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15) : 가이사랴
초대교회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
- 바울의 선교 활동의 기지이자 수감되었던 도시 -
글·사진 남상학
* 가이샤라 지역의 유물 *
이스라엘 서쪽 지중해 해안 도시로 하이파에서 남쪽으로 약 37㎞, 갈멜산에서 남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이사랴는 헤롯대왕에 의하여 주전 25년경에 중건되어 10여년만에 세워진 인공적인 항구도시로 현재는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고 유적만 남아 있다.
이 도시는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지역을 헤롯왕에게 하사하여 지은 것인데, 헤롯 왕은 로마황제 가이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라고 부르게 되었다.
가이샤라는 규모면에서 아주 큰 항구도시였다. 이 항구도시는 깊이가 36.6m나 되는 바다를 거대한 돌로 메워 지중해로부터 부딪쳐오는 방파제를 만들고 그 위에 성벽과 여러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시장과 경기장, 원형극장, 신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 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규모로 건축되었다.
특히 가이사랴는 지중해에 위치해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을 얻기가 어려워 가이사랴 북쪽에 있는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9km에 달하는 도수교(aqueduct)를 건설했다. 또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저와 행정본부를 두어 행정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서 사도행전(10~11)에 나오는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가 가이샤라에 주둔했던 것을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항구로서 그리 좋은 조건이 아니었는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이곳에 항구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이 지역에 심한 북풍이 불어 큰 폭풍일 때 마땅히 피할 항구가 없고, 이스라엘 북쪽 도르(Dor)와 욥바(Jaffa) 사이에 좋은 항구가 없어 로마의 문물을 신속히 받아들이고 사마리아의 농산물을 로마에 수출하는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이 이스라엘의 위대한 통치자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가이샤라는 이후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도 계속 발전함으로써 인구가 약 10만명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주후 638년 십자군이 이스람 군대에 의하여 패망하면서 이 거대한 도시 가이샤라는 함락되어 역사 속의 도시로 사라져가게 되었다. 폐허가 된 현장에서 파괴된 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지금은 조용히 관광객을 맞고 있다.
유적들 가운데는 십자군 당시에 쌓은 성,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원형 야외극장, 마차경기를 즐겼던 해안의 경기장, 목욕탕 터, 갈멜산으로부터 물을 끌어들였던 수로가 바닷가에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야외 원형극장에서는 지금도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콘서트가 열린다. 우리가 찾아갔을 때에도 공연을 위하여 돌로 된 스탠드 아래 공간에 의자를 배열하고 무대에선 각종 음향기기를 설치하고 있었다. 무대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는 공명이 되어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무엇보다도 관광객들이 환호하는 것은 유적들이 있는 해안에서 짙푸른 망망대해 지중해를 바라보면서 독특한 낭만을 즐기는 일이다.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바닷가 전망대에 서면 그 동안 육로를 달려왔던 사람들에게 시원함과 아울러 상쾌함을 선사해 준다. 이곳에선 해변 바위 위에서 고기를 낚는 강태공들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이샤라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앞서 언급한 로마 백부장 고넬료는 자신이 주둔하고 있는 가아샤라에서 욥바의 시몬 집에 머물러 있던 베드로를 모셔오게 하여 고넬료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받게 한다. 이것은 당시로선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20)
이 말씀이 처음으로 실천에 옮겨진 이 역사적 사건은 베드로가 유대인이 아닌 로마 사람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기독교가 유대인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고,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곳 가이샤라는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여러 번 들른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일곱 집사 중의 하나였던 빌립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행 10:1, 21:8) 또 사도 바울은 로마로 이송되기 전에 이곳 가이샤라 감옥에 약 2년간 수감(행 18:22, 21:8, 23:23~33, 24:27, 26:1)되어 있다가 로마로 가서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순례자들은 초대교회 당시 이방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현장 가이샤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한 의인 고넬료에게 내린 성령감림 사건을 되짚어보며, 이방 선교의 당위성을 앞세워 복음을 들고 지중해를 건넜던 바울의 선교 열정에 감탄하면서 다시 선교의 사명을 다짐해 본다.
* 입구 쪽에서 바라본 가이샤라 유적지 외형
* 가이샤라 유적지 매표소와 매점
* 지중해를 향하여 설계한 야외 원형극장, 여기서는 지금도 공연을 한다.
* 원형극장 위층 계단에서 내려다 본 해안 쪽의 유적지
* 폐허가 된 유적지의 여러 모습들 *
* 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대리석 석물
* 대리석 기둥과 목욕탕 터와 수로
* 해안전망대에서 바라본 지중해 좌, 우 해안
* 해안에 이어서 만든 (마차) 경기장
* 해안 전망대에 기대선 필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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