있는 ‘용매도(龍梅圖)’를 그리기도 했다. 임자도엔 조희룡의 자취는 다 사라지고 기념비와 적거지 표지석만 남아 있다. 조희룡의 적거지는 소치 허련이 남종문인화를 집대성한 진도의 운림산방과 견주어 모자람이 없거늘, 너무도 초라하다.
임자도에는 인근 주민들도 잘 모르는 빼어난 해안도로가 있다. 필길리에서 하우리까지 해안을 잇는 산자락의 임도인데, 목섬과 재원도, 상항월도, 두리대섬, 대섬, 옥섬이 떠 있는 그림 같은 해안을 내려다보며 걷는 맛이 그만이다. 특히 해질녘의 낙조 풍경이라면 임자도에서 여기를 따라올 곳이 없다.
# 지금이 임자도에 먹을거리가 가장 풍족할 때
꼭 지금 임자도에 가야 할 이유는 먹을거리 때문이기도 하다. 임자도 근해에는 지금 병어가 제철이다. 병어야 사철 잡히는 것이지만, 알을 배고 임자도 앞바다를 회유할 지금 무렵이 가장 맛이 좋다. 같은 생선이라도 계절에 따라 이렇게 맛이 다르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갓 잡아 올린 은빛 비늘의 병어를 뼈째 썰어 놓으면 탱탱한 살점이 입안에서 고소한 맛을 내며 졸깃하게 씹힌다. 이즈음에는 알이 꽉 찬 꽃게도 임자도 일대 해역에서 잡힌다. 이때 잡히는 암게는 단단하게 살이 차서 달콤한 향이 난다. 여기다가 밴댕이도 맛이 들었다. 주민들은 밴댕이를 흔히 송어라고 부른다. 주로 초고추장에 새큼달큼하게 무쳐서 무침회로 먹는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임자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새우젓과 천일염이다. 임자도 곳곳의 염전에서 천일염을 만들어 내는데, 볕이 따갑고 건조한 6월에 만든 소금이야말로 최상급으로 친다. 새우젓도 음력 5월과 6월에 잡히는 오젓과 육젓이 최상품으로 꼽힌다. 한때 새우젓 경매로 흥청거렸던 전장포는 위판장이 임자도로 건너오는 지도 쪽으로 옮아가서 썰렁하지만, 새우잡이 배들은 새우 그물을 산처럼 쌓아 두고 출어를 준비하고 있다.
요즘 임자도에는 병어나 게, 새우가 흔전만전하지만, 정작 이를 맛보려면 임자도가 아니라 위판장이 있는 지도대교 아래 송도로 가야 한다. 송도위판장에서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 무렵까지 어선들이 그날 잡아와 부려 놓은 해산물의 경매가 이뤄진다. 경매에 부쳐지는 해산물은 모두 근해에서 잡힌 자연산이다.
임자도·송도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함평분기점에서 무안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북무안 나들목에서 나온다. 77번 국도에 올라 곧 만나는 24번 국도를 따라 지도읍을 지나면 임자도까지 가는 점암선착장이다. 점암선착장에서는 임자도까지 하루 15번 도선을 운행한다. 점암선착장에서 임자도로 가는 배편은 돈을 받지 않고, 나올 때 왕복 요금을 한꺼번에 낸다. 왕복 요금은 2600원. 승용차는 왕복 1만8000원을 받는다. 점암선착장에서 임자도까지는 20분이 걸린다.
임자도 인근에서 나는 해산물을 구입할 수 있는 송도위판장은 지도면소재지를 지나 사옥도 쪽으로 방향을 잡아 지도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우회전해 내려가면 만난다. 송도위판장에서는 오전 8시부터 어선이나 상고선(운반선)이 들어오는 시기에 맞춰 수시로 경매가 열린다. 경매를 앞두고 중도매인에게 미리 부탁하면, 경매에서 낙찰을 받아 바로 물건을 넘겨주기도 한다. 어선 7척을 보유하고 있는 중도매인이 운영하는 무지개수산( 0...)을 추천할 만하다.
묵을 곳·먹을 것
임자도에는 대광해수욕장 인근에 숙박업소들이 몰려 있다. 해수욕장의 주출입구인 남쪽엔 제법 큰 모텔들이 들어서 있다. 대광해수욕장의 임자도해변승마공원(070-8285-2450)이나 은동해수욕장의 은동통나무집( 0...)을 추천한다. 깔끔하기도 하거니와, 해수욕장에 바짝 붙어 바다를 굽어보고 있어서 자리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해변승마공원은 승마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숙박료는 2인 기준 3만 ~ 5만원.
여인숙을 겸하고 있는 허름한 서울식당( 061-275-3038 )은 짙은 전라도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임자도 사람들이 외지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다. 메뉴판이 없고 식당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백반상(6000원)을 내온다. 이즈음에는 단연 병어회와 병어조림(각 3만원)이 최고의 맛을 낸다. 따로 해산물을 주문하지 않더라도 백반상에 네댓 가지의 짭조름한 젓갈과 그때그때 바다에서 난 생선들을 굽고 지지고 끓여서 내놓는다.
<출처> 2009. 6. 3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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